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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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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다산실학원 제13회 학술대회 개최
동아시아의 지방통치와 공공성 -[목민심서]를 중심으로

  

강진다산실학연구원에서는 지난 22일부터 23일까지 강진군다산기념관 다목적홀에서 동아시아의 지방통치와 공공성 -[목민심서]를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제13회 국내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강진다산실학연구원은 [목민심서]를 동아시아의 지방통치라는 보다 확대된 시야 속에서 접근해 보고자 이번 학술대회를 열었으며,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의 목민서를 포함하여 조선후기 목민서 편찬의 전통속에서 [목민심서]의 위치를 포착해보았다.

또한 지방 통치에서 공공성을 어떻게 실현하려 하였는지를 규명하여 오늘날 중앙정치와 지방행정의 난맥상을 타개하는 방안을 찾아보고 요즘 화두가 되는 복지정책에 대한 다산의 구상을 검토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첫째 날, 명.청시대 중국의 관잠서 黃六鴻(황육홍)과 [福惠全書(복혜전서)]중심으로, 근세일본의 목민사상과 사회변혁, 조선후기 근기남인계 목민학 전통과 목민심서, 다산의 글쓰기와 공공성, 목민심서를 통해서 본 행정사상과 행정개혁, 목민심서를 통해서 본 지방재정과 공공성이라는 주제로 6명 교수의 발표와 토론으로 진행되었고, 둘째 날에는 목민심서와 21세기라는 주제로 종합토론의 시간을 가졌다.

강진다산실학연구원에서는 지난 2007년 제1회 학술대회를 시작으로 올해 제13회 학술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면서, 강진과 다산실학을 국내ㆍ외 학자 및 관광객에게 널리 홍보하고, 장기적으로 강진을 다산실학의 본부로 구축하는데 기여하고 있다.(이현숙 기자)

 

사진1

 

◉강진다산실학원 제13회 학술대회 내용 <요약>

▶명.청시대 중국의 관잠서 - 黃六鴻(황육홍)과 [福惠全書(복혜전서)]중심으로(김형종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복혜전서는 청대 초기 17세기 중국의 지방관 출신 황육홍이 지은 것이다. 이 책은 황제가 직접 그 장관을 임명하는 가장 하층의 지방행정 단위이면서, 아울러 유일하게 관리가 직접 일반 백성을 대면하면서 관리할 수 있는 단위인 주현의 지방장관, 즉 지현과 지주라는 정인관을 대상으로 삼아 쓰인 것이다. 주현 이상 수준의 관리는 백성이 아닌 자기 하급의 관원을 관리하는 관원이므로 사실상 주현의 지방관만이 이른바 목민관, 또는 부모관을 자처할 수 있었던 만큼, 이 책은 주로 새로 부임할 예정이거나 이제 막 부임한 하급 지방관을 대상으로 쓰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복혜전서를 통하여 명청시대 중국의 지방 행정 체계의 구조와 실제를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명청시대(1364~1912)는 전근대 중화제국의 지방 행정 체계가 가장 정비, 완숙되었던 시기인데, 1694년 완성된 복혜전서는 명조의 유산과 청조의 새로운 지방행정의 요소를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복혜전서는 중국의 관료제도와 지방행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17세기 중국 지방사회의 각종 사회현안을 이해함에 있어, 명.청시대(또는 중화제국 후기)를 연구하는 연구자라면 가장 먼저 참조해야 할 기초사료가 될 것이다. 복혜전서를 통해 지방관으로 임명된 관료들이 각 단계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과 실제적인 노하우를 터득할 수 있다. 실제 지방행정에는 법률과 원칙, 선례가 존재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원활한 행정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지방관이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현지의 서리와 아역을 어떻게 장악하는가의 여부, 혹은 지방관이 직접 고용한 막우 등을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지방관 생활의 성공여부가 판가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세일본의 목민사상과 사회변혁, 오가와 카즈나리의 [목민충고]연구를 실마리로(이희복 강원대학교 일본학과 교수)

근세일본의 막번제사회가 확립되는 과정에서 발흥한 일본주자학의 발전과 전개를 확인하는 것을 운명이며 천직이라 생각해온 보고자에게 금번 보고는 금상첨화와 같은 기회이다. 참가수락을 한 이후 보고자는 선행연구인 오가와 카즈나리의 [목민의 사상]과 관련저서를 구입하고, 학술대회의 모토인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관련연구를 섭렵했다. 그리고 보고문의 정리단계에서 내린 결론은 오가와의 선행연구를 충실히 소개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하겠다는 것이다. 오가와에 의하면 일본의 목민사상은 17세기에 발아하여 근세 일본역사와 더불어 발전하면서 수많은 목민 관련 서물을 탄생시켰다. 그 목민의 서물들은 근세일본에서 정치상식을 확립하고 정치사상으로 기능했을 뿐만 아니라 근대천황제국가로의 체제변혁을 준비한 정치사상이기도 했다. 오가와의 연구목적은 명확하다. 그것은 “영주가 농정과 민정리라고 하는 현장에서 주목한 일군의 서물을 거론할 것이다. 그것들은 막부말기에 <목민의 서>라 불리게 된다. 본서는 <목민의 서>를 통해서 민정이라는 통치관계에 나타나는 영주사상, 혹은 통치자 의식을 탐구하여 새로운 근세일본의 국가상을 그려내는 시도”이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근세일본의 목민사상이며, 그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활용한 것이 <목민의 서>, 즉 목민서물이다.

