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 햇발
그 남자의 집 /김현임(수필가)
그의 집 앞에 섰을 때 눈에 들어 온 향나무와 목련나무, 지붕을 덮을 듯 우거진 나무들의 위용에 나는 그만 기가 질렸다. ‘네 나이 스물 하나 적엔 절대로 네 마음을 주어선 안 된다’는 시 속 경구를 제대로 새기지 못한 탓이었을까. 한 번 마음을 주자 말 그대로 저돌적 기세, 적당히 밀고 당기는 사랑의 요령(?)을 몰랐던 내 첫사랑처럼 그의 집 앞 나무들이 만들어 낸 그늘은 깊고 어두웠다.
진즉에 제목과 이런 서두까지 정해 두고 벼르고 별렀다. 하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여인의 집 주위를 맴돌며 시를 읊을 뿐 결코 초인종을 누를 수 없었던 불행한 시인 롱사르처럼 나 또한 근 두어 달이 넘도록 글 주변을 하염없이 서성이고만 있었다. 글을 위해 수북이 발췌, 메모한 수많은 단상들은 애써 준비했지만 갈수록 생기 잃어가는 꽃다발들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다가 ‘다산家는 순교집안.... 역사적 가치 높아’ 오늘 조간신문의 기사에 발끈 화가 치밀어 다짜고짜 그 집 대문을 밀고 들어선 격이다.
밝은 주황색 개량종 코스모스가 우거진 바닷가 정약전의 집에서다. 허물어진 기둥, 지붕까지 치솟은 풀더미에 숨이 막히며 울먹울먹 눈시울 뜨거워졌다. 살짝 건드리기만 하여도 풀썩 무너질 것 같던 그 낡은 집 앞 한 발 아래 공소라던가. 그래, 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듯한 천주교 예배당이 있었다. 일찍이 그의 집안은 천주교로 하여 멸문지화를 당했다. 형은 서소문형장에서, 형수와 조카들도 순교하였고 자신은 절해고도 흑산도로, 손 아래 동생인 다산 역시 장장 18년을 유배당해 낯 선 땅에서 발 묶여 지냈다.
후세인들은 정약전 그를 술에 절어 지낸 파락호였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가 가끔 외마디소리를 지르며 내달렸다는, 집 앞에서 바닷가로 이르는 언덕길을 내려다 볼 때 내 가슴은 얼마나 얼얼하였던가. 그래서 나는 섬을 빠져나오도록 내내 입을 삐죽였다. 말끔하게 단장된, 그의 집 바로 아래 자리한 아담한 예배당을 지나치면서는 솔직히 궁시렁 궁시렁 차마 옮기기 힘든 험담도 마다 않았다. ‘다산가는 세계 카톨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가문’이라는 교계의 과찬이 실린 오늘 기사가 오히려 당시의 내 화를 부추긴 셈이다. 그렇다고 당신들로 인해 박해를 받다가 억울히 살다간 사나이를, 그 사나이가 머물다간 처소를 방치한 채 이제껏 돌아본 적 있나. 제 뜻 한 번 온전히 펼쳐보지도 못하고 하루는 술에 절고, 하루는 울화에 가슴 뜯고, 또 하루는 어부가 잡아 온 물고기나 그리다가 생을 마감한 가슴 아픈 한 사나이의 신산한 삶의 흔적에 나는 화가 났다.
삶에 만족하는 자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나니 세상과 끊임없이 불화하라. 너의 극심한 불운이 훗날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열쇠가 되기도 하나니, 이제는 600년 전 호수의 흔적만 남았을 뿐 제게 남은 마지막 물기마저 증발시켜버린 사막의 데드플라이가 현대인들이 찾는 명소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앙상한 카멜손 트리의 마른 가지에 둥지를 튼 까마귀 한 쌍이 만들어내는 몽환적 풍경은 오히려 삶과 죽음,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던 제 존재에 대한 생각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게 한다던가. 그러니 너 또한 물을 포기한 사막의 호수처럼 과감히 시류와 역행하라 꼬드긴다.
한번도 본적 없는 자산어보의 페이지를 넘기 듯 먹먹한 증세는 그런 대로 잡혔지만 요즘 들어 부쩍 심해진 증상이다. 계절은 이미 찬 서리 내리는데 바깥에 떨고 선 듯 자꾸 어깨가 시렵다. 다른 꽃은 이미 도톰한 열매를 자랑하건만 미처 씨 맺지 못한 여름꽃의 불안이다. 유택에 들기를 꺼려 하염없이 떠도는 혼이랄까. 나는 언제쯤 이 고질에서 벗어나게 될 것인가.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제 둥지를 거부하고 자꾸 다른 이의 처소를 기웃대며 떠돌고 있다. 승자독식의 삶에서 밀려 난 못난이처럼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작고 음습한 곳으로 숨고 싶다. 바로 그런 곳이다. 옛 사람이 살고 간 흔적이 깃든, 그것도 당시엔 아주 불행했던 실패자들이 머물던 곳에서 그들의 고단한 삶의 무게가 내 어깨를 짓누르며 아예 눌러 앉으라 부추긴다. 오랜 만에 해후한 지기의 훈기랄까. 예민한 내 코에 스치는 거역 못할 동류의 냄새다.
존재는 끝없는 몸부림 속에 있다던가. 누구나 햇살 바른 양지를 지향하지만 음지에서 보내고 마는 명운이 대다수라는 것도 익히 알아버린 나이지만 증발된 호수가 만들어 낸 데드플라이처럼 음울하고 삭막한 삶은 견디기 힘든 고역이다. 자고 깨면 모래언덕, 까마득한 듄이 가로막는 우리네 여정의 끝은 어디인가. 오래 전 내 스물 하고도 한 살이었을 때, 그늘 무성하던 그 남자의 집 앞에 선 듯 나는 또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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