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12)
낡은 집 서까래엔 이끼가 꼈고(1)
황상은 뜻밖에도 정학연의 편지를 받았다. 스승 다산의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강진으로 돌아온 지 서너 달 뒤인 6월 16일이었다. 학연은 아버지 다산의 생신상을 차리고 나서 보낸 모양이었는데, 비록 짧은 편지였지만 구구절절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선군자께서 세상을 하직할 때 발을 싸맨 채 천리 길을 달려와서 아버님을 위해 약을 달이고 상복을 입고 돌아가니 신교(信交)가 아니겠느냐는 말과, 이제 헤어졌으니 어느 해 어느 날이나 얼굴을 뵐 수 있으리오, 하는 내용이었다. 아버님의 장례를 졸지에 치루고 나서 또 생신을 지내고 보니 애통한 슬픔이 크다며 집안이 텅 빈 것 같다는 내용도 있었고, 못난 사람이 여느 때처럼 숨을 쉬고 있으니 어찌 사람이라고 하겠느냐는 자탄의 말도 이어졌다.
더구나 아내의 초상까지 겪고 나니 재앙이 참혹하다 아니할 수 없다는 말과 함께 유인은 정길(貞吉)하다 했으니 다시 해후할 것을 염원한다는 내용이었다.
황상은 편지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러나 황상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사실 황상에게 스승 다산이 없다는 사실은 망망대해를 쪽배 하나로 건너려는 것과도 같을 만큼 힘이 없는 일이었다. 나이 약관에 부친을 여읜 황상에게는 스승 다산만이 유일한 삶의 좌표였고 항해하는 선박의 나침반과도 같았다. 그래서 스승 다산이 해배되어 고향 마현으로 돌아가자 아예 동생에게 전답을 맡겨버리고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백적산으로 숨어버린 것도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하려는 의지에서였다.
황상이 학연에게 답장을 하지 않는 것은 아직 자신이 스승 다산의 가르침을 제대로 완성해내지 못한 부끄러움이 더 컸는지도 몰랐다. 살아생전 스승 다산은 이렇게 말했었다.
“두보와 한유, 소식, 육유 등 사가(四家)의 시는 시학(詩學)의 정궤(正軌)이니 만큼 끊임없이 익히도록 하라.”
황상은 이 네 시인의 시를 전심하여 읽고 또 읽었다. 어찌 네 사람의 시만 읽었겠는가. 때로는 다른 사람의 시도 읽으며 익혔다. 시란 무엇인가? 절제할 때는 절제해야 하고, 여백을 둘 때는 과감히 여백을 두면서 은근히 읽는 이에게 전달하는 언어의 예술이 아닌가. 그러므로 네 시인의 시를 읽고 베끼고 감동받으면서 자신의 가슴 속에서도 그 같은 시심이 일어날 수 있도록 훈련을 거듭했을 때 비로소 한 줄의 시를 지을 수 있을 터였다.
스승 다산은 「이십사 시품」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십사 시품」이란 시의 스물네 가지 풍격(風格)을 시로 표현한 중국의 대표시학서였다. 영웅의 품격인 웅혼(雄渾), 조용하고 깨끗한 충담(沖淡), 곱고 여성적인 정서 섬농(纖穠), 들뜨지 아니하고 차분한 침착(沈着), 세상을 초월한 고고(高古), 법도에 맞아 아담한 전아(典雅), 단련되고 정제하는 세련(洗鍊 ), 굳세고 힘찬 경건(勁健), 표현력이 다양하고 화려한 기려(綺麗), 대자연의 조화를 말하는 자연(自然), 깊은 뜻이 집약된 함축(含蓄), 의기가 강한 호방(豪放), 마음의 진의를 말하는 정신(精神), 치밀하여 빈틈이 없는 진밀(縝密),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거의 소야(疏野), 청결하고 기이한 청기(淸奇), 자세한 사정과 곡절의 위곡(委曲), 진실한 경지의 실경(實境), 슬퍼하고 개탄하는 비개(悲慨), 세밀하고 정확한 묘사의 형용(形容), 평범함을 뛰어넘어 비범함을 꿈꾸는 초예(超詣), 표연히 허공을 나는 표일(飄逸), 도량이 넓고 큰 광달(曠達), 흘러 움직이는 유동(流動)이 「이십사 시품」이었다.
스승 다산은 아들 학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언급을 한 바 있지만 시를 지을 때 「시품」의 금과옥조인 첫 번째 웅혼(雄渾)을 추구하라 일렀는데, 경박한 시나 짓는 일반 시인들의 경향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황상은 이백과 두보의 시를 읽고 베끼며 웅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장자와 사마천의 문장을 읽으면서도 웅혼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가장 웅혼을 느끼게 한 시는 한고조(漢高祖) 유방의 「대풍가(大風歌)」가 아니었던가 싶다.