원래 전투 집단이었던 무사가 통치자로서 역사의 지평에 나타나는 것은 언제의 일인가? 군웅이 할거한 전국시대는 쇼군이라고 하는 공위권력의 창출에 의해 결착했다. 중세국가는 공가 사가 무가라는 권문세력이 각각의 직무능력을 활용하면서 대항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민중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 세력 중에서 천하를 통일하고 근세국가를 창출한 것은 무가였다.

 

▶조선후기 근기남인계 목민학 전통과 [목민심서](원재린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조선시대 목민서가 제작되고 유통된 양상을 시기별로 개괄해 보면 15~6세기에 그 틀이 갖추어지고 17~8세기를 거치며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전기 유통되었던 목민서는 자체적으로 편찬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만들어져 유통되던 것을 수입하여 재간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중국에는 일찍부터 중국에는 일찍부터 官箴類(관잠류) 목민서가 만들어져 관료의 행정 수행에 필요한 이념과 지침들을 이미 많이 축적되어 있었으며, 조선에서는 이를 본격 수용 활용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이 저술이 원나라 학자 張養浩(장양호1269~1329)의 목민충고(牧民忠告1338)와 명나라 관리 朱遠吉(주원길)의 (牧民心鑑목민심감1404)이었다. 또 다른 자료로 (四事十害사사십해)가 있었다.

이처럼 16세기 후반이래로 조선의 현실을 고려하는 가운데 중국의 목민서를 참조하여 활용하는 양상들이 점차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조선 목민서를 구성하는 글들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인 글로 李相國梧里戒具甥李德近書(이상국오리계구생이덕근서)을 들 수 있다. 해당 편지글은 李元翼(이원익1547~1634)이 수령으로 부임하는 조카 李德近(이덕근)을 위해 지방관으로서 명심해야할 사항들을 적어 보낸 것으로써, 1604년(선조37) 이덕기가 木川(목천) 縣監(현감)에 임명되었을 즈음으로 추정된다. 이 편지글이 주목되는 이유는 조선후기 가장 널리 유포되었던 목민서인 [先覺선각]의 주요 구성내용을 이루기 때문이다. 선각은 조선후기 목민서를 분류하는 기준으로 상정될 정도로 가장 많이 유포되어 다수의 이본들이 존재하였다. 유독 선각이 빈번히 필사되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로 이원익의 편지글을 상정해 볼 수 있다. 이는 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오리 이원익 상공이 그의 생질 이덕기에서 써서 준 41조를 얻었는데, 이는 옛 명재상(이원익)의 말이며 민을 다스리는 매우 긴요한 방도를 담고 있어서 뒤에 깨닫는 자의 스승이 된다.”고 규정하였다. 그야말로 선각, 즉 남보다 먼저 세상의 이치 혹은 도를 깨친 사람으로서 이원익의 위상을 새삼 강조하였던 것이다.

 

▶다산의 글쓰기와 공공성: [목민심서]의 구성과 서술방식(강혜종 연세대학교 박사수료)

다산의 목민심서의 서문에서 자신의 목민관을 필두로 목민심서의 편찬 목적과 책의 구성에 대해 설명하면서, 선친의 善政(선정)을 통한 학습과 지방의 현실을 직접 목도한 자신의 경험. 역사서에 실힌 전례를 두루 섭렵하여 구체적인 절목으로 구성한 책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나의 선친께서는 聖朝의 인정을 받아, 연천현감, 화순현감, 예천현감, 울산도호, 부사, 진주목사를 지냈는데, 모두 치적이 있었다. 비록 나는 불초하지만 그때 따라 다니면서 보고 배워서 다소 듣고 깨달은 바가 있었으며, 뒤에 수령이 되어 이를 시험해 보아서 다소 증험도 있었다. 그러나 뒤에 떠도는 몸이 되어서는 이를 쓸 곳이 없게 되었다. (...중략...)이에, 23사, 우리나라의 여러 역사 및 여러 사람의 저서에서 옛날의 사목이 백성을 다스린 유적을 골라 아래위로 그 단서를 끌어내고 분류해서 차례로 편성하였다. 남쪽 변두리 땅에서 서리들이 전답의 부세를 농단하여 여러 가지 폐단이 어지럽게 일어나고 있는데, 내가 처한 바가 비천했기 때문에 듣는 바가 자못 상세하였다. 이것 역시 종류에 따라 설명을 기록하고 나의 얕은 견해를 덧붙였다.>

