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8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나니(1)
황상은 스승 다산이 건네준 <제황상유인첩>의 내용을 떠올리면서 잠시 옛 추억에 잠겼다가 이윽고 백적산(白磧山)을 바라보았다. 정수사의 남쪽에 자리한 백적산은 천개산을 마주보면서 낙타 등처럼 여러 개의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만일 저 백적산이 없었다면 나는 이곳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유인의 삶도 어려웠을지 모를 일이렸다!’
황상은 혼잣말로 낮게 중얼거렸다.
천개산이 정수사의 주산이긴 하지만 내청룡(內靑龍) 격인 백적산이 없다면 당연히 훈정강을 이뤄내지 못했을 것이고, 강이 없으니 들판도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었다. 천개산과 백적산이 하늘의 물을 두 손으로 떠받들듯 고스란히 받아내니 그것이 계곡이 되고 또 강이 되어 이윽고 바다와 합류가 되므로 첩첩산중의 숨통이 된 셈이었다.
외백호(外白虎) 격인 저두산(猪頭山)에 구십동(九十洞)이 있으니 그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 또한 훈정강에 맑은 물을 보태주고 있고, 한 걸음 나아가 여계산이 난공불락의 성(城)처럼 바깥을 지키고 있어 일찍이 도선국사(道詵國師)는 ‘구강포 30리 쯤에 천하명산이 있으니 그 산을 일러 천개산이라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었다. 천개산 말고도 백적산, 저두산, 여계산이 있어 태산준령의 느낌을 주고 있었다.
하늘 아래 땅의 생김새가 그러하니 도선은 이곳에 성적암(聖跡庵)을 지었고, 성적암이 있는 곳을 숙석동(熟石洞)이라 불었다. 다시 묘적사와 쌍계사가 생겨났으나 묘적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 때 화재로 없어지고 쌍계사가 정수사로 그 명칭을 바꾸었으니 절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백적산과 저두산의 낮은 산자락에 500여 년 동안 고려청자를 만들었던 150여 기의 가마터가 있었다. 수많은 무명도공들이 혼을 불태우며 천년비색의 청자를 빚은 곳이 바로 이곳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정수사는 바로 그들의 위안처가 되었을 것이었다. 아니, 오롯한 불심으로 청자를 빚기 위해 그들은 정수사 부처님께 불공을 드리는 기도처였을 것이었다.
사실 황상은 스승 다산으로부터 <제황상유인첩>을 받은 뒤로 강진의 산하를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게 자신만이 아는 비밀을 숨겨둔 것처럼 유인의 삶터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성전의 월출산은 천하명산이고 게다가 남쪽으로는 육산(肉山)이기 때문에 사시사철 계류가 풍부히 흐르는 경포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내가 없으니 마땅치 않았고, 장흥 유치에서 발원한 탐진강 물줄기가 도도히 흘러 탐진바다에 이르지만 강폭이 넓고 범람이 심해 군동 쪽에 터를 잡기에는 역시 마땅치가 않았다. 더군다나 화방산 화방사는 험한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어 늘 가까이하기가 어려웠다. 또 덕룡산 주작산이 명산이라고 하나 그 또한 시내를 가까이해서 기댈만한 산세가 되질 못했고, 백련사 역시 멀리 떨어져 있어 스님들과 가까이 하며 살만한 곳이 못되었다. 병영은 수인산이란 천하 요새의 산이 있고 장흥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으나 그곳은 군사들이 있는 곳이었다. 칠량, 대구, 마량을 둘러보아도 바다가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많으나 산과 시내를 낀 곳은 없었다. 있다고 해도 절이 없었다. 절이 없으면 유유자적하는 도 높은 스님 또한 없는 게 당연한 것이어서 스승 다산이 일러준 <제황산유인첩>의 땅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체 강진 땅 어디에 산수 뛰어난 곳이 있단 말인가.
