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자 이가림 시인 선정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자 이가림 시인 선정

시 전문지 ‘시와 시학사’는 제10회 영랑시문학상 본상 수상자에 이가림 인하대학교 문과대 프랑스문화과 명예교수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영랑기념사업회와 ‘시와 시학사’가 공동으로 주관하는 영랑문학제에 시상을 하게 될 영랑시문학상은 지난 해 이성부 시인을 시상한데 이어 올해의 수상자로 이가림 시인이 선정됐다.

이가림시인은 1943년 정읍출신으로 1973년 첫 시집 <빙하기>를 출간한 이후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내 마음의 협궤열차> <바람개비 별>등의 시집을 낸 바 있고, 1993년 제5회 정지용 문학상, 1996년 제6회 편운문학상, 2001년 성균문학상, 2008년 유심(惟心)문학상,펜번역문학상 등을 수상한바 있다. 송하훈 기자

실존적 ‘기투’의 층위와 진폭

- 이가림의 시세계 -

박호영(시인, 문학평론가)

1. 초기시에 나타난 실존적 ‘기투’

나는 이가림 시인이 자신의 시선집 『지금, 언제나 지금』(시월, 2011) 서문에 쓴 글귀 중 “나의 작품들은 지나온 시절 그때 그때마다의 나의 실존적 기투(企投, projet)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는 구절을 주목한다. ‘실존적 기투’, 이것이야말로 그의 시를 한 마디로 정의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기투’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기본 개념 중의 하나로써 현실 속에서 항상 자기 자신을 창조하면서 그 가능성을 전개해 가고자 하는 존재 의식을 말하는 바, 이 ‘기투’는 이가림의 삶에 있어 절대적인 명제였는지 모른다. 초기시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어 왔고, 현실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정립시키는가에 골몰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꿔 말해 그가 현존재의 본질을 캐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다는 얘기와 통한다. 그렇다면 이 ‘기투’는 그의 시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

우선 그의 데뷔작이자, 첫 시집의 제목이 되기도 했던 「빙하기」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이 시의 부제는 ‘장 바티스트 클라망스에게’로 되어 있다. 이 인물은 잘 알다시피 까뮈의 「전락」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시가 「전락」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클라망스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도, 우리는 쉽게 시에 몰입하게 된다. 의미 파악이 그렇게 만만한 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 전체의 분위기에 이끌려 화자의 현실에 동참을 한다. 또한 낡은 예레미야 병원, 생 마르텡의 여름 주막, 드시 찻집은 낯설기보다는 오히려 가보고 싶은 친숙한 공간으로 우리 의식 속에 자리를 잡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 전편에 깔려 있는 이국적 정조에 독자들이 무한한 동경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이국적 정조는 인간의 본능이라 할 수 있는 낭만적 성향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 중에는 이렇게 낭만적인 분위기의 시들이 많다. 그러나 시를 읽어보면 곧 알 수 있겠지만 이 시가 던져주는 색조가 밝은 것은 아니다. 화자의 의식 상태도 고독과 절망과 비애에 가득차 있다. 왜 그러면 시인은 클라망스를 빌어 ‘나’의 절망과 비애를 노래하고 있는 것일까? 클라망스가 한 여인의 불행을 외면하고 지나쳤듯, 시인 역시 시대의 불행에 대해 양심적인 행동을 하지 못한 자책감 때문이 아닐까? 화자는 이 시에서 짙은 밤 한 모퉁이를 아무렇게나 혼자서 떠나보기도 하며, 밤에 마른 갯벌 바닥을 배회하다 게가 되어 돌아오기도 하는데, 그러한 화자의 방황은 곧 시인의 방황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십 대 초반이었던 그는 당시의 현실에서 이처럼 방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므로 그는 이 시를 통해 현실 속의 자아를 어떻게 정립시켜야 하는가를 고민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얘기가 「비용의 노래」나「프루스트의 편지」에도 적용된다. 「비용의 노래」의 화자는 사랑을 잃어버린 자요, 아주머니에 술 한 잔만 더 줄 것을 간청하며 펑펑 쏟아지는 ‘진실하고 무구한 눈송이’를 보고 조금 미처볼까 생각도 하는 자이다. 한 마디로 실연을 당하여 정신적 안정을 찾으려 애쓰는 자이다. 그런가 하면「프루스트의 편지」의 화자는 누님과의 기억을 떠올리며 아름다웠던 과거를 찾아 헤매는, “자살연습으로 그친 피스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자이다. 그는 아름다운 과거의 복원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한다. 두 시의 화자 모두 상실감에 빠져 존재의 참모습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시인이 이렇듯 의식이 분열된 화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존재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에서 연유한다. 왜 내가 이렇게 절망적인 현실에 있는지, 이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시인은 이십대의 젊은이로서 스스로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것이 초기시에 내비친 실존적 ‘기투’의 모습중의 하나이다.

