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길목에서 =김영배(호당. 의학박사. 전중앙의원장)
젊은 사랑과 황혼의 사랑
냉정과 열정 사이의 작가 ‘쓰지 히로나리’는 자기가 쓴 연애소설 한 대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영원한 행복이 없듯 영원한 불행도 없는 거야. 언젠가 이별이 찾아오고 또 언젠가 만남이 찾아오느니 인간은 죽을 때, 사랑 받은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과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거야. 난 사랑한 기억을 떠올리고 싶다고.
사랑 받음과, ‘사랑한’···. 나는 어느 쪽일까.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보도된 ‘센드라 데이 오코너(77)’ 전 대법관의 깊고 고귀한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누구나 법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법학도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꿈의 명예로운 자리엔 대법관 자리를 미련 없이 내던지면서까지 ‘알츠하이머병’에 걸린 남편을 간호하려 결단을 내렸다. 그런데 아내를 기억 못하는 남편은 요양원에서 어떤 할머니 환자와 사랑에 빠져있다. 부인 ‘오코너’는 행복해하는 남편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담담히 얘기한다. 그를 통해서 노년의 사랑을 조명한 모 신문사의 기사에서 한 심리학자는 말한다.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것이라고 그 차이는 ‘사랑받기와’ ‘사랑하기’의 거리이기도 하다.
흔히 사랑은 젊음의 전유물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신호는 주변의 학자나 몇몇 책에서도 눈에 띈다. 나이든 노인들의 사랑을 들여다보는 이 책들은 ‘받는 만큼 준다’ 는 오늘의 계산적인 사랑법과 다른 목소리를 낸다. 어떤 심리학자는 고령자는 물론 육체적인 활동 기능은 쇄진되나 상대성인 사랑의 마음은 젊은이의 사랑에 못지않은 강렬한 힘을 발산한다고 하였다. 홀로 사는 어떤 할머니가 유연히 홀로 사는 할머니와 아내를 먼저 보낸 할아버지와 만난 사연을 순정하게 고백한 내용은 이러하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겨우 한 계절이지만 00씨는 내 인생 전체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한평생 고달프게 살아온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어떤 수사 섞인 말보다 진실하게 다가온다. 어떤 조건이 개입된 사랑의 계약과 파기는 하나의 유희적인 한낮 거래임을 귀뜸한다. 나는 그분에게서 뭔가를 받고 싶어서 결혼하려고 했던 게 아니야. 내가 그분한테 뭔가를 해주고 싶어서 결혼하기로 했던 거지. 이 얼마나 아름아운 결혼관인가!
84세의 노 철학자 ‘안드레 고르’가 쓴 “D에게 보낸 편지”에 당신은 이제 막 여든 두 살이 되었습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9월에 불치병으로 고통 받아 온 아내와 동반 자살로 삶을 마감하였다. 이 얼마나 숭고한 사랑의 표현인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날! 세상만사가 어지럽기 한이 없는 오늘의 우리의 삶의 괴롬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곰곰이 생각하면 숨이 남아 있는 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있다며 바로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이 아닐까 싶다. 영원히 굳어지지 않고 사랑하며 늙어 간다면 나이 먹는 것도 그다지 불평할 일이 아니리라.
그렇다면 진정한 사랑을 경험하기 위해 꼭 늙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 받느니보다 행복하다는 글을 한 번쯤 떠올려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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