황상은 스승 다산에게 공부를 하면서도 늘 그 생각뿐이었다. 그 땅을 찾아야만 공부 역시 일취월장할 것만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황상은 우연히 정수사를 찾게 된다. 아마도 가뭄이 몹시 심하던 어느 해 늦봄이었던 것 같다. 옥차재를 넘었을 때였다. 비바람과 번개와 모진 강풍 속에서도 굳건히 서 있는 신목(神木)과 함께 서낭당 아래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눈앞으로 펼쳐진 탐진바다의 풍경이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바다를 향해 주춤주춤 달리다가 슬그머니 멈춰버린 산줄기의 모습 또한 어느 곳보다도 정겨웠다. 그 아래 바닷가 가까이에는 고바우 절벽이 있다는 것을 황상은 알고 있었다. 대구 항동에서 구워낸 청자를 싣고 한양이며 개성까지 다니던 청자배가 바로 그 앞을 지나 강진을 떠나던 바로 그곳은, 그 후 임진왜란 때 염걸 장군이 허수아비를 세워 물리친 곳이기도 했다.
삼년 쯤 전 늦가을 어느 날 마량항엘 다녀오기 위해 가던 길이었다. 그날따라 구름장이 낮게 깔려 있어 우중충한 날씨였다. 그런데 고바우 절벽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하늘의 구름이 걷히면서 태양이 환하게 떠있는가 싶더니 금가루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 온통 바다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눈이 부시는 그 장관은 황상의 뇌리 속에 오래도록 기억되고 있었다. 오른손쪽으로 비라도가 한 개 꼬막처럼 낮게 엎드려 있고, 미산 앞바다의 구불구불한 해안선 저쪽으로 펼쳐지는 푸르딩딩한 바다의 변화에 놀라움과 벅찬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황상은 그 때 일을 생각하면서 옥차재에서 다시 한 번 탐진바다의 아름다운 풍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막상 정수사에 이르면서 백적산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그러잖아도 천개산과 백적산의 웅장한 산세에 움찔 놀라고 있던 참이었다.
정상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사람들이 백적산을 올라가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도 올라가본 적도 없었지만 아직까지 유인의 땅을 마음속으로나마 점지해 둔 곳이 없었던 그는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따라 땀을 뻘뻘 흘려가며 정상엘 올라갔다.
기우제를 지내고자 올라온 사람들이 불을 피우자 연기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 때 강진현감이 엎드려 축문(祝文)을 읽어 내려갔다.
‘천지신명 사해용왕 백적산 산신령 탐진해 용왕’을 부르며 기우제를 지내는 현감이 모습에 백적산이 예사로운 산이 아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진읍을 감싸고 있는 우두봉을 놔두고 하필이면 먼 이 곳까지 와서 기우제를 지내다니 뭔가 백적산의 비밀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과연 백적산 허리에 백적(白磧)이 있었는데, 나이 먹은 잉어의 늙은 모습이었다. 그 아래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땅 속에서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마치 산이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산을 떠받드는 거대한 산사나이의 울음 같기도 해서 황상은 또 한 번 놀라움을 금할 길 없었다.
뿐인가.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산과 크고 작은 섬들······. 산 아래에 있으면 첩첩산중이요, 산 위에 있으면 망망대해가 펼쳐지는 곳이었다.
바로 이 땅이다. 이 땅이야말로 하늘이 점지한 유인의 땅이 아닌가.
황상은 마음속으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다. 무엇보다도 스승 다산의 가르침대로 살 수 있는 땅이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나중 황상은 백적산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제목은 리적(鯉磧)이었다.
