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15)
낡은 집 서까래엔 이끼가 꼈고(4)
스물두 번째의 풍격은 표연히 허공을 나는 표일(飄逸)이다. 성품이나 기상 따위가 뛰어나게 훌륭하다는 뜻의 표일은, 그래서 자유자재로 현실을 뛰어넘어 살아가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선시론(禪詩論)에서는 “시란 선객(禪客)에게 있어서는 선을 장식하는 비단 위의 꽃이요, 선은 시인에게 있어서 언어를 절제하는 절옥도(切玉刀:옥을 자르는 칼)이다”란 말이 있다. 또한 “선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고, 그래야만 진정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불교 교리에 해박했으며 선승(禪僧)처럼 살아가는 황상에게 있어서 선시는 곧 표일에 속하지 않을 수 없다. 불립문자(不立文字)로 시작되는 선(禪)은, 그렇다고 선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극도로 절제된 상태에서 깨달음을 전한다. 그리고 시의 최고 경지인 입신(入神)을 꿈꾼다. 표일이 이백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은 그의 시가 독자들로 하여금 신선에의 기대가 있도록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인데, 인간계를 벗어나 신선세계로의 유도가 곧 표일이다.
황상은 바로 표일의 세계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스물세 번째 풍격은 도량이 넓고 큰 광달(曠達)이다. 광달의 풍격을 보인 작품을 많이 쓴 사람은 단연 스승 다산이었다. 다산은 작품을 씀에 있어서 모름지기 광달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반고반락(半古半樂)의 사바세계는 끊임없이 시비와 탐욕과 명예의 속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만 광달은 그 속박에서 해방됨으로써 초탈의 세계를 꿈꾼다.
스승 다산도 광달의 세계를 향해 달려갔듯이 황상 또한 그러했으니 그의 「대산(對山) 산을 대하며」에서 잘 나타나 있다.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잠자리에 들며
祖孫同寢席
둥그렇게 모여 전혀 외롭지 않네
團聚未全孤
나의 도를 능히 전해 줄만 하니
鉢袋能傳受
늙고 쇠한 것을 어찌 탄식하랴
朽衰鉅歎吘
맑고 새로운 추사의 말씀
淸新秋史語
예스럽고 우아한 것은 다산의 화로일세
古雅杜陵爐
소나무에 달이 창 사이로 번쯤 걸려있나니
松月橫牕半
정신은 차가운 대죽과 같네
精神冷竹徒
황상은 시를 지으면서 손자에게 가르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추사와 다산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산거(山居) 생활을 하면서 황상은 자신이 늙어가고 쇠해가는 것을 조금도 탄식하지 않았던 것은 추사의 해맑고 참신한 말씀과 스승 다산의 예스럽고 우아함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에 달이 반쯤 걸려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세상의 시비와 속박을 벗어나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스물네 번째 풍격은 흘러 움직이는 유동(流動)이다. 천기(天機)가 흘러넘치는 움직임이 자연현상이라면 바로 천기유동(天璣流動)이다. 황상은 천태산을 오르내리면서 천기유동을 느꼈고, 훈정강을 바라보면서 천기유동을 느꼈다.
황상은 이십사 시품을 시를 배울 수 있는 교과서라 여기고 한 줄 한 줄 필사해 나갔다. 시품을 통해 얻은 미학의 정수를 적극 자신의 시 창작에 활용했던 것이다.
황상은 오늘도 방 안에 틀어박혀 두보의 시, 육유의 시를 초서하였다. 초서를 하다가 독서를 하기도 하고 시를 짓기도 했다. 그렇다고 온종일 방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텃밭을 가꾸기도 하고 대밭을 가꾸기도 하고, 약초를 캐기 위해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다. 언젠가 스승 다산이 강진에 계실 때 자신의 집을 찾아오자 아욱국을 끓여 대접했던 것처럼 손님이 오면 아욱국을 끓여 대접하기도 했다.
