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의 추억
인터넷으로 고대의 소왕국 ‘누란’을 치자 맨 윗 항목으로 누란지위(累卵之危)가 떴다. 잘 발달된 관개수로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극심한 가뭄으로 멸망했다는 농경국가다.
명사산(鳴砂山)
저쪽에는 십 년에 한 번
비가 오고
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
김춘수님의 시 ‘누란의 사랑’에 등장하는 모래 우는 언덕의 하얀 양파꽃처럼 지금은 시들어 사라진 실크로드의 고왕국(古王國) 누란(樓蘭).
팔미라도 누란과 마찬가지로 비단길 교역로를 따라가는 과정에서 재조명된 시리아 옛 도시란다. 유적 뒤편에는 갈색의 산줄기가 솟아 있고 봉우리 위에는 아랍의 성채가 바라다 보인다는 글 속 풍정만이 나를 흔드랴. 로마제국의 식민지였지만 팔미라의 전성시대이기도 하였던 3세기 경, 비극의 여왕 제노비아가 등장한다.
클레오파트라보다 더욱 아름다웠다는 오데나투스 2세의 비(妃) 제노비아. 그녀는 감히 대 로마제국을 향해 독립이라는 반기를 들었고 훗날 사가들은 무모한 반란이라 기록하였다. 결국 체포되어 황금쇠사슬에 묶여 압송되었다니. 역사 속 떠도는 전설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영고성쇠(榮枯盛衰)의 나라가 한 둘일까. 나는 여전히 그런 나라들이 남긴 이야기에 끌린다.
엊그제 나박김치를 담그다가, 고추김치를 절이다가 나는 또 실수를 했다. 애써 씻어 물기 빼놓은 양념석화를 깜빡 빼먹고 무우에 버무려 넣지 않았고 고추김치의 필수과정인 바늘구멍 뚫기를 잊은 채 소금물 항아리에 담궈 버린 것이다.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요 근래 건망증과의 싸움이 내 일상이 되었다. 맨 먼저 꽃 이름들이 아리송해지는 증상이 찾아왔다.
브겐베리아, 어성초, 맥문동.... . 입속으로 자꾸 되뇌어 보는 마당의 꽃이름들. 해마다 봄이면 어김없이 피는 많은 풀꽃들을 낱낱이 호명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니 그나마 다행이고, 또 꽃 이름이야 머리맡에 모셔 둔 화훼도감의 도움을 받으면 그만. 하지만 얼굴은 물론이요, 특유의 말투까지 생생한데 그 사람 이름 석 자는 머리 속을 휘저을 뿐 종내 캄캄하다.
이제는 잊어도 좋을 일은 붙잡고 늘어지는 반면 새로운 것은 절대 접수불가한 증상도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년 전의 전신마취 수술 후유증이라고 자위하지만 당혹스럽긴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일상의 오류만 아니다. 퇴락으로 치닫는 사막도시처럼 나날이 낡아 무너져가는 나. 역사란 결국 사람의 이야기라지 않던가. 요즘 나라는 소왕국을 허무는 누군가의 작업이 한 창 진행 중인가 보다. 이런 속도라면 어느 날 내게는 나라는 존재조차 까마득해질지도 모르겠다.
무에 내세울 것 있어 지워지는 걸 두려워하랴. 옛 왕가의 터전을 발굴 복원을 하려는 서양의 고고학자들, 그들의 발걸음을 단호히 막아서며 이곳은 우리 조상님들이 주무시는 숭고한 영역이니 절대로 시끄럽게 파헤집어서도, 행여 발길로 밟는 무례를 저질러서도 안 된다고 했다던 원시부족. 하여 그들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끝내 잡풀로 뒤엉킨 미답지로 남았단다.
작은 유물이나 장식품 무늬에까지도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노력했다는 여왕의 의지가 새겨진 팔미라의 문화재도 날로 격화되어가는 중동전의 전운(戰運)을 피해 안전한 모처로 소개(疏開)시켰고, 그 곳 역시 철저히 비공개란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사막 한가운데 석상으로 전하는 제노비아 여왕은 참으로 우아하다 전하건만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는 큰길에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면 여왕의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소리 같기도 한 사막 특유의 바람 소리가 폐허에 메아리친다는 팔미라. 사라진 왕조의 서글픈 감회가 서린 팔미라를 아놀드 토인비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극찬을 했다는데.
내가 숱하게 꿈꾸던 생의 무모한 반란, 그 부끄러운 시도의 흔적들은 내 머리 속에서 차근차근 소각되고 있다. 하여 수많은 모래 알갱이 속 잠시 존재했다 가멸 없이 사라져 갈 누추하고 왜소하기 작이 없는 작은 소국(小國)인 나. 그 누란은 추억마저 전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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