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소설 (7)
붉은 강물에 내 마음 씻으리(4)
“어찌 이백과 도연명만 자연을 찬미했겠느냐. 우리나라 조선에서도 안건과 같은 화가는 <몽유도원도>에서 복숭아꽃 핀 꿈같은 세상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들었느니라.”
스승 다산은 밤새도록 재목을 <제황상유인첩>이라 짓고 한 군의 책을 만들어 다음 날 황상에게 내밀었다.
“읽어 보거라.”
“네, 스승님.”
황상은 떨리는 마음으로 한 줄 한 줄 읽어내려 갔다.
<주역>에 이괘가 무망(无妄)으로 변하는 효사(爻詞)에 “유인(幽人)이라야 곧고도 길하다”고 했다. 내가 이를 풀이해 보았더니, “간산(看山) 아래 진림(震林) 사이에서 공손하고 유순히 손(巽)으로써 은둔(隱遯)하여 천명(天命)을 우러러 순응한다. 혹 간산에 과실을 심고, 진림에 채소 씨를 뿌려, 대도(大道)를 밟고서 탄탄히 걷고 천작(天爵:존경받을만한 덕행)을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높고 큰 덕이 있는 석인(碩人)의 너그러움이니, 유인의 일이 길하지 아니한가? 돌아보건대 하늘은 청아하고 한가한 청복(淸福)을 몹시 아낀다. 왕후장상의 존귀함과 도주(陶朱, 월나라의 범려의 별명), 의돈(猗頓, 춘추시대 노나라의 대부호)의 부유함은 거름흙처럼 흩어져버렸어도, 이괘 구이의 길함을 누렸다는 말은 세상에서 들어본 적이 없다. 옛사람 중에 <장취원기 將就園記>란 글을 남긴 사람이 있다. 장차 나아가겠다는 것은 아직 나아가지 못한 것임에 틀림없다” 탐진의 황상이 내개 그 조목을 물어오므로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땅을 고를 때에는 모름지기 아름다운 산(山)과 수(水)를 골라야 한다. 그러나 강(江)을 낀 산은 시냇물을 낀 산만도 못하다. 마을 입구에는 준벽측석(峻壁側石:높은 암벽)이 있어야 하고 조금 더 들어가면 시야가 시원하게 트인 곳이라야 비로소 복지(福地)라 할 수 있다. 그 중앙의 국세(局勢)가 맺힌 곳에 나침반으로 방향을 정남향(正南向)으로 해서 3간(三間)의 초가집을 짓는다.
정교히 집을 지은 다음 순창에서 생산되는 설화지(雪花紙)로 도배를 하고, 문미(門楣)에는 담묵으로 그린 산수화를 붙인다. 문 옆에는 고목(槁木) 또는 죽석(竹石)을 그리거나 혹은 시를 써놓는다. 방 안에는 서가(書架) 두 틀을 놓고 1천 3~4백 권의 책을 꽂되, 주역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을 모은 주역집해(周易集解)와 시경을 해석한 모시소(毛詩疏)와 예기·주례·의례의 삼례원위(三禮源委)와 고서명화(古書名畵)와 산경지지(山經地志), 그리고 성력(星曆)의 법(法), 의약(醫藥)의 전(銓), 진법과 군사훈련인 진련(陳鍊)의 제(制), 군자(軍資)의 식(式), 초목금어계보(草木禽魚系譜)와 농정수리학설(農政水利學說), 바둑 두는 법의 기보(棋譜)와 거문고 악보가 적힌 금보(琴譜)에 이르기까지 두루 갖추어 놓는다.
책상 위에는 <논어> 한 권을 펴놓고, 그 곁에는 화리목(花梨木)으로 만든 탁자를 둔다. 그리고 도연명(陶淵明)과 사령운(謝靈運), 또 소식(蘇軾)과 육유(陸游)의 시를 둔다. 중국의 악부(樂府)와 열조시집(列朝詩集) 등도 서너 질 놓아둔다. 책상 밑에는 오동(烏銅)으로 만든 향로를 두어 아침과 저녁으로 옥유향(玉蕤香) 하나씩을 피운다.