큰바람 일고 구름은 높게 날아가네
大風起兮雲飛揚
위세를 천하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네
威加海內兮歸故鄕
어찌하면 용맹한 인재를 얻어 사방을 지킬까
安得猛士兮守四方
황상은 웅혼의 품격을 대변하는 이 작품을 읽어보며 유방이야말로 영웅의 포부에 어울리는 시를 짓지 않았나 생각되었다.
「시품」의 두 번째 풍격은 충담(沖淡)이었다. 충(沖은) 비어 있다란 뜻을 갖고 있고, 담(淡)은 담담함의 뜻을 갖고 있으므로 평화롭고 담백한 세계를 말한다. 웅혼과는 상반되는 말로 은자(隱者)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곧 충담이었다. 은자의 삶은 곧 유인(幽人)의 삶과도 같은 말이다. 세속을 벗어나 숨어서 사는 사람이 은자요,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서 조용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 유인이므로 똑 같은 말이다.
1805년 겨울, 정학연과 함께 고성사에서 주역을 공부할 때 유인(幽人)이라는 말을 듣고 황상은 경악할 만큼 감탄을 했었다. 유인이었을 때 곧기도 하지만 길하다는 말. 그래서 고결하고 굳센 절조(節操)를 지키며 사는 삶에 대해 황상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임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시품」본문에도 이와 같이 은자의 삶을 말하고 있다.
소박하게 살면서 침묵을 지키나니
素處以默
오묘한 천기(天機)는 더욱 미묘하네
妙機其微
자연의 큰 기운 들이마시고
飮之太和
외로운 학과 더불어 나네
獨鶴興飛
비유하자면 따사로운 남풍이 불어오니
猶之惠風
옷깃을 살랑살랑 스쳐가는 듯
苒苒在衣
키 큰 대 바람 소리 들리자마자
閱音修篁
아름답게 돌아가자고 말하누나
美曰載歸
우연히 도달하면 어렵지 않을까
遇之匪深
억지로 다가갈수록 더욱 보이지 않네
卽之愈稀
겉모양만 그리는 데만 머무를 때
脫有形似
손에 잡힌 순간 이미 달아나네
握手已違
가난하게 살지언정 아무 말 하지 않고 지내면서 천기의 오묘함을 느끼고, 대자연에 순응하면서 학과 더불어 지내는 은자의 삶은, 곧 유인의 삶으로써 주역에 이미 나와 있는 말이기도 했다.
은자의 삶을 즐겨 노래한 시인은 중국 동진(東晉)의 시인 도연명임을 황상을 잘 알고 있었다. 스승 다산으로부터 유인의 삶이란 무엇인가, 그 답으로 ‘제황상유인첩’을 받았지만 스승의 말대로 중국의 유명한 시들을 읽고 베껴 보니 바로 그 시에도 유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임을 노래하고 있었다.
황상은 도연명의 시를 읽으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더구나 백적산으로 옮겨 살 때 어쩌면 도연명이 노래한 시가 자신의 생활과 어쩌면 딱 들어맞는지 놀랄 정도였다. 도연명이 노래한 시의 내용대로 자신의 삶터를 구한 셈이었다.
마을 가까이 초가 지었지만
結盧在姻境
시끄러운 수레 소리는 들리지 않누나
而無車馬喧
그대는 어찌 그리 살 수 있는가?
問君何能爾
마음 멀어지니 절로 사는 곳이 외지더군
心遠地自偏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 따다가
採菊東籬下
문득 앞산이 눈에 들어오네
悠然見南山
산 풍경은 해질 무렵 더 아름답고
山氣日夕佳
나는 새들이 함께 둥지로 돌아오네
飛鳥相與還
이 속에 진정한 의미가 있었노라고
比間有眞意
말 전해주려다가 그만 두었네
欲辯已忘言
백적산 기슭은 정수사 사하촌처럼 항골마을이 크게 자리하고 있고, 눈 뜨면 논밭에서 일하는 사람, 산에서 나무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으므로 황상이 사는 집은 마을과 가까이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장터가 아닌 산골마을이기 때문에 시끄러운 소리보다는 강물이 흘러가는 소리, 솔바람 소리, 닭울음소리만이 들려오는 곳이었다. 도연명의 시가운데 ‘동쪽 울타리 안에서 국화꽃을 따다가 문득 앞산이 들어오네’란 대목에서 황상이 사는 집 분위기와 똑 같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품의 세 번째 풍격은 섬세하면서도 화사한 상태의 섬농(纖穠)이다. 그러므로 섬농은 여리고 부드러운 감정 표현을 지향한다.