다산이 위의 글에서 선친으로부터 배운 바를 수령이 되어 실행하니 증험이 있었다고 언급했듯이, [解官六條 遞代]에는, 갑자기 직에서 물러나게 되더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청렴하고 명백하게 文簿(문부)를 정리해놓으라는 조목을 설명하는 실례로 선친을 기리며 쓴 묘비명을 일부 수록하여, 선친의 선정에 대한 구체적인 면모를 독자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한다.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통해서 본 다산의 행정사상과 행정개혁(홍준현 중앙대학교 공공인재학부교수, 명성준 경상대학교 행정학과교수)

역사적 혼란기나 왕조 교체기 때마다 행정개혁은 국왕은 물론 지식인 계층에서 계속적을 연구되고 시도되어 왔다. 이들은 당시 지배적이었던 우리 민족의 가치관과 함께 외국의 문물을 통합함으로써 효과적인 개혁안을 도출해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당시의 혼란한 시대상을 극복하기 위한 행정개혁을 논의한 대표적인 실학자였다.

다산이 살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 사회가 불안정한 변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려드는 역사적 전환기이자 변화가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대였다. 이전 2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당파의 분열과 당쟁의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던 시기였다. 개혁정치를 지향하였던 영조와 정조의 통치가 끝나면서 당시 개혁에 참여했던 많은 인물들이 추방되어 세도정치가 다시 등장하였다. 순조 임금의 즉위와 함께 왕실 외척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사회 내의 신분적, 경제적 모순이 누적되면서 홍경래의 반란과 같은 각종 민란들이 발생하였다. 부패한 지방수령과 토착 서리들의 농간으로 가혹한 수탈이 자행되고 황구첨정과 백골징포 등을 통해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최악의 상황에 도달하고 있었다. 아울러 천주교와 서학이 도입되면서 제사를 거부하는 등 유교를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사회규범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신유사옥과 같은 종교적 박해가 심해졌으며, 이로 인해 조선 후기 사회는 더욱 더 혼란스러워졌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에 태어나 1836까지 74년의 인새동안 영조, 정조, 순조, 현종 등 4명의 왕을 거치면서 행정 관료로서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서 500여권의 저작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행정에 대한 다산의 논의는 학자로서의 공부, 관료로서의 경험, 귀양살이 동안의 견식이 합쳐진 종합적이고 통합적인 것이다.

 

▶[목민심서]에 나타난 다산 정약용의 因時順俗(인시순속) 的 지방재정 운영론(송양섭 고려대교수)

18세기 부세운영의 변화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대동법의 영향부터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가재정 내 가장 커다란 비중을 점하던 공물의 수취가 현물납의 형태로 이루어짐에 따라 그 조달을 둘러싸고 방납 등의 각종 문제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변통하기 위한 논의가 장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진행된 결과 마침내 대동법으로 마무리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대로다. 숙종 34년(1708) 황해도를 끝으로 전국적 실시가 완료된 대동법은 종래 공납제가 안고 있는 현물납의 모순을 상당 정도 극복하고 국가의 공물수요를 감안하면서 공납의 규모를 미.포.전 등 환산이 가능한 표준가치로 바꾸어 재정의 합리적인 산정과 운영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공납의 계량적 파악과 통일적 운영이 가능해지도록 함으로써 국가재정이 전체 규모를 추산하여 총량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커다란 의의가 있었다. 18세기 접어들어 비총체적 부세.재정 운영방식이 뚜렷하게 경향성을 드러내는 것도 대동법의 마무리에 크게 힘입은 바 크다.

18세기 왕조정부는 기존의 수취에서 나타나는 각종 폐단을 해소하기 위해 개별기관의 독자적 수취를 호조나 선혜청.균역청 등 재무부서가 적극적으로 통제해 나가고 각 기관별,부문별 수취총액이 일정액으로 설정, 운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田稅(전세)의 경유 敬差官(경차관) 파견이 금지되고 호조의 年分事目(년분사목)에 입각하여 산정된 총액은 수령의 주관하에 수취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통치의 거점으로서 지방관청의 운영을 둘러싼 재정조건이 그리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동법으로 지방재정은 대동 유치미가 배정됨으로써 보다 공식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변모하였지만 그 액수가 그리 넉넉하다고 할 수 없었고 이조차도 점차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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