2. 현실을 지켜보는 ‘야경꾼’의 의식

한편으로 그는 진정한 실존을 위해 모순된 현실에 부딪치기도 한다.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정직한 목소리 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사회에 그럭저럭 적응하며 사는 것이 하이데거의 말대로 ‘비본래적인 실존’이라고 하면, 그는 사회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본래적인 실존’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알 수 없는 부자유의 밤 속에서/ 휩쓰는 낫에 베어지는 풀잎들이 있다”(「고부에 머무르며」)고 하면서 ‘부자유의 밤’인 상황에서 지배적 권력에 의해 유린당하는 민중의 현실을 고발하기도 하고, “조정의 뒤뜰에서는 더러운 무소들의 싸움이 있다”고 정권 부패를 비유하며 “푸른 하늘에서 소총에 맞은 기러기”(「반도의 눈물」)가 울어서 이 현실을 지켜줄 것을 바라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태도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이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실존하는 자아였던 것이다. ‘야경꾼’ 연작시는 어두운 현실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작품이다.

몇 번이고 목마름의 벽에 이마를 부딪치며

탐색의 곡괭이로 어둠을 찍어내린다, 참된 사랑의 불을 구하기 위해

왜 나는 이 모든 사물들의 잠을 지켜야 하는가

( 「야경꾼 1」중에서 )

요즘 신문이 지껄이는 거짓말과 거짓말의

비겁함 뒤에서 뜨겁게 우는 땅

나는 엎드린다 하나의 풀잎으로

빈 들녘 어스름 속에서

( 「야경꾼 3」중에서 )

참된 사랑의 불을 구하기 위해 탐색의 곡괭이로 어둠을 찍어내린다든가, 거짓말과 거짓말의 비겁함이 난무하는 속에서 하나의 풀잎으로 뜨겁게 우는 땅에 엎드린다는 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해 저항하는 몸짓이다. 이것은 이 시대의 어둠과 밤을 지키는 ‘야경꾼’이 되겠다는 것이요, 참존재의 나를 찾기 위한 태도이다. 왜 시인은 이 같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일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해 염려를 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내던져진 존재>인 자아에 대한 구원을 위해서이다. 만약 어둠과 거짓의 현실을 외면한다면 그의 실존이란 있을 수 없다. 그야말로 비본래적인 실존만이 있을 뿐이다. 단지 생존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시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다. ‘야경꾼’이 되고자 하는 그의 결심은 오랜 후에도 변하지 않아 2000년에 펴낸 『내 마음의 협궤열차』에서 「야경꾼」연작시를 이어가며 비로소 ‘야경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저는 감히 한 사람의 잠들지 못하는 시대의 밤의 증인, 눈부릅뜬 야경꾼이 되고 싶습니다. 어둠의 세계 저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이의 흐느낌 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밝은 귀를 가진 야경꾼, 삶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버림받은 자의 상처를 감싸줄 수 있는 야경꾼이 되고 싶습니다. 풀잎의 떨림, 돌의 침묵, 강물의 울음 소리, 별들의 합창과 같은 우주적 경이로움의 비밀스런 의미들을 캐내어 전해주는 야경꾼이 되고 싶습니다.

(『내 마음의 협궤열차』‘시인의 말’ 중에서, 시와시학사, 2000, 6면.)

어둠의 세계에 사는 낯선 이의 흐느낌을 듣고 버림 받은 자의 상처를 감싸주는 자, 뿐만 아니라 풀잎이나 돌, 강물, 별 등 주위 사물들의 비밀스런 의미를 캐내어 전해주는 자가 되겠다는 것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서 진정한 삶을 살겠다는 것이다. 그가 ‘세계-내-존재’인 이상 그 세계는 바람직한 참의 세계여야 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은 소외되고 버림 받고 있으며, 사물들과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잘못됨을 타개하겠다는 것이다. 이 역시 ‘실존적 기투’의 태도이다.

