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길목에서
나의 행복론
김현임(수필가)
그날 저녁 나는 기어이 울고 말았다. 언제였던가. 이 십 여 년 전, 그때도 나는 눈물이 나왔다. 걷잡을 수 없이 밀려오는 행복에 겨운 눈물이었다. 문학이라는 두렵고 황홀한 문, 그 문 앞에서 쭈뼛거리기 몇 년이었던가. 드디어 내게도 그 기회가 왔다는 사실만으로 벅찼다. 베껴 적어야할 칠판의 백호 선생의 한시 구절이 내 눈물에 어룽거려 보이지 않았다.
최근 시인 J여사로부터 향리에서 하는 시모임에 합류의 권을 받았다. 애초 시 공부보다는 J라는 좋은 사람과 만남이 우선 끌렸다. 그런데 열 명 남짓한 회원들이 발표하는 시를 듣는 순간 내게서 쏟아지던 눈물, 그것은 시와의 오랜 해후를 기꺼워하는 내 가슴의 뜨거운 반응이었다.
스물 일곱, 초파일 다음, 다음날, 그러니까 음력 4월 10일은 아까운 나이에 교통사고로 죽은 조카의 기일이어서 항상 목이 아팠다. 그 느낌을 쓴 ‘인후염’이 회원이 되어 발표한 나의 첫 시가 되었다.
인후염
연등
꽃으로
피어나는
4월 초파일 무렵
이제는
차마 발설해서는 안 되어
목울대로 삼키던 이름
한 둘이던가
이 대목
이 대목에서
항상 도지던
인후염
뻐꾸기
제 박자 놓쳐
잠시 허둥대는
5월 정수리
그 줄기 위에
얹으면
화르륵 꽃으로 피어나
차오르는 숨결
간신히 다독이며
무심히 흘러가던 일상
일순 휘청이며
훅 끼치는
열기
나의 이 첫 시는 平點, 선배 시인님들께서 신참이 써온 게 어디냐 많이 봐주셨다. 자작의 부끄러운 졸시까지 동원하며 이런 너스레를 떨고 있는 연유가 있다. 시공부로 하여 지금 내가 참으로 행복하다는 걸 밝히고 싶어서다. 생의 활력소인 아드레날린이 활발히 분비되기 위해선 때때로 스트레스라는 방해 요인이 작용해야 한다던가. 도전은 번번이 절망의 구렁텅이로 우리를 빠트리지만 간신히, 간신히 그 수렁을 빠져나왔을 때의 희열감을 생각해 보라. 무언가 목적을 갖고 추구하는 삶이야말로 행복의 첩경, 그 삶에는 불행의 시초인 권태의 이끼가 서식할 틈이 없다.
딸의 덕담 모음집일까. 때론 시가, 때론 경구가, 말미엔 심심찮게 자조적인 제 푸념도 적혀있는, 묵은 책장을 정리하다 만난 단정한 딸의 글씨를 가슴 시려하며 읽었다. 나아갈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제 처지가 얼마나 답답했을까. 결코 행복하달 수 없던 시절에 적은 딸의 비망록이다. 그 맨 첫 장이 無爲堂 장일순 선생의 ‘나락 한 알 속의 우주’에서 발췌한 구절이다. ‘山不利 水不利 在利挽弓之間’ ‘산도, 물도 이롭지 않다. 이로운 것은 화살을 이렇게 힘껏 당기고 있는 그 사이에 있다.’는 뜻으로 읽히는 그 구절은 어떤 게 진정한 삶인지 묻고 또 물었을 스무 살, 생의 갈피에서 서성이던 내 딸에게 좋은 나침반이 되어 주었으리라.
또 엊저녁 식사 자리다. 옛 벗, 남달리 영민했던 당신의 오랜 친구의 근황을 전하는 어르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친구가 치매라네”
세상에 제 생각을 널리 널리, 아니 한 사람의 상대에게 펼쳐나갈 수 있는 복록은 얼마나한 부피의 행복인지!
우리의 행, 불행을 관장하는 기관은 뇌다. 희열의 추구망으로서, 행복의 채집처로서 뇌의 善技能이 활발할 때, 그의 사람의 기력도, 삶의 질도 충만할 터다. 책 속에 소개된 18세기에서 19세기 무렵 독일에서 사용되었다는 두개골 수술도구를 보는 내 감회가 남다르다. 두개골 수술은 인체의 가장 중요한 부위를 대상하는 수술인지라 그 작업의 어려움으로 역사가 짧을 거라 짐작되지만 수술 자국이 선명한 고대의 두개골들이 세계 각지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기록에는 거의 없지만 중국, 잉카, 마야, 이집트 지역에서는 이미 두개골 수술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학자들은 믿는다. 반달형의 톱, 천공기 등 총 넉 점으로 구성된 두개골 수술 도구들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다.
나는 그 작다는 것에 마음의 방점을 찍으며 읽는다. 우리 몸의 최고 요충지, 사령부는 거대하지 않다와 더불어 행복도 그다지 거창하지 않다로 받아들인다. 선인들 당부하길 ‘복이 있을 때 마구 누리지 말라.’했다. 이솝우화 속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은 본디 기운이 세지 않단다. 반면 불행은 몸짓도 크고 힘도 세어서 행복은 매양 불행에게 쫓겨 다닌다던가. 신을 찾아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 행복에게 신은 이른다. 너희들은 한꺼번에 몰려다니지 말고 따로 행동하다가 너희가 꼭 필요한 사람을 발견하거든 그에게 순식간에 달려가 안기도록 하여라. 뒤늦게 나를 찾아 온 행복,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상대에게 그 말을 전할 수 있고, 서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작지만 큰 행복이 내겐 너무도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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