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길목에서/
그 남자의 추억
이윤(현 광주지방경찰청 경무과장/전 강진경찰서장)
<마지막 잎 새>를 쓴 미국의 작가 오 헨리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 몇 년을 살았느냐가 아니라, 이 세상에서 얼마만큼 가치 있는 일을 하느냐” 라고 말했다. 나는 오 헨리의 말을 이렇게 바꾸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사람은 살아온 시간만큼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만큼 사는 것.”이라고 말이다. 생각해보면 엊그제 한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20년 30년 전에 있었던 일들은 바로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추억을 되새기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진정으로 가치 있다고 내세울 만한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러니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이벤트를 만들어보자고 말하고 싶다.
이벤트하면 뭐 대단하고 거창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 이벤트를 만들어보자. 매일 만나는 사람, 부딪히는 일들에서 단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보면 어떨까? 평소 자주 담소를 나누는 이웃과 함께 나눈 대화에서 ‘오늘의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으로 추억을 저축해보자. 잠깐의 눈인사를 나눌 때도 표정에 의미를 부여하자. 그날만은 서로의 가슴에 최고의 얼굴표정이 각인될 수 있는 대화를 나누자. 그렇다면 하루 내내 웃는 날이 될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것에서 변화를 시도하고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추억은 풍성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추억이라면 추억이라고 할 수 있는 강진에 대한 추억을 떠올려보고자 한다. 내가 경찰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독일유학에 대한 꿈을 접어야 하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 시작되었다. 3살과 1살짜리 아들을 둔 가장으로서의 부담을 벗어버리지 못해 운명적 아니 필연일지도 모를 경찰의 길에 발을 딛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가장 암울한 시기에 발을 들여 놓았던 길이 지금 이 자리가 되었다. 20년 가까이를 중앙경찰학교에서 신임 순경들과 전.의경 교육을 담당하였다. 그래도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를 말하자면 나는 중앙경찰학교 개교 이래 경위, 경감, 경정을 거쳐 경찰서장급인 총경까지 3계급을 승진한 유일한 기록을 세운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모선배의 말마따나 ‘팔자기 핀’ 채로 강진경찰서장으로 부임하였었다. 그러나 강진경찰서장으로 부임한 며칠 후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한 가지의 질문을 받고 한동안 넋을 잃었다. 협력단체의 한 가정주부의 질문 때문이었다. “기억할 수 있는 만큼의 삶을 살았습니까?” 그 질문이 나의 삶을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게 만들었다.
‘그래, 기억할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자,’라고 다짐하며 시작한 것이 지구대를 돌며 일선 경찰관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이었다. 또한, 4월과 5월 체육대회를 통해서 직원들과 친밀감을 나누었다. 경찰서 협력단체와의 화합을 도모하여 정신지체 장애우와 함께 강진문화 답사도 해보았다. 이때 장애우와의 강진투어를 마치고 버스에서 내린 장애우들과 보호자와 인사를 나눌 때 다가왔던 한 분의 아주머니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아주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었다. “그동안 병신 아들이라 떳떳하게 고향 구경 한 번 마음 놓고 시켜주지 못했는데 서장님께서 이런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눈물을 글썽이던 아주머니의 모습은 내 인생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림인 것이다. 또한 불우 어린이들의 공부방인 방과 후 어린이들을 경찰서에 초청하여 서장실에서 장미꽃 한 송이씩 쥐어주며 손을 잡아주었던 일, 장미꽃 한 송이는 어린 아이들 가슴에 백송이 천 송이 꽃이 되어 나와 함께 영원히 지지 않는 억만 송이 꽃이 될 것이다. 수능시험이 끝난 후 탈선의 우려가 있는 고교생들에게 논술경시대회를 통해서 통합적인 사고와 강진의 푸른 녹차 밭을 구경시켜주었다. 그렇게 하다보니 주변의 소외된 곳에 자꾸만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어쩌면 가장 소홀히 대할 수 있었던 전·의경들과 함께 강진문화답사를 한 일이다. 전·의경 출신 분들의 모임인 인우회와 강진경찰서 20여명의 전·의경들과 함께 했던 강진문화답사에는 직접 문화해설을 맡기도 하였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직원들과 나누었던 추억을 간직하고 싶어 연말에는 사진전시회를 통해서 지나온 1년을 회상해보기도 하였다. 많은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강진에서 늘 바라보았던 청자 빛 바다와 푸르름이 가득한 녹차밭은 내 마음속의 휴식처가 되었다.
이렇듯 주민들에게 다가가 느껴보았던 강진생활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멀리서만 바라보고 경계하던 사람들이 경찰서에 친밀감을 느끼고 오히려 스스로 법을 준수하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김춘수님의 시 ‘꽃’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지금 옆 사람과 다정한 눈빛을 나누자. 잊혀지지 않는 눈짓으로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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