그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은 두 번째 시집『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1970년대를 지나오면서 그는 온갖 불의와 부조리를 목격하는데 이를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야경꾼’ 의식이 여기서도 펼쳐지고 있다.

벌거벗은 벌판에 서서

나는 바라본다 캄캄한 밤이 오는 쪽을

오랜 굶주림 속에 버려진 어머니의 나라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으로

나는 모든 것을 바라본다

( 「또 하나의 돌」중 )

사를 읽으면 쉽게 파악되는 사실이지만 이 시에서 시인이 제시한 상황은 아주 암담하고 절망적이다. 화자는 오랜 굶주림 속에 벌거벗은 벌판에 서서 캄캄한 밤이 오는 것을 바라본다. 그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장님’이다. 볼 수 없는 자가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볼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이 현실의 밤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라도 지켜봐야 하기 때문이다. 양심에 따른 행동이다. 그렇지만 무능함만을 확인할 뿐이다. 캄캄한 밤에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결국 화자는 시의 말미에서 “나는 껴안는다. 다만 나 자신의 죽음을”이라고 하며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한다. 이러한 절망적 상황은 시인이 1970년대를 지나오며 겪은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여기서 의아하게 여겨지는 것은 시인이 이 시에서 전혀 돌이란 사물을 등장시키지 않았는데, 이 시의 제목을 ‘또 하나의 돌’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돌에 관심을 가진 것은 신춘문예에 도전해 보려고 마음 먹었던 습작기부터이다. 그는 「문학적 자전」에서 “신춘문예의 열병에 걸려 로댕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돌의 주제를 한 편의 시로 만들기 위해 거의 한 달 가량 무병(巫病)을 앓다시피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돌에 대한 관심이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본느프와의 ‘돌’을 만남으로써 더욱 커지는 것 같다. 본느프와는 그의 시집 『쓰여진 돌』에서 자기 존재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는 돌, 시련을 겪는 돌, 죽어가는 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이 돌의 시련이나 죽음은 사물로서의 그들의 현존성을 확립하도록 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시인의 돌 역시 그 의미의 내포가 이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돌은 시인 자신에 대한 비유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스스로 “제가 좋아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인 이브 본느푸아가 걸어간 길처럼, 저도 어떻게 해서든지 시를 삶의 생성 그 자체와 일치시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과 꿈을 완전한 하나로 융화시켜 보고도 싶습니다.” ( 『내 마음의 협궤열차』‘시인의 말’ , 시와시학사, 2000, 4면.) 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이 현실에 대한 관심은 다음처럼 역사성과 결부되기도 한다.

동풍이 목놓아 소리치는 날

빈 창자를 쓰리게 하는 소주를 마시며

호남선에 매달려 간다 차창 밖 바라보면

달려와 마중하는 누우런 안개

호롱불의 얼굴들은 왜 떠오르지 않는가

언제나 버려져 있는 고향 땅

단 한번 무쇠낫이 빛났을 때에도

모든 목숨들은 언문諺文으로 울었을 뿐이다

논두렁 밭두렁에

장삼이사張三李四의 아우성처럼 내리는 비

캄캄한 들녘 어디선가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 들려온다

하늘에서 직소直訴하듯 치켜든

말없이 젖어 있는 풀들의 머리

(「황토에 내리는 비」전문 )

