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49회)
병영면 낙산마을
노춘화 할머니(88)
노춘화할머니는 작천 내동마을이 친정이다. 노할머니는 스무 살 이전에 병영 낙산마을의 외갓집을 오가면서 늘 마주치는 한 총각이 있었다. 자주 마주치지만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라 얼굴한번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총각이 동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총각은 갑자기 길가로 데리고 가더니 함께 살자고 말했다. 깜짝 놀라서 본 총각의 얼굴은 처음 보았지만 왠지 싫지는 않았다. 그날부터 둘은 만나게 되었고 만나는 횟수는 점점 늘어갔으니 동네에는 저절로 소문이 났다. 그래서 친정어머니는 딸을 결혼시키자고 하게 되었고, 총각의 부모들도 좋다고 하여 둘은 결혼하게 되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8살이 많았다.
“무던히 그렇게 됩디다. 같이 살자고, 자기하고 살자고 헙디다. 근디 이삔게 맘에 들어서 사귀었재.”
곱게 늙으신 노할머니는 말씀도 곱게 하신다. 남녀가 유별했던 시절에 연애를 하며 알콩달콩 했을 댕기 딴 두 남녀의 속삭임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때가 생각나는지 노할머니가 활짝 웃으신다. 마치 불륜이라도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처럼 숨어 사랑을 했을 법한데도, 그때가 가장 즐거운 때였다는 듯 애기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애교가 가득한 노할머니의 표정에 소녀 같은 장난기가 넘쳐 보였다.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맘에 들어 했어, 그래서 살게 되었재, 근디 먹고 살것이 없은게 겁나 힘들게 살었어.”
시집은 가난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왜 그리도 먹을 것이 없었는지 굶기가 일쑤였다는 것이다.
“배 곯고 살었어. 논, 밭떼기도 없은게 넘의 일이나 해주면서 포도시 먹고 살었지.”
남편은 국민학교를 졸업하여 지식을 갖추었으나 가난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세상이치를 알고 트였지만 가난이 모든 것을 막아버렸던 것이다.
“어떤 날은 저녁도 굶고, 아침까지 굶고 있는디, 애들을 어떻게 갈치겄어, 그래서 큰아들은 장흥 고모가 데려다 키웠어. 못 갈치니까 어쩔 수 없이 보내야했지. 저는 책도 늘 볼라하고 공부도 할라하고 뭐든지 할라고 헌디 해줄수가 없은게·······애가 터지재..”
가난 때문에 자식들도 제대로 키울 수가 없었다는 노할머니다. 당시 고모네가 장흥의 큰 부자여서 데려다 키워 주어 그만치라도 배울 수 있었다면서 그렇지 않으면 전혀 가르치지도 못했을 것이라며 가난을 한탄한다.
“한번 씩 집에 오면 가기 싫어서 울고, 나도 울고 혔는디, 동생들이 밑으로 다섯이나 있는디 어쩔것이요. 저라도 잘 살라고 보내야재 .······참 먹고살기도 힘들었어.”
남편은 글씨를 잘 썼다. 동네에 상이나면 만사(輓詞)를 큰 붓으로 휘둘러 쓰는 일을 맡아서 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좋은 천이 귀해서 창호지나 빨간색 노란색 천에 글씨를 쓰고는 했다. 그런데 어느 집 초상에 강진부자 친척이 흰 강목 천을 보내왔는데 그날 밤 도둑 맞기도 했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 거의가 먹을 것이 없어 오로지 허기를 채우기 위해 한나절을 산에 가서 솔쿠(소나무껍질)를 벗겨오기도 하고, 취나물과 쑥으로 죽을 쑤어서 자식들을 먹였다는 노할머니는 그래도 자식들을 제대로 못 갈쳐서 지금도 마음이 아프단다.
“지금도 내 속이 아퍼서 자식들한테 뭐 해도라 소리를 못허겄어요.”
몸은 아픈데가 없으나 허리에 힘이 없어 걷기가 힘들뿐이라면서 오히려 더 오래 살까 걱정이라면서 웃으시는 노할머니의 큰아들이 현재 김규태 강진군의원이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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