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뭐라고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아 대충 이렇게 말했는데도 그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인지,
“무슨 일이 없겠지라? 우리 교육원장님한테 무슨 일이 안 생기겠지라?”
철식이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물고 푸우 연기를 뿜어냈다.
그런데, 다음 날 오후 늦게 갑자기 경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들이닥쳤다. 모두들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경찰차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이윽고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내리더니 박격포 씨가 누구냐고 물었다.
“내가 댁들이 찾는 사람인데, 무슨 일이요?”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회진댁과 여강이 뭔가 협상을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경찰관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는 박격포씨가 정신병 환자이기 때문에 정신병원으로 이송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저희들이랑 함께 가시죠.”
타잔이 정신병 환자라니? 이 또한 무슨 날벼락 같은 말이란 말인가?
“난, 정신병에 걸리지 않았소, 누가 나를 정신병환자라고 신고를 했단 말이요?”
타잔은 완강히 경찰관들의 팔을 뿌리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보시오, 박격포씨! 우리는 경찰관이지 의사가 아닙니다. 병원에 가셔서 의사한테 진단을 받으면 될 게 아니겠습니까?”
“좋소. 멀쩡한 사람더러 의사가 정신병 환자라고 진단은 하지 않겠지라.”
나는 타잔이 격렬하게 몸싸움을 할 줄 알았는데 순순히 경찰차에 올라탔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마하니 의사가 오진을 하겠습니까?”
나는 타잔의 등 위에서 이렇게 뇌까렸지만 너무나 황당한 일이어서 경찰차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해 있었다.
그런데 타잔이 정신병원으로 끌려갔는데도 여강의 표정은 너무나 담담했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번지고 있었다.
“너무나 태연하시군요. 오라버니가 정신병원에 끌려갔는데도······.”
내 말에 그녀는 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오라버니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는 것 보다는 백 번 나을 것 같애서…….”
“그럼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로 꾸몄단 말입니까?”
“궁여지책이었지. 엄마를 설득해서 올케언니랑 도장을 찍었어.”
“뭐라구요?”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친어머니와 며느리가 짜고 아들이자 남편을 정신병원에 가둘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뼘 사람의 마음은 모른다더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런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너무나 뜻밖이었다.
“어제 올케언니가 갑자기 만나자고 하더라구. 무슨 일인가 싶어 읍내 커피숍에서 만났지. 올케언니는 괴롭다며 울더군. 이제 오라버니가 꼼짝없이 경찰에 잡혀가서 콩밥을 먹게 되었다구.”
불륜을 저지른 남자가 누구며 그 사실을 말하라고 타잔은 한밤중 길길이 날뛰면서 천정을 향해 엽총을 쏘고 말았는데 그것을 고소하게 되면 꼼짝없이 콩밥을 먹게 되었다는 거였다. 그러나 막상 고소를 하려고 보니 어린 자식들이 생각나서 차라리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더라는 거였다.
“그래서요?”
“가족 중 두 사람이 동의를 하면 강제입원을 시킬 수 있더군.”
그녀는 자신이 한 행위가 잘 한 일이나 된 것처럼 이번엔 만면에 웃음을 띠었다.
“그렇다고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켜요? 멀쩡한 사람을······.”
“감방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지. 그곳을 한 번 들어가면 영원한 전과자가 되는 게 아니겠어? 평생 불명예스럽게 꼬리표가 붙어 다니는 전과자.”
그렇다. 그녀의 행위는 잘 한 일인지도 몰랐다. 이혼을 막고 그래서 타잔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정신병환자로 입원시키는 일이 최상의 방법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해 여름엔 난 벌써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 있었다. 방학이 시작하면 나는 으레 큰어머니댁엘 찾아가곤 했다. 큰아버지가 딸 하나만 낳고 건설현장에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나는 그 밑으로 양자를 갔고 큰어머니는 나를 매우 예뻐해 주셨다. 그러나 큰어머니의 각별한 사랑보다도 누나가 몹시 반가워하기 때문에 방학이 기다려지곤 했다.