그가 ‘후기’에서 말하고 있듯 1970년대는 ‘일그러진 시대’이다. 힘없고 가난하지만 마음이 따스한 사람들이 온갖 유린을 당하는 현실, 그것이 그가 체험한 당시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아프디 아픈 포복일망정 몸 전체로 싸워나가야 한다”고 다짐한다. 호롱불의 얼굴들, 장삼이사와 같은 민중들의 아우성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민중 의식은 그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정읍이 동학농민혁명의 발생지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사회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고부로부터 민중 봉기가 일어나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는데, 고부가 바로 정읍의 외곽인 것이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온 그이기에 동학 혁명의 정기가 그도 모르게 몸에 밴 것이다. 그러나 고향은 언제나 버려져 있는 땅이었다. 민중들의 희생에 보람도 없이 정읍의 땅은 예나 지금이나 척박하기만 하다. 그는 군부 독재 하에서 피폐된 현실을 겪으면서 이의 개혁을 위해서는 또 하나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녹두장군의 발짝 소리가 들려온다”는 은근히 그를 바라는 시인의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현실을 염려하고, 현실 속의 ‘나’를 문제 삼는 시인의 태도는 다음 시집에 이르러서는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3. 순간의 인식을 통한 허무와 비애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이후 14년이 지난 1995년에 상재된 『순간의 거울』은 여러 면에서 그의 시세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시집이다. 우선 1995년이라 함은 군부 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가 정착된 지 몇 해 지난 시점이다. 시인의 연치로 따져볼 때에도 그는 이미 지천명을 넘어선 나이에 이르렀다. 그가 과연 『빙하기』나『유리창에 이마를 대고』의 시세계에 머물러 있는 걸까? 그렇지 않다. 나의 참존재를 천착하되 그 속에 사회적 관심을 포함했던 그의 태도가 철저히 자아 중심적으로 변했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고, 다음 시집까지 이어져 9편의 연작시로 쓰여지는 「순간의 거울」은 그 제목 자체가 시사적이다. ‘순간’이란 무엇인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무수한 순간들을 살아왔고, 앞으로 또 무수하게 순간들과 마주할 것이다. ‘바로 지금’에 해당하는 ‘순간’은 현존의 최소 단위이다. 과거도 중요하지 않고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 ‘바로 지금’인 순간이 중요한 것이다. 그 순간에 나를 비치는 것이 ‘순간의 거울’이다. 그러기에 ‘순간의 거울’은 그대로 나의 내비침이다. 과거의 나도 아니고 미래의 나도 아닌, ‘바로 지금’의 나를 본다는 것은 나에 대한 철저한 성찰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숭원은 「순간의 거울」 연작을 두고 “순간의 감각이 불러일으키는 절대의 경지, 절대의 미학을 포착하려 한다”고 하면서, “그의 초기시에 잠복해 있던 미학주의가 변주”된 것(이숭원, 『시 속으로』, 서정시학사, 2011, 67면)이라 지적하기도 했는데, 이것은「순간의 거울」을 정확히 본 것이라 판단한다. 「순간의 거울」연작시 중에서도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순간의 거울 2」이다.

가랑잎 하나가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먼 가람으로 떠난 뒤

서늘한

기러기 울음

후두둑 떨어져

물거울 위를

점자點字인 양 구른다

노을 타는

단풍밭

보랏빛 이내에 묻히고

깊은 하늘의 이마에 걸린

가버린 누이의 눈썹

그 그늘에 이슬들

아롱아롱 맺힌다

가랑잎 하나가

가을의 끝

한 줌 허무를 싣고

먼 어둠으로 떠난 뒤

- 「순간의 거울 2」- 가을 강 전문 -

시의 토운이라든가 시적 분위기가 이전의 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시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으면서 그 속에 유현함을 내포하고 있다. 첫 연만 보더라도 시인은 가랑잎 하나가 떨어져 강물에 흘러감을 “화엄사 한 채를 싣고 떠났다”고 서술하고 있다. 가랑잎 하나의 떨어짐에서 화엄을 본 것이다. 또한 거울처럼 투명하고 잔잔한 가을 강에 “서늘한 기러기 울음이 떨어져서 점자인 것처럼 구른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점자가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 보는 역할을 해 주듯 울음을 수용하는 강의 보시(布施), 나아가 자연의 깨우침을 시사해준다. 이런 서술은 시인이 사물들을 보며 선적 교감과 선적 왕래를 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모든 사물들의 움직임을 근원적을 보고 듣는 것이다.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노을 타는 단풍밭’ ‘가버린 누이의 눈썹’도 늘그막과 죽음을 비유한 것으로 시인이 ‘가을 강’을 보면서 허무와 죽음을 생각한 것이다. 가을 강에 가랑잎 하나가 떨어져 흘러감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면 이러한 감정이 드는 것이 굳이 시인에 국한될 바는 아니지만 여백을 마련한 듯한 행 길이의 짧음과 시어들이 환기하는 분위기, 종지형으로 끝나지 않은 시의 말미가 깊은 여운을 준다. 「순간의 거울」연작시는 다음 시집인『내 마음의 협궤열차』에서도 계속되고 있다.