뜰 앞에는 두세 자 높이로 올린 담을 한 줄 세우되 올린 담 안으로는 갖가지 화분을 놓는다. 석류와 치자, 그리고 만타 등의 품격을 갖춘 화분이다. 각각 품격을 갖추었지만 국화가 가장 갖추어져야 하고 할 수만 있으면 명색이 마흔여덟 가지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뜰의 오른쪽에는 조그마한 못을 파되 사방 수십 보 크기로 파고, 그 못에는 연꽃 수 십방을 심고 붕어를 기른다. 별도로 근죽(䈽竹)을 쪼개어 수통을 만든 다음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못을 채운다. 넘치는 물은 담장의 틈 사이를 통해 남새밭으로 흐르게 한다.
남새밭을 가꿈에 있어서는 먼저 물이 고이는 것처럼 평평하게 다듬고, 밭두둑은 직사각형으로 나누어서 배추와 무, 파와 마늘 등을 심되 서로 뒤섞이지 않게 해야 한다. 씨앗을 뿌린 곳에는 고무래를 써서 곱게 다듬어야 하는데, 비로소 새싹이 나올 때 마치 반주문(斑紬文:베의 문양)처럼 되어야 남새밭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오이도 심고 고구마도 심는다. 남새밭 주변에는 해당화 천 주를 심어 울타리를 삼는다. 이러한 남새밭을 늦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둘러보되 매운 향기가 코를 찌르게 해야 한다.
뜰의 왼쪽에는 두 개의 기둥을 세워 사립문을 세우되 백죽(白竹)으로 한다. 사립문 밖으로는 50여 보 산기슭을 올라가 바위틈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그 곁에 초가지붕의 집을 짓는다. 그 주변에는 숲이 우거지게 하고 큰 대나무가 자라게 하되 그 곁가지가 처마로 들어와도 꺾지 않고 그대로 놔둔다. 시내를 따라 백여 보 쯤 걸어가서 농사지을 비옥한 토지 여러 마지기를 마련한다. 그리고 늦은 봄이 오면 지팡이를 이끌고 전답가로 가서 어린모가 자라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 푸른빛이 사람까지 물들여 한 점 티끌의 기운도 없게 만든다. 그렇다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된다.
또 시내를 따라 두세 궁(二三弓) 되는 가리에 큰 방죽을 마련하되 둘레가 5~6리 쯤 되게 하고, 그 안에는 부거(芙蕖)와 능검(菱芡)이 가득 차게 한다. 그 방죽에는 작은 쪽배를 하나 만들어 물 위에 띄워놓고 달뜨는 밤이면 시호(詩豪)와 묵객(墨客)들을 데리고 가는데, 배 타고 퉁소를 불거나 소금(小琴)을 타며 서너 바퀴 돈 다음 술에 취해 돌아온다.
방죽에서 가까운 곳에는 조그마한 절이 있고, 다행히도 그 곳에는 명승(名僧)이 한 사람 있어 참선과 불법을 잘 가르치고 있다. 시를 즐기고 술을 즐기면서도 계율에 얽매이지 않으니 어쩌다 그와 왕래하며 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못 잡는 일 없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지낸다면 이 또한 기쁜 일이다.