누나가 큰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곳은 한적한 바닷가였다. 반농반어의 그 갯마을은 기름진 농토는 찾아보기 힘들었고 잔돌이 많은 자드락밭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었다.
누나는 나를 데리고 밭둑을 자주 찾곤 했는데, 밭둑에는 버려진 청자조각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처음 보는 신기한 청자파편을 누나는 대바구니에 그득 담았다. 그리고 그것을 이따금 마을을 찾아오는 엿장수에게 건네주면 입에 살살 녹는 엿을 얻어먹을 수가 있었다.
“왜 깨진 것을 주는 데도 엿을 주는 거야?”
“글쎄다. 그건 나도 몰라.”
누나는 찾아온 사촌동생에게 엿을 사주는 재미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엿 먹는 일도 즐거웠지만 청자파편에 그려진 신기한 그림이 더 좋았다. 구름, 학, 앵무, 봉황, 나비 등의 하늘 무늬가 있었고, 모란 국화, 보상화, 넝쿨, 과일 등의 땅 무늬도 있었다. 연꽃, 오리, 부들, 부초, 파도, 물고기 등 물가풍경도 보이는 것이어서 청자파편마다 제각기 다른 그림을 보이고 있었다.
“나, 이거 엿 사먹지 않고 그냥 가질래.”
“안 돼. 절대루······.”
“왜?”
“이것엔 귀신이 붙었단다. 그래서 집에 가지고 가면 귀신이 따라온대.”
“귀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엿장수는 귀신 붙은 청자파편을 엿과 바꾸는 것일까. 나는 누나 몰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청자 하나를 호주머니에 담았다.
누나는 밤마다 밤마을 갈 때면 반드시 나를 데리고 갔다. 시골 바닷가 마을엔 누나처럼 예쁜 처녀들이 많았는데, 밤이면 방에 모여서 고구마며 무를 깎아 먹기도 하고 두부김치를 해먹으며 얘기꽃을 피우곤 했다.
“나도 남동생이 있단다. 귀엽지?”
누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을 처녀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그런데 누나를 따라 갈 때마다 이상한 처녀가 방 한쪽에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누나 또래들은 서로 얘기꽃을 피우다가 한바탕 웃기도 하고 박수를 쳐대는데도 그 처녀는 꿈꾸듯 혼자 히죽히죽 웃기도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는 것이었는데 행복하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며칠 후 나는 깜짝 놀랄만한 일을 목격하고 말았다. 마을 뒤 높은 산에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마을 아이들이 계곡 아랫켠 웅덩이에서 멱을 감곤 했다. 나도 하루에 한차례씩은 그 계곡으로 달려가 멱을 감았다. 그런데 바로 그날, 갑자기 아이들이 그 처녀가 나타나자 앞 다투어 뒤를 따르는 것이었다.
“저 봐라!”
앞장선 아이가 우뚝 멈추고서 그 처녀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그 처녀는 계곡 웅덩이에 이르자 갑자기 옷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팬티만 달랑 입고 수박덩이처럼 큰 젖가슴을 출렁거리면서 풍덩, 하고 계곡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었다. 난생 처음 훔쳐보는 희고 매끈한 여자의 몸이었다. 아이들은 살금살금 그녀가 멱을 감는 계곡 웅덩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틈에 준비를 했는지 보리까끄라기를 흘러 보내기 시작했는데, 잠시 후 그녀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애구머니나!”
그녀는 옷을 입은 둥 만 둥 허겁지겁 마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박수를 치며 깔깔 웃어댔다.
그런데 그 이듬 해 겨울 방학 때 큰어머니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녀의 배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누나. 그 처녀가 애를 뱄던디 누구한테 시집을 간 거야?”
“아니.”
누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럼 왜 배가 불렀지? 배가 남산만 하던데?”
갑자기 누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일로 마을 사람 두 사람이 경찰서에 끌려갔단다.”
“왜?”
“넌, 몰라도 돼.”
누나는 내 머리통을 두어 번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별 것을 다 묻는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호기심이 부쩍 발동했다.
“갈쳐 줘. 응?”
“한 마을에 사는 노인 두 사람이 번갈아가면서 몹쓸짓을 했단다. 그래서 경찰서에 간 것인데 아마도 시방 콩밭을 먹고 있을 게다.”