기품이 있고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섬농의 풍격이지만 이는 황상에게 맞질 않았다. 황상 뿐 아니라 섬농에 부합하는 작품을 쓴 시인은 드물었는데, 여성적 취향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반가(班家)의 선비들에게도 쑥스러웠던 일이었다.
또한 황상은 아내로부터 자주 구박을 받곤 했는데, 허구 헌 날 책만 보고 글씨를 써본들 진사(進仕) 벼슬 하나도 못할 일을 왜 하느냐는 거였다. 그러나 어떤 말에도 황상은 대꾸하지 않았고 묵묵히 하는 일만 계속했다. 시를 베끼고 농사를 짓는 일이었다. 그러니 자태가 고운 여인이나 연정 따위의 농후한 감정은 시의 소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시품의 네 번째 풍격은 들뜨지 아니 하고 차분한 침착(沈着)이다. 침착은 단연 두보가 으뜸이었다. 황상은 두보의 시를 읽고 베끼면서 그가 전란을 겪으면서 고통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절절이 느낄 수 있었다.
두보는 「달밤(月夜)」이란 제목으로 처절하고 심난한 마음을 이와 같이 노래했다. 당 현종은 며느리인 양귀비를 탐하게 되고, 결국 자신의 곁에 둔 뒤로 정무를 등한시 한 채 오로지 양귀비와 향연만을 즐겼다. 태종 이세민이 이룩한 당 나라는 태평성대에 버금하는 치세에도 불구하고 양귀비의 등장으로 인해 757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게 되고, 당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에게 자결 명령을 내리게 된다. 며느리이기도 한 양귀비와의 로맨스는 장한가 등의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많은 백성들이 죽고 마는 난세를 만들고 말았는데, 그 때 지은 두보가 지은 시가 다음과 같다.
오늘밤 부주에 뜬 저 달을
今夜鄜州月
규중에서 홀로 보고 있거니
閨中只獨看
불쌍해라 어린 딸애는
遙憐小兒女
장안의 아비 그리운 줄도 모르겠지
未解憶長安
향기로운 안개와 구름은 머리를 적시고
香霧雲鬟濕
청명한 달빛은 백옥 같은 팔뚝을 시리게 하리
淸輝玉臂寒
어찌하여 빈 휘장 안에서
何時倚虛幌
마른 눈물 흔적을 마주보려나
雙照淚痕乾
황상은 두보의 시에서 달밤이란 평범한 제목이면서도 아내 역시 저 달을 볼 것이라며 그리움을 담아냈고, 감정을 나타낸 어휘가 없으면서도 절절한 마음을 담아냈으며 이별 끝에 재회를 바라는 마음 또한 담아낸 이 시야말로 침착의 전형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승 다산은 황상에게 이르기를,
“시를 지음에 있어 ‘침울돈좌(沈鬱頓挫)가 있어야 한다. 이는 시를 짓는 자의 종자(宗旨)이기도 하느니라.”
하고 말문을 연 뒤에 다시 침울돈좌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두보가 지은 3백 편의 시는 모두 충신과 효자, 그리고 열녀와 친구의 진지하고도 중후한 마음이 발현되어 있느니라.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으면 시가 아니니라. 우리가 사는 시대를 아파하고 풍속에 분개하지 않으면 또한 시가 아니며, 찬미하고 풍자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으면 시가 아닌 것이니라. 그에 따른 의지가 확고하지 않고 올바르지 않으면 큰 도리를 듣지 못하고 임금을 성인으로 만들어 백성에게 혜택을 베풀려는 마음이 없는 자는 시를 지을 수 없느니······.”
황상은 스승 다산의 말을 떠올리며 두보의 시를 한 자 한 자 베껴 나갔다. 두보의 시 중에서도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춘망(春望)은 두보가 안녹산 난으로 홀로 장안에서 지낼 때 가족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시였다.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의구하고
國破山河在
성에는 봄이 찾아와 초목이 무성하네
城春草木深
시절을 슬퍼하며 꽃조차 눈물을 뿌리고
感時花濺淚
이별이 한스러워 새까지 놀라네
恨別鳥驚心
봉홧불은 석 달이나 이어져
烽火連三月
집 편지는 일만금이나 나간다네
家書抵萬金
흰머리 자꾸 짧아져
白頭搔更短
참으로 동곳도 꽂지 못하겠구나
渾欲不勝簪
결국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자 당 나라는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인구의 70% 감소될 만큼 엄청난 전란 앞에서 두보 역시 가족과 헤어져 지내면서 그 아픔과 고통을 시로써 달랬던 것이다.
시품의 다섯 번째 풍격은 고고(高古)이다. 세속을 초월한 고상하고 고풍스러운 것이 고고이다. 기인의 삶이요, 현실의 속박을 벗어나 세속적 욕심을 버리고 소박하게 생활하되 고결한 정신을 지켜나가는 것이 고고가 아닌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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