잉어 돌무더기가 어느 때부터 있었는가 鯉磧自何時
아마도 아주 오랜 옛날에 應自太古始
잉어비늘 서른여섯이 있었으니 三十六鱗魚
이를 보고 이름을 지었구나 見此名爲鯉
잉어의 몸 갖추지 못했으나 具體無苟且
그것이 사람 사는 마을 보다 낫다 말하네其長可論里
육지에 살아 용이 되지 못하고 居陵未變龍
물에 살지 못해 후회스럽구나 應海不在水
비늘 바위가 차곡차곡 쌓이니 鱗次連루石
다만 몸만 닮은 게 아니구나 不但似之己
생각은 넓은 바다 달리고 生意走滄溟
천둥 바람 힘차게 뻗친다 風雷可興起
이러니 신령스러움이 기이할 밖에 是以多靈異
기도하면 언제나 응답을 해주니 禱輒如諾唯
극심한 가뭄이 들던 해에는 遭歲極亢旱
현감이 와서 기우제 지내네 縣監行雨祀
삼가 경건히 희생하여 재물을 부으니 虔誠注牲幣
홀로 비는 일 마치니 참 아름답구나 星畢澤獨美
제주한라에 비오면 어찌 할까 漢拏霝何如
이는 부끄러움을 드러낸 것에 응답이라 此應媿伯子
의젓해서 쓰러지거나 쩔룩발이가 아니니等級儼偃蹇
모든 산이 함부로 말을 못하는구나 衆山不敢齒
작은 조약돌알이 거듭 포개져서 小礫卵疊碁
하나도 부수거나 무너지게 않으니 一片不崩圮
어찌 이렇게 오묘하고 신기함이 何其妙且神
아주 오랜 세월동안 이어져 왔을꼬 萬古如是耳
옛사람이 책으로 공부하여 이르기를 遊覽古人書
산언덕 잉어를 짐승으로 보지 않는다네 陵鯉如獸止
나도 접때 올라가 이를 탄식 했느니 我昔登於此
물소리가 산을 흔들 만큼 들리고 水聲如山타
파도는 아예 보이지도 않지만 未見廣陵濤
만 마리의 말이 돌무더기 속을 달리고 있네 萬馬走磧裏
땅 속에서 물이 곧게 쏟아져 내리고 있건만 直通地底注
밖에는 계류나 물줄기가 없네 外無磎間汜
괴이하여 그 꼬리를 쫓아가면 넓은 곳에 이르겠으나
疑從尾濶逝
위태롭고 무서워 오래 있기가 어렵다 懍懍難久襬
종유석 물이 입구에 솟구치니 乳水出其口
부스럼 치료에 누구나 좋다 한다 利病徒漏痔
겨드랑 매달리 듯 할 수가 없는 것이 倒縣亦異事
칡넝쿨이 감히 온 몸을 휘감기 때문이네 全體敢葛藟
이럴 때 귀한 날이 되는 것은 是時流金節
몸속은 좁쌀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네體粟思重被
그러나 사는 곳이 외지고 멀어 小處僻而遠
나라까지 눈물을 흘릴 일이네 恨淚東國事
“형님!”
황상은 백적산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무심코 훈정강에 눈길을 던지려니까 징검다리 너머에서 하나 밖에 없는 동생 황경이 불렀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오늘 대덕장엘 좀 다녀오는 길에 찾아뵈려고 왔구만이라. 그간 어떻게 지내셨습디여?”
“나야 어떻게 지내긴······. 동생이 절 알고 있을 게 아니것는가?”
유인의 삶이란 공부하는 일이 아닌가. 책 읽고 사색하는 생활은
뉘 나면 채마밭으로 나가 풀 뽑고, 누에치기 손보다가 방으로 들어와 시를 짓고, 시 짓다가 읊조리고, 읊조리다가 서예하고, 서예하면서 초서를 쉴 새 없이 써보고, 두보의 시를 읽다가 도연명의 시를 읽고, 읽으면서 큰소리로 외워보고, 그러다가 잠이 오면 잠시 오수에 취하고, 잠이 깨면 홀로 밖에 나가서 약초를 캐오고, 캐온 약초를 잘 다듬어 약으로 사용하고, 밤이면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서 차를 마시는 생활. 어쩌면 한 시 반시도 무료하게 보내는 때가 없는 것이 유인의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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