스승 다산은 제자인 이학래(李鶴來) 집에서 지내다가 도암면 귤동 마을 윤씨의 서재를 찾아갔을 때 마땅한 장소라고 생각하였는데, 뜻한 바대로 그곳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곳에서 스승 다산은 다산4경이라고 일컫는 다조(茶竈), 약천(藥泉), 정석(丁石), 연지(蓮池)를 만들었는데, 다조는 차를 끓일 부뚜막을 말하고 약천은 바위틈에서 흘러나오는 약수를 말하며, 정석은 바위에 새겨놓은 글씨를 말하고, 연지는 연꽃이 심어진 연못을 일컬었다.
스승 다산은 또한 다산8경을 지었으니 담장에 매달린 복숭아를 일컫는 불장소도(拂墻小桃), 바람에 날리는 버들 솜을 일컫는 환렴비서(換簾飛絮), 봄날에 꿩 우는 소리를 일컫는 난일문치(暖日聞雉), 가랑비에 물고기 먹이주기를 일컫는 세우사어(細雨飼魚), 단풍잎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바위를 일컫는 풍전금석(楓纏錦石), 국화꽃이 핀 연못을 일컫는 국조방지(菊照芳池), 기슭의 대나무 숲을 일컫는 일오죽취(一塢竹翠), 많은 골짜기의 대숲 같은 소나무를 일컫는 만학송농((萬壑松濃)이었다.
스승 다산은 8경 뿐 아니라 12경, 16경, 20경까지 짓고 노래했으니 황상이 다산초당을 보았을 때 자신도 그리 살고 싶은 욕망이 매일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래, 바로 저 모습이야!”
황상은 스승 다산이 자신에게 내려준 <제황상유인첩>의 내용대로 다산초당을 꾸미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가 바로 거기에 있었고, 날로 변해가는 다산초당을 볼 때마다 꿈의 세계를 현실에서 보는 것 같아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다산 선생님은 내게 내려 준 유인의 삶을 몸소 실천해 보이시는 것이여.”
다산초당은 황상에게 있어 특별한 모델이 되었고, 기필코 스승의 가르침대로 따를 것을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 세월이 벌써 수 십 년이 흐르고 있는 셈이었다.
황상은 문득 바닥을 드러낸 먹물을 더 채우려다 말고 방문을 열어젖혔다. 찬바람이 한꺼번에 휘익 몰려들었다. 어느 틈에 계절이 겨울의 한 복판에 와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황상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산 위에서 내려온 바람과 함께 눈발이 희끗희끗 내리고 있었다. 바다 쪽으로 길게 뻗쳐 내려간 훈정강 역시 고스란히 눈발을 얻어맞고 있었다.
건넌방에서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자 가붕(家朋)의 울음소리였다. 올해 태어났으니 몇 개월 되지 않았는데도 울음소리 하나는 우렁찼다.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황상은 이태 전에 태어나 무럭무럭 자라는 오붕(吾朋)이와 함께 사람 사는 쏠쏠한 재미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 울음소리에 이어 또 다른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여인의 울음소리였고, 그 곡지통은 간장을 깐죽깐죽 파먹을 것처럼 애처로웠다.
황상은 그 울음소리를 따라 절로 걸음이 옮겨졌다. 울음소리가 나는 곳은 세찬 바람에 울타리가 무너져 내렸고, 날아오는 눈발이 구멍 난 벽을 후려치듯 들어가고 있었다.
“무엇 때문이 그로코롬 울어쌓시오?”
마당 안으로 들어간 황상이 물었다. 방 안에서 해골처럼 양 볼이 움푹 들어간 할멈이 대나무로 얽어 짠 문을 열고 말했다.
“늙은 영감이 병든 몸에 묵을 것이 없어 굶고 있어라우. 이놈의 시상을 으게 해사 쓸랑가 몰것소. 날씨는 추워서 죽것는디 이자 낼 날이 닥쳐온께 살 맛이 안나요.”
할멈의 말대로 방 한 귀퉁이에서 병 든 노인이 힘없이 콜록콜록 기침을 해대고 있었다. 기력이 전혀 없는 탓에 기침은 숨이 끊어질 듯 가늘었고 몹시 힘들어했다.
세금 때문에 걱정을 태산처럼 하는 모양이었다. 백성은 굶고 있는데 지세인 전정(田政)은 가혹하게 부과되는 모습을 느낀 황상은 집으로 돌아와 붓을 잡았다.