내가 문득

보조개 이쁜 누이를 바라보듯

꽃 한 송이 바라보니

새하얀 빛깔로

웃는다

가늘게 떠는

그 웃음소리에 놀라

잠 깬 이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름을 묻는다

난 눈길 없는 눈길로

바라보는 돌,

그대들을 바라보면

소리 없는 소리로

웃는 돌

(「순간의 거울 7」-상응 )

‘상응’이란 부제는 시인이 영향을 받고 학문적으로 전공을 하기도 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를 떠올린다. 잘 알다시피 그의 대표 작품이 「상응」(Correspondence)이기 때문이다. 보들레르가 「상응」에서 사물들끼리 주고 받는 그들의 언어와 비의를 노래했듯이 화자는 꽃 한 송이, 잠 깬 이슬들, 돌과 같은 사물들과 그 나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누이를 보듯 꽃 한 송이를 보니 꽃이 새하얀 빛깔로 웃고, 잠 깬 이슬들이 내게 말을 걸어 이름을 묻고, 돌은 소리 없는 소리로 웃는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의 교감을 형성함을 말해준다. 사실 우리들은 사물들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오지만, 그 말들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시해 버렸다. 그로 인해 인간과 사물들 사이에 벽이 생겼다. 시인은 그 벽을 허물고자 새삼 그 사물들의 언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꽃이나 이슬이 어떤 대상인가. 그야말로 순간적인 존재다. 하얗게 웃는 꽃도, 잠깬 이슬도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시인과 이들과의 만남은 허무가 전제가 된 만남이다. 이 허무와 무상함은 「시간의 모래」연작시에서 여실히 보여지고 있다.

아아, 적요하구나

산그늘 빗겨 어둑해진

서늘한 이마 절벽에

흔적 없이 삼켜지고 마는

폭포소리

(「시간의 모래 1」전문 )

마천루보다 더 높은 철근 콘크리트의 숲 그늘

비 내리는 유곽에서

늙은 창녀 하나이 세상 떠났나 보다

이제 죽어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는다는 신호등인가

고즈넉이 걸린 노란 조등弔燈의 불빛

(「시간의 모래 6」전문 )

『내 마음의 협궤열차』에 실린 시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시의 길이가 대부분 짧다는 것인데, 특히 「시간의 모래」연작시들은 모두 5행 단연시로 길이가 짧다. 13편의 연작시를 모두 5행으로 한 것이 시인의 어떤 의도에서 비롯된 것인지 몰라도 ‘시간의 모래’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순간성과 잘 들어맞는다. 시인은 「시간의 모래 1」에서 사방의 적요함을 노래하고 있다. 적요한 상태가 중요한 것은 사방이 내게 말 걸어오는 것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소란한 상태에서 절벽의 폭포 소리를 들었다면 굉장하다고 느꼈을 뿐 그 소리란 것도 흔적 없이 삼켜지고 만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세상사에서 ‘폭포 소리’ 같은 것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모래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질 뿐이다. 「시간의 모래 6」이 제시하는 분위기는 허무와 비애감이다. 이 시의 주인공은 ‘늙은 창녀’다. 이 자체가 비애감을 불러일으킨다. 오죽했으면 창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늙어서까지 창녀 노릇을 했을까. 그녀가 겪은 삶의 고달픔과 한이 이 짧은 시어에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쓸쓸히 조등만이 걸려 있다. 그 불빛은 무엇을 지시하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조등은 여기 계신 분이 돌아가셨다는 표지의 역할을 하지만, 그녀의 죽음으로 내걸린 조등은 더 이상 손님을 받지 않다는 표지가 되는 것은 아닌가. 죽어서도 그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진정으로 행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짧은 시에서 억울하게 삶을 마친 한 여인의 허무와 비애를 만난다.

