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머리말
21세기는 문명사의 전환기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18세기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을 통해서 구축되었다고 알려진 서구 근대 문명이 20세기까지는 지배하였지만, 이제 21세기에는 그 수명이 다했다는 문제의식이다. 서구의 뜻있는 지성들은 일찍부터 그 대안을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서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2012년 다산 탄생 250주년을 전후하여 국내외에서 다산 정약용(1762~1836)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다산 정약용의 사상 가운데 무엇을 주목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합의된 논의가 제시된 적은 없었다. 여기에는 합의를 도출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의 연구 풍토도 문제지만 서구의 학문 방법론이 지배적인 현실도 그것을 어렵게 만드는데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다. 동양의 전통시대 지식인을 서구의 방법론으로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 인문·사회과학계에서 최근까지도 ‘서구 중심주의’에 대한 문제제기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현실은 그러한 한계에 대한 고민의 표출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다산 정약용의 사상, 나아가서 조선후기 실학 내지 동아시아 유학을 문명사의 대안으로서 탐구할 경우 피할 수 없는 딜레마다.
다산의 사상, 나아가서 동아시아 유학이 문명사의 대안으로서 무언가 유의미한 내용을 제시하려면 서구적 학문 방법론 자체에 대한 심도 깊은 토론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서구 근대문명과 함께 발생하여 발전한 서구적 방법론에 대하여 무조건 긍정한다거나 부정하는 태도에서 탈피하여 무엇을 보편성으로 인정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이다. 다산이나 동아시아 유학을 논의할 때 그것의 의미를 서구적 보편성을 기준으로 탐색할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닌가 한다. 즉 20세기까지 세계사를 지배한 서구 근대 문명이 가진 보편성 내지 진보적 측면을 인정한 위에서 다산의 사상 내지 동아시아 유학 가운데 어떤 측면이 21세기에도 유의미한 것인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0 맺음말
우리의 근대화는 서구 문명이 들어와서 비로소 출발된 것은 아니었다. 조선후기, 즉 양란 이후 직접 생산자들의 노력에 의해 경제와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서 전근대적 제도와 인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등장하여 이 시기의 민의 성장에 입각하여 사회경제적 발전을 반영하고 촉진할 수 있는 제도 개혁을 모색하는 사상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조선후기 실학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양반제와 지주제의 모순을 완화 내지 해소하고 대동과 균형을 구현하는 새로운 국가를 지향하였다. 이것은 국가의 공적 영역을 확장하고 공법 질서를 확립하여 집권력을 강화시키고 공공성을 확대하려는 우리식 근대화 방향이었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장구한 기간 중앙집권국가를 발전시켜왔으며, 유학은 그 국가 경영의 원리로서 수용되고 발전하였다. 조선후기 실학은 주자학에서 출발하였지만 당시 국가의 위기와 관련하여 주자학을 넘어선 새로운 유학을 추구하였다. 실학자들은 양반 지주 출신이면서도 이들의 특권을 배제하는 제도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국가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을 강화시켜 계급 모순을 해소함으로써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려 하였다.
다산은 대동과 균역, 그리고 탕평을 지향하는 조선후기 실학의 국가 구상을 집대성하였는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유교주자학에 내재되어 있는 계급지배를 배타적으로 비호하는 논리를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6경 4서에 대한 주석을 새롭게 시도하여 주자의 주석을 비판하고, 주자가 주목하지 않은 악경(樂經)을 복원하기 위해 악서고존(樂書孤存)을 편찬하였다. 또한 선진(先秦) 유가의 민본사상을 발전시켜 상향식 추대론, 혁명론, 입법론을 제시하였다. 다산이 이러한 정치론을 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동과 그에 따른 민중의식의 성장이 그 배경이 되었다.
다산의 상향식 정치론과 1표 2서의 국가 구상은 상호 보완관계에 있었다. 「탕론」등에서 제출된 상향식 정치론이 국가 권력 형성의 이론이라면, 「경세유표」의 국가론은 바로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선출된 국왕이 추진해야 할 개혁의 청사진이었다. 여기서 제시한 정전제(井田制)와 부공제(賦貢制), 만민균직론(萬民均職論) 등은 오늘날에도 바람직한 국가의 위상과 역할을 가늠하는 준거가 될 수 있다.
21세기 문명사의 전환기에 유학이 그 대안이 되려면 피상적인 문화적 요소를 넘어서 국가 경영 원리를 보여주는 국가와 민의 관계, 국가와 시장의 관계 등이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며, 「탕론」등에서 제출된 상향식 정치론과 「경세유표」에서 제시된 국가론을 서구의 정치·경제·사상과 비교·검토하는 가운데 서구적 근대성의 진보적인 측면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재구성된 유학이어야 할 것이다.
# 김용흠 교수는 제8회 계명대학교 한국학 국제학술대회에서 제3분과 한국의 문명전환과 다산학 발표문인 ‘다산실학의 성격과 국가구상’을 강진 시문학파기념관에서 강연하였습니다. 이에 머리말과 맺음말을 싣습니다. 전재하지 못함을 양해바랍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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