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영랑의 계절이다. 5월의 풍성한 햇살이 온누리에 푸르름이 덧칠해질 때면 모란은 화중왕(花中王)의 탐스러운 부귀(富貴)를 뿜어낸다. 영랑의 시혼이 살아 숨쉬는 강진의 영랑생가에는 모란꽃이 만발하고, 이 모란꽃과 때를 맞춰 영랑문학제가 열린다. 전국의 유명 시인들이 이곳에 와서 모란꽃 잔치를 여는 것이다.
여름은 청자의 계절이다. 태양이 작열하고 푸른 파도가 넘실거리는 여름. 이곳 강진은 다도해를 스쳐 지나온 갯바람과 함께 청자축제가 열린다. 고려 도공들의 장인솜씨가 재현되고 우리는 저 고려국을 향해 과거 속으로 치달린다. 흙과 불이 함께 만들어내는 강진고려청자. 청자축제는 대한민국 대표축제로서 이제 세계를 향해 우리의 긍지와 자랑스러움을 알리는 일로 수십만 명의 관광객들이 강진 청자도요지를 향해 달려온다. 송하훈 기자
“영랑과 청자와의 만남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강진이 낳은 영랑과 청자의 전령사 화가 강 운
마흔다섯 전후로 신체에 변화가 시작되면서 지독한 5춘기를 겪었다. 실험 작업하는 동안 마음에 밀물이 밀려들었다가 썰물이 지며 막막한 뻘이 드러났다. 창작하는 者는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세상이 너무 폭력적이라 한숨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보도블럭 틈새에서 피어나는 들꽃처럼 멈칫거리며 나누는 마음들이 귀해서 잠깐 환해지기도 했다.
오랫동안 ‘순수형태’를 표현해왔다. 유화작업에서는 시간, 공간, 빛의 문제를 표현했으며 종이 배접작업은 동양의 靜・中・動을 표현했고, 담채작업에서는 농경수묵민족이 갖는 보편적인 감성과 지향점을 표현하려 했다. 그 표현방법으로써 유화작업은 그리는 작업으로, 반투명 화선지가 무수히 겹쳐지며 구름층을 형성해 가는 ‘바람, 놀다’는 만드는 작업으로 다양하게 표현했다.
김영랑 시인의 마음의 본향은 자연이다. 꽃, 돌담, 나무, 새암, 바람···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인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어느새 강진 구강포에 홀로 서서 강줄기와 바다가 만나는 절경을 그윽이 내려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그러한 과정 중에 강진의 바람과 하늘빛과 물빛은 나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청자축제 참여 차 강진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들른 마량 앞바다의 은은한 물빛을 보고 난 그 비취색의 빛깔이 문득 하늘빛과 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늘빛이 내려앉은 물빛의 유희가 마음을 끌어당긴다.
‘물 위를 긋다’ 작업은 종이 위를 물로 긋는 최소행위만으로 회화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고 하는 지향점을 찾는 작업이다. 도구와 재료와의 대면은 충격을 발생시키고 이 충격은 궁극적으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에게 각기 다른 생동감 넘치는 그 무엇이 된다.
아크릴판 위에 화선지를 올리고 마치 동양화를 그리듯 한 획을 내리치며 긋는다.
맑고 투명한 파란색들이 서로 스며들고 번져나가며 촉촉한 종이 위에 현상(現狀)이 나타난다. 아니,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순수에너지’에 의해 파장이 인다. 여기선 무의식에서 나온 선이 중요하다. 그래서 무엇을 그린다고 의식하지 않고 덧칠하지 않는다. 한 번의 붓질로 화폭에 생명감을 담으려 한다. 그리고 다양한 공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 색채 선택에 신경을 썼다. 색채감정의 경우, 물과 공기는 실제로 파란색은 아니지만 파랑으로 느껴진다. 유리병에 든 공기나 물은 아무 색도 없지만 깊은 바다나 하늘은 파랗게 보인다. 공간이 깊어지면 모든 색이 파랑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모포가 아닌 불 투과성 물질 가령 아크릴 판 위의 화선지에 붓질 작업을 하면 아크릴 판에 스며들지 못한 그 사이의 무수한 기포들이 담채 작업된 화선지에 오롯이 남게 된다. 이러한 기포들이 작품 위에서 물방울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기포로 인해 만들어진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은 에너지의 응축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사이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즉 ‘물과 정신, 공기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배체(倍體)의 예술이다.
일상에서 느껴지는 ‘쓸쓸하고 담백한 것’, 이는 자연계에도 있고 인간의 정신상태 가운데에도 있는 하나의 경계인데 나는 일획이란 현상을 가지고 사상과 감정을 주관적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본래 예술의 품격은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비유를 사용해야만 비로소 그 추상적 개념을 감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즉 눈앞의 사물을 그대로 옮긴 그림들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스스로 그것들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사유에 젖어드는 과정을 담는 것이다.
도공은 혼신의 힘으로 흙을 빚고 유약을 바르고 난 후, 경건한 의식을 갖은 후 불을 지핀다. 엄격한 논리와 계산에 의해서 생산되는 결과물이 아닌, 인간의 혼과 자연의 합일이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내가 없다. 동양미학의 정수는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김영랑 시인의 마음의 본향은 자연이다. 꽃, 돌담, 나무, 새암, 바람……. 이런 단어들로 이루어진 시인의 작품을 감상하노라면 어느새 강진 구강포에 홀로 서서 강줄기와 바다가 만나는 절경을 그윽이 내려 보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시들은 날카롭고 폭력적인 현대 사회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호된 역할을 못 하지만 보편적인 감성의 언어로 속삭이며 또 다른 역할을 수행하곤 한다. 이는 맑음과 지극히 선한 언어의 투명을 지켜감으로써 세상이 포악할수록 더더욱 우리가 돌아갈 근원의 심성을 잃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서정을 자신의 영역으로 지킨다는 것이다. 나는 영랑의 시를 바라보면서 휴머니즘을, 그것도 자연의 순리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휴머니즘을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영랑의 시와 강진의 청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서로 상통한다.
