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書蟲 日誌
김현임(수필가0
‘열흘이나 묶여 있었던 터라 몸이 근질근질하여 훌쩍 날아가고 싶은 심정..... .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바야흐로 떠날 시간이 닥치고 보니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이 문장에서 내가 덜어낸 낱말은 ‘客館’과 ‘장마’ 그리고 ‘몸이 근질근질하여’ 앞에 붙은 한 무리의 일행을 뜻하는 ‘다들’이다. 이건 전적으로 책을 읽는 나의 자유려니 이왕이면 책 속 여정을 연암 선생과 나, 우리 두 사람의 여행기로 삼아 보자는 외람된 욕심에 가차 없이 빼낸 문구들이다.
가방에 넣고 다니기엔 다소 무리였다. 그런데도 몇 몇 상비하던 화장품까지 포기하며 부피 두껍고 넓은 장정의 ‘열하일기’를 챙겨 넣고 다녔다. 틈틈이 어른이 이끄는 대로 열하, 그 미지의 대륙여행을 떠나보리라. 이른바 讀書尙友의 원대한 계획이다. 유럽 어느 카페촌에는 테이블이 단 하나 뿐인 가게가 있다던가. 그 곳에서 둘만의 특별한 브런치를 즐기는 맛과 흡사하달까. 버스 속, 사람들을 기다리는 자투리 시간, 연암 그 어른은 여전히 반가운 얼굴로 맞아 주신다. 시공을 초월한 만남이다. 책 속에서 해후하는 어른이기에 굳이 번거로운 예를 갖출 필요가 없지만 나는 다소곳하고 정중한 마음다짐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책을 펼친다.
‘말은 자주색 갈기에 흰 정수리, 날씬한 정강이에 높은 발굽, 뾰족한 머리와 짧은 허리에 두 귀가 쫑긋한 품이 만 리를 달릴 듯싶다.’ 이 대목을 읽으면 눈부시게 활기 찬 健馬가 내 앞에 우뚝 서 있고 어느 새 나는 한 마리 書蟲이 된다. 한 줄 한 줄 음미하며 읽는 글귀의 매력, 책이 주는 이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까. 오묘하고 깊은 맛을 지닌 名匠의 과자를 아껴가며 먹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성직자 신분임에도 걸핏하면 책 도적질을 일삼았다는 어느 애장가의 일화처럼 할 수만 있다면 나 또한 책 속 문장을 송두리째 훔치고도 싶다.
아줌마들이 심취한다는, 제 쪽으로 무작위 잡아끄는 거친 성품의 벗 텔레비전과 비할 바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은 직접 보는 정원도, 가장 절묘한 곳을 골라 표현해낸 그림이나 사진 속 정원도 아니었다. 책 속에 묘사된 정원풍경을 읽고 뇌리에 그 정경을 펼쳐보는 찰나, 단숨에 피어나는 형형색색 萬花芳暢한 꽃, 꽃들! 과히 숨이 막히는 절경이지 않는가.
갈수록 인터넷 중독이 심각한 청소년들이라고 한다. 독서 시장은 침체국면을 넘어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아우성이고. 이런 세태를 염려한 어느 신문사가 북스타트 운동을 표방하며 출발한 ‘책꾸러기’ 캠페인이었다. 만 6세 이하 어린이를 키우는 가정에 매달 한 권씩 1년 동안 총 열 두 권의 책을 무료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이다. 1만 5000 가정이 수혜자요, 총 11만 4000권이 넘는 책이 배달되었다는 그 뜻 깊은 운동의 협찬 기업의 오너가 내 고향 강진 출신이라는 데 우선 반가웠다.
여러 명 같이 먹으면 쓴 음식도 단 것처럼 여럿이어서 더 달콤한 건
책도 마찬가지란다. 다섯 아이들을 키우는 수혜가정의 체험기에 따르면 굳이 따로 독서교육을 할 필요가 없더란다.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가 제 논에 물들어가는 소리와 자식 입에서 나는 음식 씹는 소리라 했다. ‘창가에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 곱다하나 내 집 아이 낭랑히 글 읽는 소리만은 못하다’는 글귀를 어디서 읽었던가. 옹기종기 둘러 앉아 머리 맞대고 책 읽는 아이들을 보는 흐믓함에 미소가 귀에 걸렸을 아버지다. 그 집 4학년 자리 아들은 자신이 읽는 삼국지까지 넘보더라니 내겐 이런 책애벌레의 출현도 반갑고 반갑다.
오늘도 나는 나를 옭아매는 이 지리멸렬하고 번잡한 일상에서 살짝 비껴나기 위해, 기꺼이 책갈피 속에 숨어드는 서충이 된다. 이윽고 만나는 낯 선 낱말이 口妾, 열하의 폭염과 변덕 심한 날씨에 지친 여행객들이 객기를 달래는 한 방법이라고 한다. 오다가다 나그네 길에서 마주 친 여인들을 입으로만 잠시 취해 보는 것, 그도 엄격한 룰이 있어 한 사람이 먼저 선택하면 비록 상대도 눈치 못 채는, 말로만 은근슬쩍 취하는 짧은 순간의 인연에 불과하지만 다른 사람은 절대로 범접해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단다. 어디 그 뿐인가. ‘애초 계획을 가지고 열 두 行窩를 지은 건 아니다’라는 문장도 만난다. 행와는 요즘 말로치자면 별장이다. 어느 이를 너무도 흠모하여 그가 좋아하는 식으로 집을 지어놓고 그가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다녀가 주기를 학수고대한다는 뜻이라니, 인생의 참 벗을 기리는 예우의 극치다.
나도 이윽고 옛 사람이 될 터, 남발한 내 글 중 다만 한 조각이라도 남아 훗사람의 시공 뛰어 넘는 情人이 될 수 있을까. 책이파리 뒷 그늘의 졸음 끝 나비를 향한 허황한 꿈도 감히 꾸어보고. 비록 직접 대면해 만날 수 없지만 머리맡에 두고 영원히 만나 보는 아름다운 인연이 책 속 저자와의 만남이려니 습관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라 했다. 혹자는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감동의 여파로 한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겠노라 선언했던가. 연암 선생의 열하일기의 상권을 끝낸 내 독후감으로 마땅한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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