낡은 집 서까래엔 이끼 앉았고
老屋椽生菌
늙은 영감 병든 몸 굶어서라네
衰翁病本飢
장차 지세(地稅)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으리
將何陳地稅
이자 날은 점점 다가오는데
漸近息錢期
쌓인 눈 텅 빈 벽에 스며들고
積雪侵虛壁
세찬바람 무너진 울타리 날려버리네
高風裂破籬
슬프다! 저 백성들의 부자(父子)들이여!
嗟呼民父子
그대 위한 일이야 시 한 수뿐이라네
爲汝一題詩
황상은 제목을 <세만제촌가옥벽(歲晩題邨家屋壁)>이라 짓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붓끝에서 한 점 먹물이 뚝 떨어질 때 혈관의 피가 먹물이 되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낡은 집은 이끼가 앉아 금방이라도 포삭 내려앉을 것 같았고, 늙은 병든 영감은 약 한 첩 먹기는커녕 굶어서 병을 키우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어서 눈은 내리고 바람 또한 세차게 불어대니 힘없는 울타리는 무너지고 마는데, 긴 겨울을 무슨 재주로 넘길 수 있을까 싶어 어느 틈에 황상의 두 눈에서도 눈물이 뚝 떨어졌다.
황상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쌀을 갖다 줄 수도, 집을 고쳐 줄 수도 없는 처지가 안타깝기만 했다. 겨울이 가기 전 애옹(哀翁)은 숨을 거둘 게 불 보듯 자명한 일이어서 더욱 마음이 참담해졌다.
무엇 때문인가? 무엇 때문에 이 겨울 농민들은 울부짖고 있는가? 노골적으로 착취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는 세금부과는 토지(土地), 가호(家戶), 인정(人丁, 군정 軍政)에 대한 세금이었다. 그런데 군역과 환곡조차 권리가 아닌 세원으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수취제도가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황상은 문득 몇 년 전에 자신이 지었던 「빈가부(貧家婦)」란 시를 떠올렸다.
가난한 집 며느리여! 가난한 집 며느리여!
貧家婦貧家婦
가난한 집에서 나고 자라 가난한 독수공방
生長貧家貧獨守
가난한 집의 일 말하려 하지 않으나
貧家事欲勿言
사사건건 근심과 어지러운 일이 쑥머리와 같구나
事事愁亂如蓬首
한기가 도는 부엌은 사흘 동안 불을 피우지 못해서
寒廚三日不起煙
어린아이는 밥을 찾고 시아버지는 추위에 떨고 있네
索飯穉子惡寒舅
군포를 낼 아이가 죽은 지 십년이 지났건만
價布兒死十年
촌지에 석 냥 반을 내놓으라 하는구나
寸紙猶徵參半錢
지난 해 낳은 딸이 아직 포대기에 있건만
去年生女在襁褓
남아로 선발되어 포보가 되었다고 말하네
云乎擧男充砲保
여아를 안고 관아에 들어가니 산처럼 성을 내니
抱兒入官怒如山
간악한 이 세상 이루다 말할 수 없으리
此世奸狀難盡考
가난한 집 며느리여! 가난한 집 며느리여!
貧家婦貧家婦
하루아침에 잡초에 묻혀 썩는 것만 못하리.
不如一朝隨百草
이 땅의 어느 여인네가 바지런하고 지악스러운 성품을 지니지 않았으랴. 남편조차 없는 과부 신세이니 더욱 사는 게 팍팍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그 원인이 군포 때문임을 황상은 지적하면서 하루아침에 잡초에 묻혀 죽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하루저녁만 불을 때지 않아도 방 안은 한기가 차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사흘 동안 불을 때지 못했으니 한기도 한기려니와 내리 사흘을 굶은 배고픔을 어디에 비할 수 있겠는가.
먹고 자라야할 아이는 배고파 칭얼대고 시아버지는 추위에 떨고 있는데, 아들 죽은 지 10년이 지났어도 군포를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통지서도 그렇고, 거기에 낳은 지 1년도 안된 딸아이까지 남아로 선발되어 포보가 되었다는 말에 관아를 찾아가지만 날벼락 같은 말만 듣는 여인의 처지에 황상은 차라리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맞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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