통섭의 개념은 하나 이상의 것이 물리적으로 합쳐지는 통합과 녹아 합쳐진 화학적 융합을 넘어 합쳐진 곳에서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개념이다. 미술 분야도 통합과 융합에서 더 나아가서 통섭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적 발전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끝없이 푸른 하늘과 비취색의 빛을 내뿜는 강진만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서정적인 시와 청자가 나오는 게 어쩌면 필연적인 사건이 아닐까. 나 또한 그것들을 바라보며 자라왔고 그것들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단지 분야만 다를 뿐이지 청자를 만드는 도공들과 김영랑 시와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강진의 자연을 온몸으로 느끼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강진 청자가 탄생되었고 김영랑 시인의 뛰어난 시가 창작되었다. 그리고 나 또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지금의 나의 작품 ‘물 위를 긋다’로 이어진 것이다. 혹시 후세에도 강진의 이러한 절경들을 바라보면서 누군가가 다른 작품을 새롭게 창조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강진에 대한 이러한 생각과 메타포들 속에서 이런 것들을 한꺼번에 집약할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었다. 도공들의 혼과 김영랑 시인의 함축된 시어를 집적하고 빚어서 나의 작품으로 형상화하여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상상. 그게 내가 바라는 통섭의 의미이며 강진을 표현하고 싶은 나의 욕구를 가장 잘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량 앞바다는 하늘도 바다도 결국은 한 몸이라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취색이며 최초로 인식된 나의 색이다. 그 위에 김영랑의 시(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모란이 피기까지는,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등)로 청자를 빚고 기억속의 색과 이미지를 시각화시켰다. ‘내가 태어났던 곳’에 대한 기억 속 이미지, 자연 속에서 ‘언젠가 품었던 경이로운 감정들’이 마치 거울을 보듯 하나의 결정체로 나타나길 바라며… 화가 강 운
강 운 (姜 雲, KANG UN)
■1966 : 강진 출생
■1990 : 전남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졸업
■주요 개인전
2011 물위를 긋다, 롯데화랑, 안양
2010 바람,놀다, 보우갤러리, 울산
구름, 바람, 꽃 그리고 순수, 비컨갤러리, 서울
2006 天의 표정, EBS space, 서울
2005 순수형태-소만(小滿),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 분관, 광주
자연과 사유, 이화익갤러리, 서울
2003 `희망´의 메타포, 이화익갤러리, 서울
2002 생성의 공간, 칸지갤러리, 부산
2001 순수형태, 롯데화랑, 광주
관조와 표현으로서의 하늘, 공산갤러리, 대구
1998 내일의 작가전, 성곡미술관, 서울
1997 텅 빈 공간의 리얼리티···, 신세계갤러리, 광주
하늘天 땅地, 그림시갤러리, 수원
1995 밤으로부터, 그림시갤러리, 수원
하늘과 소나무가 있는 풍경, 캠브리지갤러리, 광주
■주요 그룹전
2011 <쉼,>, 경기도미술관, 안산
강운의 하늘과 박자현의 사람들, 부산시립미술관 금련산 갤러리, 부산
2010 제8회 광주비엔날레 특별기획전 Dessert, 광주시립미술관, 광주
2009 정신의지형-2009한국의단면들, 국립대만미술관, 타이쭝시, 대만
프라하비엔날레4-회화의 확장, 칼린홀, 프라하, 큐레이터 이원일
Blue Dot ASIA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서울
Anti-International, 광주비엔날레, 광주
2008 양평환경미술제-연기(緣起)된구름, 마나스아트센터, 양평
Sungkok Awardees, 성곡미술관, 서울
유어공(遊於空),하늘에서 노닐다, 스카이아트미술관, 서울
2007 상상충전전, 경기도미술관, 안산
2006 Art beyond Life, 포스코 미술관, 서울
역사와 의식 - 독도 진경전, 전북 도립미술관, 완주
2005 침묵의 우아함, 모리미술관, 일본,큐레이터 김선희
2003 진경 - 그 새로운 제안,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002 대한민국 현대미술제, 성산아트홀, 창원
2000 광주비엔날레 人 + 間전, 비엔날레 본전시장, 광주,큐레이터 김홍희
보이지 않는 경계 - 변모하는 아시아미술, 니가타시립센터갤러리,
우츠노미아미술관, 일본, 큐레이터 타니아라타
1999 일상의 신화전, 아트선재미술관, 경주
1998 매체와 평면전, 성곡미술관, 서울
1997 생성의 공간전, 포스코미술관, 서울
■ 수상경력
1999 광주예술문화 신인상, 광주예총, 광주
■ 주요 소 장 처
모리미술관( 일본 동경), 제주현대미술관( 제주시), 광주시립미술관(광주), 경기도미술관 (안산), 서울시립미술관(서울), 포항제철 청암아트홀(포항), 기당미술관(서귀포), ROPPONGI T-CUBE (일본, 동경), 안양베네스트골프장(안양), 제비울미술관(과천), 국립현대미술관(과천), 아트선재센터(서울), 성곡미술관(서울)
■ 주소
(501-080)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564-1번지
C.P : 010-8602-9989
E-mail : kangun1203@hanmail.net
홈페이지 http://da-arts.knaa.or.kr/blog/kangun.do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