집 뒤에는 기품 있는 소나무 서너 그루가 있으니 용과 범이 휘감고 움켜쥐는 모양새이고, 소나무 아래엔 백학 한 쌍이 서 있다. 소나무에서 동쪽에는 작은 남새밭을 만들어 인삼, 도라지, 천궁과 당귀를 심고, 소나무 북쪽에는 작은 사립문을 두어 그곳에 가서 잠실(蠶室) 세 칸을 마련한다. 여기에 누에 채반 7층을 설치한다. 항상 오차(午茶)를 마신 후 잠실로 들어갈 때 아내에게 송엽주(松葉酒) 서너 잔을 거르게 한다. 그 술을 마시고나면 누에 기르는 법을 기록한 방서(方書)를 가지고 아내에게 누에씨를 고르는 방법과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방법을 말하며 서로 마주보고 빙긋이 웃는다. 그런 사이 문 밖에서 벼슬 소식을 알리는 징서(徵書)가 왔다고 해도 빙그레 웃기만 할 뿐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이 구이지길(九二之吉)이다”
스승 다산이 가르쳐준 이상향의 세계가 곧 <제황상유인첩>이었다. 황상은 감복한 나머지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다가 꼬박 날을 샜다.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길이 선명하고도 또렷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벅찬 감동이었다. 황상은 두 볼에서는 이윽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스승 다산이 일러준 대로 살 것임을 자신과 하늘과 땅과 천지만물과 고금의 성현에게 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땅을 고름에 있어 산수(山水)가 뛰어나야 하고, 그렇다고 언제 홍수가 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강을 낀 곳이 아닌 시냇물이 흐르는 곳. 거기에 바위가 주변에 버티고 있는 정남향의 집은, 그러나 방 안에 앉아있으면 앞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 곧 첫째 덕목이라고 생각하니 신비로운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느낌이었다.
일러 이를 복지라고 일컫고 있는데, 복지란 단순히 주변 환경을 통해 길흉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흐름인 기(氣)의 순환과 기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땅을 말함이었다. 마을 앞 암벽을 언급한 것은 산은 용(龍)이고 암벽은 호랑이의 머리를 상징하고 있으므로 풍수의 진수까지 언급한 대목이 아닐 수 없었다.
황상은 청복(淸福)이란 말에도 몇 번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가장 심장에 박동을 일으켰던 그 말 한 마디, 청복! 하늘이 몹시 아낀다는 청복은 그래서 아무나 얻기가 힘들다는 고귀한 것이었다. 위로는 임금과 정승과 장군 등 고관대작이 귀하다고는 하지만 세상에 흔해빠질 만큼 널려 있다는 것이고, 깊은 산 속에서 거문고와 책과 바둑판과 백학 한 쌍과 약초가 있되 말동무로는 산승이 있고, 굶어죽지 않을 만큼 농사와 누에를 기르니 바로 이것이 청복이라고 말함이었다.
스승 다산은 <제황상유인첩>을 건네주고 나서,
“황상아! 이제 너는 청복이 무엇인지 알겠구나. 그렇다면 열복(熱福)이란 무엇인지 아느냐?”
황상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산이 말을 이었다.
“황상아! 생자필멸(生者必滅)이지만 사람은 누구나 사는 것을 좋아하고 죽기는 싫어한다. 왜 그러겠느냐? 장수를 해야만 세상 복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천하를 호령하고 한편으로는 젊은 여자와 가무를 즐기곤 한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높은 가마를 타고 자비를 놓으며 위세를 떨친다. 의관을 정제한 후 대궐로 들어가 세상을 지배할 계책을 논하는 것이 열복이다.
그러나 그 열복은 십 년을 넘기지 못하니 권불십년(權不十年)이 아니겠느냐? 안 되는 일이 없는 것이 권력이지만 그 말로는 비참하고 한없이 초라하다. 허망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똑 같은 보이지만 청복은 하늘이 몹시 아껴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없으니 그 수가 많지를 않는다.“
“스승님.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청복의 삶을 살아갈랍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참으로 고맙구나. 장하다. 너는 정녕 내 깊은 뜻을 알고 있구나. 백년 미만의 몸뚱이를 가지고 어떻게 허망한 열복을 바라겠느냐?”
“네. 명심해서 반드시 따를 것이구만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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