그런데 며칠 후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는 사건이 터졌다. 추운 겨울에 웬 갓난아이가 시냇물에서 떠내려갔다는 것인데 그 갓난아이의 어미는 그 처녀였다는 거였다. 이번엔 거꾸로 그녀가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파출소에서는 그녀가 정신병자이기 때문에 그냥 풀어줬다는 소문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누나는 친구들과 함께 서너 개의 주먹밥을 만들어 고샅을 지나 어떤 집을 몰래 가는 것이었다. 누나는 불 꺼진 어는 골방엘 도둑처럼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골방의 주인공은 바로 정신이 이상하다는 그 처녀였다. 그런데 그녀의 발목에는 어른 팔뚝만한 나무로 양쪽이 채워져 있어서 일어나 앉을 수만 있을 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녀는 건네주는 주먹밥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치웠다. 그리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방 안에는 숨을 쉬지 못할 만큼 악취가 가득했다. 그녀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누운 채 대소변을 본 탓이었다.
“누나, 왜 사람을 방 안에 가두어놓는 거야?”
“정신이 이상해서 그 여자 아부지가 그렇게 가뒀단다.”
“왜 밥은 안 주는 거야?”
“글쎄다. 우리가 간혹 가서 음식을 주니까 지금까지 살고 있단다. 그 여자 집에서는 아예 음식을 주지 않는 것 같더라.”
“왜 그런데?”
“갈수록 증세가 심해지니까 그런가 봐. 넌 몰라도 되니까 그만 물어.”
그런데 이틀 후 다시 누나와 누나 친구들이 또 주먹밥을 만들어 그녀 집을 찾았을 때였다. 그 방문에는 각목으로 가로세로 문을 막아버려 더 이상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음 해 큰어머니집을 찾았을 때 누나로부터 그녀가 죽고 말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여강과 함께 타잔이 입원한 정신병원을 향했다. 산자락에 자리한 정신병원은 정원이 잘 꾸며져 있었지만 막상 폐쇄병동을 향했을 때 모든 창문마다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그는 우리 속에 갇혀진 한 마리 호랑이였다. 쇠창살을 부여잡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두 발을 땅이 꺼져라 내리찍고 있었다.
“이봐! 간호사! 난 정신병자가 아니여!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구! 좋은 말로 할 때 날 밖으로 내보내 줘!”
그러나 간호사의 말은 냉정했다.
“환자분이 너무 시끄럽게 하면 안 돼요.”
“뭐야? 시끄럽게 한다구? 정말 난 정신병자가 아니라니까. 잔말 말고 빨리 날 내보내!”
“글쎄. 조용히 좀 하세요. 정 말썽 피우시면 체벌을 받게 돼요.”
“나, 이것 미치것네. 니들 내가 밖으로만 나가면 죽여버리겠어! 알았어? 정말 죽여버린다구! 생사람을 잡아다가 여기 가둬놓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아!”
그 때 나와 여강이 나타나자 타잔은 지옥에서 지장보살이라도 만난 듯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강아! 누가 날 이곳에 처넣었대? 응? 도대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제. 나는 미치지 않았어!”
그러나 그녀는 잠자코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 조금만 참고 있어 봐.”
“참으라니? 내가 시방 정신병자냐? 여기 있으니까 정말 정신이 돌아버릴려고 그런다. 어서 날 풀어 줘. 응? 진짜 나는 미치지 않았어!”
타잔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웠다.
“조금만 참아. 다 오라버니를 위해서 그런 것이니까.”
쇠창살에 움켜쥔 갖다 타잔이 별 희망적인 말을 듣지 못하자 발악을 하듯 말했다.
“너, 네가 날 여기에다 처넣었냐? 설마 그렇게는 안했겠지? 내 동생이 친오빠를 정신병원에 처넣을 리가 있나?
그럼 그년이 그랬대? 맞지? 그 쳐 죽일 년이 날 이렇게 만든거지?”
