환절기, 두 편의 이별 시
해마다 절기가 바뀔 때면 나는 어김없이 몸살을 앓았다. 학교도 결석한 채 모두가 빠져나간 빈 방에서 열에 들뜬 벌건 얼굴로 가위 눌려 끙끙 헛소리까지 했다. 그러다가 깨어보면 머리맡의 텅 빈 약봉지처럼 쓸쓸하고 허전하던 환절기 통증, 그것은 스무 살 넘도록 이어졌다. 이런 어미를 닮았을까. 딸은 계절의 끝자락,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에 걸렸다. 덕택에 모과와 생강 차향이 초추(初秋)의 햇살처럼 방 안 가득 퍼졌다.
문득, 계절의 변화는 사람의 변심처럼 참으로 문득 감지된다. 아침, 저녁 오소소 돋는 솜털들, 햇 가을의 드맑은 기운이 주는 청량감이다. 더위 먹어 까맣게 잊었던 꽃 이름들이 서서히 회복되는 총기(聰氣)와 함께 하나 둘 되살아난다. 그대와 나 이리 쉽사리 이별할 수 없노라며 아직도 대문 앞을 서성이는 옛 애인인가. 낮의 폭염은 여전하다. 하지만 밤새 들여놓은 새 가구처럼 바깥의 풍경도, 바람도 확연히 달라졌다.
때론 폭염이, 때론 폭우가 시시각각 뒤바뀌던 지난 여름, 열정적이긴 했지만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여름에 나는 어지간히 지쳤다. 가까우면 서로 닮더라고 나 역시 맨살 드러내놓고 함부로 지낸 지나간 계절의 부끄러운 흔적을 서둘러 지운다. 그리고 냉정, 침착, 사유, 응시... 등등의 가을입구가 보낸 고상한 단어들을 풀기 직전의 선물처럼 궁그리며 나는 한 마리 도도새처럼 태평한 마음에 젖는다.
가을의 닻은 지상의 어떤 것보다 고요하고 묵직하다했다. 나는 그 닻에 의지해 이윽고 가난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인간이 생각해낸 가장 긴 단위 가운데 하나라는 겁(劫)이라는 세월에 대해서까지 골몰하게 된다. 다가오는 죽음도 막을 수 없지만 눈 앞에 펼쳐진 구차한 삶도 결코 놓아서는 안 된다는 충고도 스친다. 고작 백 년도 못 채우는, 우리의 버둥거리는 생의 순간, 순간 삽화들이 우스꽝스럽게 펼쳐진다.
아주, 아주 섬세한 실로 짜 내린 비단 옷자락의 기척으로 바위에 물방울이 떨어질 만큼의 구멍을 내는 동안을 겁이라 알고 있었다. 둘레 40 리 되는 성(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워놓고 하늘에 사는 나이 많은 이로 하여금 3년에 한 알씩 가지고 가도록 하는데 그 겨자씨 죄다 없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1겁이라는 건 오늘에야 알았다. 딸아이가 툴툴 털고 일어날 동안이 어미에게는 그 1겁만큼이나 지루한가. 아니면 한 번 내 곁을 떠나면 다시는 해후할 일 없는 이 후덥지근한 시간과의 작별이 겁만큼이나 더딘 것인가.
열에 들떠 끙끙 앓는 딸아이 곁에서 뒤적이는 시집 몇 권. 이러나저러나 여름 그가 나를 가멸차게 밀치고 떠나는 중인가. 내가 여름, 그를 보내는 중인가. 어쨌든 나는 이런 시구들을 읊조리며 2011년 여름과 기꺼이 이별의식을 치루고 있는 것이다.
그대, 아직 내게
무슨 헤어질 여력이 남아 있어 붙들겠는가.
너는 이내 돌아서고 나는 미리 준비해 둔 깔깔한 슬픔을 껴입고
돌아왔다. 우리 사이 협곡에 꽂힌 수천의 기억의 돛대, 어느 하나에도
걸리지 못하고 남루한 옷으로 지천을 떠돌고 있다. 아아, 난
간마다 안개
휘파람의 섬세한 혀만 가볍게 밀리는 거리는
너무도 쉽게 어두워진다.
잘 가거라. 언제나 마른 손으로 악수를 청하는 그대여
밤새워 호루라기 부는 세상 어느 위치에선가 용감한 꿈꾸며 살아있을
그대, 잘 가거라. 약기운으로 붉게 물든 등을 축축이 적시던 헝겊 같은
달빛이여, 초침 부러진 어느 젊은 여름밤이여
기형도-‘비가(悲歌) 2’ 중 부분 발췌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떨며 멈칫멈칫 물러서는 산빛에도
닿지 못하는 것
행여 안개라도 끼이면
길 떠나는 그를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것
오래 전 울린 종소리처럼
돌아와 낡은 종각을 부수는 것
아무도 그를 타이를 수 없지
아무도 그에겐 고삐를 맬 수 없지
이성복-‘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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