4. 실존의 대상으로서의 슬픔과 그리움

또 하나 『순간의 거울』이나 『내 마음의 협궤열차』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시인이 우수와 슬픔에 몰입해 있다는 것이다. 이 정서는 비단 이 시집들에서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시집들에서도 보이고 있었던 특성이지만, 이들 시집에서 현저한 경사를 보이고 있다. 시인은 고백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린 사랑과 삶의 우수에 종종 젖게 됨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슬픔에 파다거리며’ 살아온 내가, 나의 미적 실존의 대상인 슬픔을 포기한다면, 그 슬픔이 서러워할 것만 같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 중에서 어쩌자고 나는 슬픔이란 놈을 붙들었는지 모르겠다”고.(『순간의 거울』‘후기’ 중에서) 이를 보면 슬픔은 그에게는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가 이렇게 우수와 슬픔과 사랑의 정서에 빠지게 된 것은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도 깊게 작용한 것 같다. 보들레르를 비롯한 베르레느, 랭보 같은 시인들의 지배적인 정서가 사랑과 우울과 슬픔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지난 여름 내내 앓던 몸살

더 이상 견딜 수 없구나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사랑의 힘

캄캄한 골방 안에

가둘 수 없구나

- 「석류」중에서 -

별빛 초롱한

밤이면

찌르륵찌르륵 울며

네게로 가고 싶다

그렇게 맨몸으로

몰래 다가가서

내가 네 속에 스며들고

네가 내 속에 스며드는

그림자가 되고 싶다

(「찌르레기의 노래 1」중에서 )

시인은 빨갛게 쪼개진 석류 속을 보며 ‘잉걸불 같은 그리움’을 떠올린다. 영혼의 가마솥에 들끓던 그 사랑의 힘을 억제할 수 없어 석류가 스스로 껍질을 부수고 자신의 속을 상대에게 내보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찌르레기의 울음을 듣고도 그 울음이 네게로 가고 싶은 울음이라고 받아들인다. 너에게 몰래 다가서서는 서로 스며들어 항상 붙어 다니는 그림자가 되고 싶다고 한다. 너에게로 갈 수만 있다면 가다가 지옥 바다에 떨어진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고 한다. 그야말로 너를 향한 철저한 그리움이다. 석류와 찌르레기를 이처럼 받아들이는 시인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것은 시인 스스로가 사랑과 그리움의 정서에 빠져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객관적 상관물로서의 석류와 찌르레기는 그가 지닌 사랑과 그리움의 심도를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이 그리움의 정서는 시집『내 마음의 협궤열차』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떠난다

너의 간이역이

끊어진 철교 그 너머

아스라한 은하수 기슭에

있다 할지라도

바람 속에 말달리는 마음

어쩌지 못해

열띤 기적을 울리고

또 울린다

(중략)

오늘도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한 량 가득 그리움 싣고

떠난다

(「내 마음의 협궤열차 1」)

이 시를 보면 화자의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너’를 향해 떠난다. 그러나 목적지를 향해 떠나는 협궤열차는 그곳에 닿지 못한다. 불가능함을 전제로 한 출발이다. “내 철없는 협궤열차”, “너의 간이역이 / 끊어진 철교 그 너머 / 아스라한 은하수 기슭에 / 있다 할지라도”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화자의 태도는 단호하다. 너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무모함도 불사하고, “열띤 기적을 울리고 또 울리면서 한 량 가득 그리움 싣고” 마구 내달리는 것이다. 장경렬은 이 작품에 대해 “파멸에 이를 것을 알면서도 대상을 향한 그리움을 해소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시적 형상화”(장경렬, 「젖어들기에서 뛰어넘기로」, 이가림 『바람개비 별』, 173면)라는 적절한 평가를 내리고 있기도 하다.

5. 관조와 초탈의 삶을 향하여

최근에 나온 시집 『바람개비 별』에서는 더욱 긍정적인 이가림의 실존적 ‘기투’를 발견한다. 그는 모든 욕망을 저버리고 무욕염담적인 태도로 사물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시집 서두를 장식하는「둥그런 잠」부터가 그러한 시이다.

오동꽃 저 혼자 피었다가

오동꽃 저 혼자 지는 마을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버려진 옛집 마당에 서서

새삼스레 바라보는

아득한 조상들의 뒷동산

(「둥그런 잠」중에서 )

