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공, 그 명운(命運).
『마흔 해도 넘은 일이라 이제는 기억마저 아득하다. 적산가옥, 여러 세대가 함께 살던... . 걸핏하면 문 앞까지 짙은 바다 안개가 밀려와 가끔 집을 흔들어 놓았고. 그 기척에 놀라 이침 잠을 깨기도 하던 그 집에는 또래의 소녀가 살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소녀는 집 앞 커다란 회양목 아래 앉아 있곤 했다. 하루 종일 바다를 향해 앉아있던 중국인 소녀는 나직이 제 나라 노래를 부르기도 했으나 어느 날 홀연히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아무려나. 이제는 새하얀 얼굴이 바랜 도화지처럼 아련히 떠오를 뿐, 눈도 코도 선명히 기억나지 않는 소녀다. 살다보면 이국소녀가 어린 가슴에 남긴 채울 수 없는 상실감, 우리에게 그 닮은 존재가 한둘이었던가. 영화 전편에 흐르는 바이올린 선율로 하여 누명에 기는 남자의 불행마저 부럽더라고, 名鼓手 김명환을 소개하는 페이지의 서두를 장식한 이런 아름다운 문장의 쓸쓸함이 내게 주는 감명도 그렇다. 낮은 음색으로 퍼지던 해무의 파장처럼 은은하던 소녀의 노래, 한 사람의 지독한 불행조차 너끈히 감싸주던 바이올린 선율, 그리고 누구보다 뛰어난 북 솜씨를 지녔었다는 鼓手 김명환이 종일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요 며칠 내내 책상 앞에 들붙어서 묵직한 풍수책과 씨름 중이다. 한 권, 한 권, 꼼꼼히 살펴 교정 중이니 엄연한 일, 하지만 나는 또 본연의 임무를 망각한다. 별이름 강(罡), 새싹 유순할 손(巽), 구덩이 감(坎) 따위의, 간만에 해후하는 한자어도 반가웠다. 그런데 ‘지리(地理)로부터 숨 쉬는 생명체는 생사를 막론하고 편안, 정리, 조화를 꿈꾼다’는 이 구절이 턱하고 내 목울대에 걸리더니 이어지는 여덟 개의 별자리가 작동키 눌린 프로펠러인양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비상시키는 것이다.
재운과 복록을 관장하는 별자리들보다는 불운을 불러일으킨다는 별 앞에서 왜 이리도 서성이게 되는지. 특히 염정성(廉貞星)이라는 별자리, 인생노정의 온갖 불행을 유발한다는 이름의 별에 이르러선 더욱 그렇다. 여학교 시절, 처음 시도되는 현악반의 단원모집이 있었다. 끝내 허락하지 않던 아버지로 하여 꿈은 무참히 좌절됐다. 극심한 상실감에 꽤 오랫동안 음악실 근처엔 갈 수 없었다. 그런 상흔 탓인가. 불운한 별의 영향을 받으면 태어나는 것이 악공(樂工)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선 무궁무진 피어나는 이런저런 상념들, 악공, 악공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외의 파장에 나는 아예 책을 덮었다.
살다보면 이런 대목이 있었다. ‘제가 얼마나 더 아래로 내려서기를 바라십니까?’며 운명을 관장하는 신께 반문하고 싶어지는, 자신도 모르게 항변의 볼멘소리가 터지는 순간 말이다. 결국 추락의 구덩이 속에서 마침내 깨닫게 된다. 神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지도, 거저 빼앗지도 않는다는 엄격한 거래법칙을. 하긴 제 살을 베어본 적 없는 자가 어찌 남의 상처를 쓰다듬을까. 대대로 만석군인 부호 가문에서 태어난 김명환 역시 평생 외롭고 험난하고 고독한 악공의 길을 택해 묵묵히 걸어갔다. 한 자 두 치 길이, 여덟 치의 둘레의 북에 갇힌 가난한 인생길, 염천(炎天)이면 늘 칼날처럼 진하게 풀 먹인 옥색 세모시 한복 떨쳐입던, 그것이 그가 누린 유일한 호사였다던가.
세게 맞을수록 더욱 웅장한 소리를 내는 북. 둥 둥 둥 울리는 북소리에 마음 빼앗겨 본 사람은 안단다. 저 홀로 울다가 마음을 두드리고 어느 순간 자지러지며 핏줄로 흘러들어 와 온 몸을 전율케 하는 저 묵직한 연타음이 전하려는 깊은 신음을. 인간이 처한 삶의 결을 살펴 부드럽게 위무하는 특권은 함부로 주어지지도 않는 것 같다. 애처로운 눈빛, 아니 눈물 콧물로 읍소하며 애걸복걸 매달리는 나약한 인간의 간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외려 슬쩍 밀어뜨려 저 깊은 구덩이로 빠트리고 짐짓 시침 떼던 장난꾸러기 신. 가까스로 뭍으로 기어오른 인간에게만이 비로소 허락한다. 산천초목 사이사이 은밀히 숨겨놓은 신의 배려다. 절망 밑바닥에 다다라야 보이는 출구다.
북 외에는 곁눈질 한 번 없었다는 청렴한 악사(樂士), 김명환 선생의 족적을 새기며 읽으며 드는 의문이 ‘편안과 안존만이 우리가 추구하는 올바른 행태의 삶일까?’다. 돌이켜 보면 외롭고 험난해 매양 고달팠지만 한편 유쾌했던 게임 아니었을까. 달군 송곳으로 가슴을 찔러 한(恨) 섞어 빚은 소리를 완성해 내는 악공. 한 시절 스쳐갔던 꿈의 잔해를 나는 아직도 치울 수 없다. 마흔해 가까운 세월 앞에 이제는 흘려보내도 좋으련만 여전히 악기 얹은 어깨의 뻐근함과 활 질로 시큰한 손목 통증이 아쉽다. 그래서 청렴하고, 맑고, 곧은... 명운을 뜻하는 이름의 별 자리, 염정성(廉貞星)의 그늘이 솔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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