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이런 일이
김현임(수필가)
그녀는 밥 한 수저 뜨지 못했다. 우리 일행이 밥을 다 마치도록 울먹울먹 사연을 풀어놓는다. 눈물 콧물 훌쩍이느라 한 통 휴지가 다 닳았다. 들을수록 억울하고 또 억울한 이야기, 딱히 힘이 되지 못함에 가슴만 먹먹하다.
목사골 어느 마을의 이 모 조합장, 그녀의 전남편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명성에 반하는 파렴치한 행동에 우선 놀랬다. 동생들 줄줄이 딸린 가난한 집안의 집 장남, 말 그대로 적수공권(赤手空拳)의 그를 만나 가정을 꾸린 건 40여 년 전이다. 겨우 얻어온 친정의 돈으로 구입한 땅을 발판으로 근검절약하여 일군 재산, 선거만 네 번이었단다. 총 비용만 20억 가까이, 물심양면 아낌없는 투자를 하여 출세를 시킨 아내에게 벌인 그의 행적은 케케묵은 신파 영화의 소재감으로도 식상하다. 새벽마다 정화수 떠놓고 지아비의 앞 길 창창하기 학수고대하며 빌고 빌던 조강지처, 하지만 땡볕 아래 하루 종일 땅만 일굴 줄 아는 무식쟁이 아내가 부끄러워 정치계 유력자에게 일꾼으로 소개했다던가, 권세의 길로 들어서기 무섭게 여색 행각이 이어졌고, 그것도 하필 유부녀들만 건드리는 통에 애간장이 녹아내렸다고 한다.
부처님도 돌아앉는다는 시앗싸움, 그 긴 꼬리 자르기에 지쳐 각서를 쓰기도 몇 번, 제 아무리 쉬쉬 해도 굴뚝 연기처럼 솔솔 새나가는 흉문(凶聞) 때문이었으리라. 나날이 잃어가는 인심에 마침내 낙선의 쓴 잔을 마시는 처지에 이르자 치미는 울화 탓인지 아내의 머리카락을 잡고 구타를 일삼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이혼에 다다르기까지의 여차저차, 그동안의 얽히고 설킨 구차한 사연들은 이만 생략하고. 분쟁의 쟁점이 된 과수원의 배나무 부분만 생생한 육성으로 옮겨 적어본다. (다행히 이혼 전 공동 명의로 해놓은 과수원 땅에 얽힌)
아끼고 사랑하던 과수원에 농약을 살포한 후 나무들에게 헤어져서 미안하지만 곧 다시 돌아오겠다며 다짐하며 갈수록 심해지는 공포 분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또 망가진 몸도 추스를 겸 잠시 떠나기로 했다. 살아오는 동안 마음을 털어놓고 신세 한탄할 대상은 오로지 나무들 뿐, 그동안 시동생들과 시누이들 건사는 물론 두 아이들을 당당히 기를 수 있도록 해 준 고마운 나무들, 남편처럼 배신하는 일 없이 좋은 열매와 풍성한 수확으로 위안해주는 좋은 친구였다. 위자료 한 푼 없이 이혼한 것도 내 몫의 땅에서 튼실히 자라고 있는 나무를 돌보면서 지낸다면 나무들이 나의 노후를 보장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남편에게 공동명의로 된 과수원을 경작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으나 거절당했고 수 십 차례 내 명의로 된 재산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 간곡히 요구도 했지만 돌아온 건 남편의 싸늘한 거부의 반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다. 자신의 재산도 아닌, 내게는 분신과도 같았던 과수원의 배나무들을 남편이 모두 베어버리는 잔혹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너무도 충격을 받아 그날 이후부터 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고 앓아눕고 말았다. 이제 겨우 인생이라면 절정기인 처녀 나이의 나무들,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여도 배나무는 20년 생으로 340주이니 매년 약 5000만원 씩 30여 년은 너끈히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경제수다. 나를 살게 해준 생명의 은인이자 친구 같은 나무들, 내게 있어 과수원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라 나의 생명이다. 하니 나무들을 무참히 도륙한 것은 내 목을 칼로 베어 죽여 버린 것과 같다.
이혼하기 무섭게 17세 연하의 새 아내를 맞이하셨다는 이모 전 조합장님. 평생을 바깥으로만 내돌았으니 과수원의 잡초 한포기 손수 뽑아 본 적 없었다고 했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월급도, 물러나며 받은 퇴직금도 혼자 쓰기에 바빠 과수원 마련에 단 한 푼의 자금도 한 톨의 땀방울을 보텐 적도 없었단다. 하니 과수원에 대한 그 무슨 애착이 있었을까. 넝쿨째 굴러온 호박덩이인 셈이다.
문득 내게 스치는 찔레꽃 사연. 어렵사리 시골집을 짓기에도 역부족인 처지였던 당시의 내겐 단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여력이 없었다. 들에서 어린 찔레나무 한 그루 캐어다가 울타리 곁에 심었다. 15년 성상, 무성히 자란 나무는 해마다 오월을 알리는 전령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가 사라졌다. 옆집 아짐이 입을 삐죽이며 흉보더란다. 무슨 찔레 따위를 집안에 심어놓았냐고. 쓱쓱 싹싹 한참 살 오른 나무등걸에 톱질하던 내 남편은 몰랐으리라. 찔레, 그 하얀 꽃과 알싸한 향기, 붉은 열매가 내게 주던 애틋한 정서를. 그날 내 큰소리가 우리 집 담을 넘었던가. 때마침 골목을 지나시던 이웃 할머니께서 혀를 끌끌 차며 충고하셨다.
“남자는 하늘이여”
최근 조사에 따르면 양성평등지수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최하위 수준에 가깝단다. 아직도 하늘, 땅으로 각인된 남녀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여자들에겐 아직도 요원한 양성평등이다. 바야흐로 우주여행 신청이 접수되는 이 시대 속에서도 굳건히 존재하는 남녀 간의 불합리. 모욕, 핍박, 학대 등등의 끔찍한 단어들. 여자의 안타까운 사연은 급기야 내게 쳇증을 유발하고 만다. 부록인양 첨부한 조합장님의 자필 반성문 각서와 100여명에 이르는 이웃주민들의 서명날인 확인서, 그러면 정말 이게 사실이라고? 세상에 이런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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