이 시의 첫 연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먼저 오동꽃이 저 혼자 피었다가 저 혼자 진다는 것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함인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그러나 이 사실을 깨달은 것은 미루어 보건대 최근의 일이다. 오동꽃뿐만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따지고 보면 저 혼자 왔다 저 혼자 가는 것이다. 생명체가 되면서 주위의 것들과 얽히게 된 것일 뿐 사실은 만물이 제각기 우주에 존재하는 단독자다. 시인도 수명을 다하게 되면 저 혼자 가게 되리라. 이제 그 사실을 깨닫고서 조상들이 묻혀 있는 뒷동산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새삼스레’는 그 전에 바라본 태도와는 다름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상들의 죽음이 남의 일이 아니다. 곧 자신에게 닥칠 일이다. “기침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과 고요는 시인의 응시를 더욱 심오하게 한다. 그 동산을 보며 그가 원하는 것은 지극히 소박하다. 아늑한 골짜기에 파묻혀 뒹굴다가 ‘연한 뽕잎 배불리 먹은 누에’처럼 둥그렇게 몸 구부려 잠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자연 그대로의 삶이다. 아무리 잘 났다고 떠들어대도 거대한 우주 앞에서 한갓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데 어떤 삶을 살겠다고 으스대며 나설 것인가. 시인은 이 삶의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움에 대한 태도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이제

내 비소(砒素)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달빛 인광(燐光) 무수히 떠내려가는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먼 훗날

부질없이 강가를 서성이는 이 있어

이 병을 건져 올릴지라도

그때엔 벌써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

(「투병통신 1」중에서 )

「투병통신 1」의 1, 2연이다. ‘투병통신’이란 병에 사연이 적힌 쪽지를 넣어 강이나 바다에 띄워 누군가에게 사연을 전달하려는 행위이다. 화자는 ‘비소 같은 그리움’을 병에 넣어 강에 던진다. ‘비소 같은 그리움’은 무엇을 말하는가? 비소가 사람을 죽게 할 수 있는 독약이므로 ‘비소 같은 그리움’은 죽을 정도의 지독한 그리움이다. 그리움의 정도가 강할 때 우리는 “죽도록 그립다”라고 하는데 그 경지에 이른 그리움이 바로 ‘비소 같은 그리움’이다. 그렇다면 예전 같으면 반드시 그 병이 그리워하는 이에게 전달되기를 갈구할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강가를 서성이는 이가 있어 병을 건질지라도 글자들은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하여 병에 대한 큰 기대를 갖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초연한 것이다. 이 초연함은 「투병통신 2」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록 지금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해 부를 수 없다 해도, 그대의 눈빛과 웃음소리와 머리칼 향기를 기억하는 한, 그대는 내 안에 생생히 살아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오.

우린 ‘안녕히’란 차디찬 작별의 말을 입으로 말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오.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지만 누구도 틀린 것이 아닌 아르망 페르낭데즈의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 난 기어이 오고야 말 이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한사코 기다릴 것이오.

(「투병통신 2」생 라자르역 광장 )

이 시의 화자는 생 라자르역 광장에서 그대를 만났다. 페르낭데즈의 조각품 ‘모두를 위한 시간’ 앞에서였다. 그리고 다음 주 토요일 정오에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진다. 그러나 그것이 다시는 못보는 작별이 되었다. 서로가 다른 시계를 찬 두 사람은 불가사의한 기적으로 한 번 만났지만 그것으로 끝이고 영영 엇갈린 행로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크고 작은 각양 각색의 시계들, 정지된 시간도 저마다 다른 시계들로 조각된 ‘모두를 위한 시간’은 이들이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예고하는 시인의 의장이다. 이 상황에 처하면 얼마나 안타깝고 실망스러울 것인가. 그러나 시인은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우린 결코 헤어진 것이 아니고, 다시 만나는 이 세상의 기적의 순간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시인이 ‘바람개비 별’을 새삼 주목한 것도 그 별이 “캄캄한 밤에도 오로라밖에 못보게 하고, 스스로 소용돌이를 일으켜” 그에게 희망과 힘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불현듯 『순간의 거울』‘후기’에서 밝힌 시인의 말이 떠올려진다. 그는 “내 삶의 배가 물거품을 일으키고 있는 한 나는 팽팽하게 살아 있는 것이고, 끝내는 희망의 ‘저쪽’에 닿을 수 있을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가 슬픔과 그리움에 젖어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슬픔을 미적 실존의 대상이라고까지 하였지만, 『바람개비 별』에서는 다시 만날 개연성조차 없는 작별을 했으면서도 미래의 만남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기다리는 여유를 펼치고 있다. 이런 시인의 태도는 관조와 초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데에서 기인되며, 우리에게 그의 실존적 ‘기투’의 층위와 진폭이 한층 높고 넓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앞으로 또 어떻게 그의 실존의 모습이 전개될 지 기대하는 바가 크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