타잔의 두 눈은 피가 뚝뚝 떨어질 만큼 충혈 되어 있었고, 그의 입에서는 게거품이 일었다. 여강이 발길을 돌리 자 타잔의 악에 바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냥 가지 말고 날 좀 풀어주라니까! 어서! 제발 날 좀 풀어 줘! 제발……!”
타잔은 어린 시절부터 야산에서 야생동물처럼 살아온 사람이었다. 산과 계곡, 초목과 바람과 구름이 있는 곳에서 개와 흑염소와 함께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데 쇠창살 안에 들여 놓았으니 길길이 날뛸 것은 뻔한 일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을 거야. 그 때까지만 참아 줘.”
그녀는 차마 더 이상 타잔의 절규를 못 듣겠다는 듯 등을 돌리려는 순간, 그의 눈빛이 내게 날아왔다.
“법능 화사! 그냥 가는 것이요?”
나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칫 섰다.
타잔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애원했다. 조금 전 악을 바락바락 쓰던 것과는 달리 순한 양이 되어 살려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법능 화사! 날 좀 나갈 수 있도록 해주씨요. 날 좀 살려달라니까요.”
그의 눈빛은 점차 뭐라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처절했다. 아아, 그랬다. 그가 노루를 맨손으로 쫓아가 잡을 때에도 노루의 눈빛은 저토록 처절했다. 멧돼지를 잡을 때에도 거친 숨을 몰아쉬던 멧돼지의 눈빛 역시 처절했었다.
“제가 어떻게…….”
나는 절로 고개가 흔들어졌다. 설령 내게 관세음보살처럼 구원의 손길을 펼칠 수 있다 해도 경찰서에서 가만 두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보나마나 정신병원보다도 더 좁고 자유스러움이 없는 감방에서 지낼 게 뻔했다.
나는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머리를 숙이며 합장을 해보이고는 병원문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구제할 길이 정녕 없을까요?”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여강에게 물었다.
“지금 정신병원에 있는 것이 구제이지. 그렇지 않으면 진짜 감옥소에서 지내게 되지 않겠어? 그리고 몇 년을 살지 그것은 재판을 받아봐야 알테고.”
“나무관세음보살!”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불렀다. 역시 내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그러나 박격포씨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아 안타깝네요. 차라리 재판을 받아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더 나을지 않을까요?”
어차피 정신병원에 가둔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였다.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한다면 차라리 그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현재의 불행과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은 아닐까?
혜가가 스승 달마에게 물었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폭설을 무릅쓰고 참선을 하고 있는 달마에게 제자가 되겠다고 애걸했으나 매몰차게 대하자 왼쪽 팔을 잘라 신심을 보인 혜가였다.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럼 그 마음을 가져와라. 내가 편하게 해 주마.
달마가 말했다.
혜가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빛이 보였을 것이었다. 편하지 않는 고통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 희망이 있었을 것이었다.
혜가가 느꼈던 그 희망처럼 타잔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스스로 감옥을 갔었더라면 정신병원에서의 고통을 없지 않았을까?
“좀 더 지켜봐야겠어. 오라버니가 잘 적응해 줬으면 하련만.”
나는 왜 여강이 올케의 말에 동조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은 죄를 감춘다고 해서 감춰질 문제가 아니질 않는가. 한 번 지은 죄는 죗값을 치렀을 때 희망이 보이겠지만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지뢰와도 같은 것이 아닌가. 더구나 죗값을 치르지 않기 위해 피한 곳이 정신병원이었는데 그곳은 피난처가 아니라 혹독한 지옥이었다.
“떠나겠다니 붙잡지를 못하겠군. 어디 정해놓은 곳이라도······.”
사흘 후, 내가 국사봉 농장을 떠나겠다고 하자 그녀는 몹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 해 가을에 왔다가 꼬박 1년을 보낸 후 이곳을 떠나는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제 넉 점의 탱화를 완성한 이상 큰 숙제를 풀어버린 듯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겠다는 것인지······.”
그녀는 거듭 물어왔지만 나는 그녀의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캠핑카 보리호를 몰고 국사봉 농장을 빠져나왔다. 뭐라고 말할 것인가? 아직 화실이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물었던 것일까? 사실 갈 곳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국사봉에 머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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