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여년 전,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 8월 13일 왜적은 대대적으로 남원성을 공략했다. 남원성은 둘레가 8천2백 척의 석성이었으나 왜적은 빈틈없이 에워쌓은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왜적은 마치 달무리가 달을 에워싸고 있는 듯 남원성을 포위하고 있어 위급하기 짝이 없구나. 포성은 하늘을 진동하고 불빛은 대낮인데 낮과 밤이 같구나. 짐승같이 날뛰는 왜적들을 막아 싸우는 우리 군사들의 모습에 어찌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과 탄식이 터져 나오지 않으리.
산 위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조경남은 왜적이 남원성을 에워싼 모습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내노라하는 왜적의 무장들이 5만6천 대군을 이끌고 총공격을 해오는데 반해 남원성의 병력은 빈약했고 전주성에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했으나 감감소식이었다.
사흘 밤을 항전한 끝에 8월 16일 왜적은 드디어 남원성을 함락했다. 이 전투에 참가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남원성 외곽 만복사(萬福寺) 터 뒤쪽에 살던 도공들을 집단으로 사로잡아 사쓰마로 보냈다. 그는 무장이면서도 학문과 의술, 그리고 다도에 조예가 깊었는데, 그가 다성(茶聖 )이라 불리는 센노 리큐(千利休)와 다도에 관해 주고받은 50가지 문답이 지금도 전하고 있을 정도다.
그가 조선도공을 데려간 것은 다완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은 도자기가 아주 귀해서 번주들조차 나무 그릇을 사용하고 있었고 물통도 나무로 만들 정도였다. 그 때문에 조선에서 수입해간 다완은 금값이었다. 도공은 황금알을 낳는 오리였던 것이다.
남원성에서 끌려온 조선인은 박평의, 심당길 등 17성(申, 李, 朴 등) 80여명이었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사쓰마로 오는 과정부터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전하기로는 일본에서 조선에 보낸 군량선이 빈 배로 돌아가면 너무 가벼워 배의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해 이들을 선창 아래에 수용했다고 한다.
이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착한 곳은 가고시마 구시키노의 시마비라(島平)라는 인적 없는 해변이었다. 이때 살아남은 사람은 43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들은 일단 사람이 살지 않는 산으로 들어가 거처를 마련했다. 황무지에 밭을 일구고 오두막을 세웠다. 그리고 생활용기로 도자기를 구웠다.
그러나 원주민들은 이 외지인들을 달갑게 보지 않고 쫓아내려고 했다. 번번이 흙발로 일터에 들어와 그들의 작업을 방해했다. 이를 제지하려고 했으나 언어도 통하지 않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당시 시마즈 요시히로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래로 생사가 달려 있어 조선 도공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도 구시키노 항구 시마비라 마을 신사 입구에는 이들이 처음 표착했던 사실을 알려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그리고 해안가 절벽 위에 있는 신사에 오르면 태평양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진다.
단군을 모신 옥산궁
이들의 리더는 박평의였다. 박평의는 일행들에게 사쓰마번에 가서 탄원하자고 1603년 정월, 남부여대하고 길을 떠났다. 모진 추위 속에 무작정 길을 재촉한 지 얼마 안 되어 오늘날 미야마라 불리는 미산마을 근처에 당도했을 때 너나없이 탄성을 질렀다. 주변의 풍광이 고향 남원의 산천과 너무나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일행들은 멀리 갈 것 없이 여기에 살자고 했다. 당시 이곳 이름은 나에시로가와였다.
이들은 낮은 산자락에 둘러싸인 아늑한 이곳에서 땅을 일구고 도자기를 만들며 살았다. 그런데 밤이면 산자락에 불빛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점을 쳐보니 단군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밤마다 혼불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그곳에 옥산궁(玉山宮 )을 지어 단군을 모시고 고국을 향해 제사를 지냈다. 추석에는 다같이 조선 옷을 입고 고려병이라는 콩 섞인 시루떡을 차려놓고 조선말로 된 축문을 읽고 조선 노래와 춤을 추면서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지금도 양력 9월 15일이면 제사를 지내는데 제기와 장구, 징, 꽹과리 등이 모두 조선 것이라고 한다.
심수관가에 전하는 <사쓰마야키 도감(圖鑑)>에는 그때 부르는 노래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오나리 오나리쇼서(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일에 오나리쇼서(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라시고(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난(새더라도)
마양 당직에 오나리쇼서(늘 변함없이 오늘이소서)
이 노래는 청구영언(靑丘永言)에 나오는 ‘오늘이 오늘이소서’이다. 바로 여기에서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나왔다.
‘조선계열’이라는 신분
도쿠가와의 전투가 끝난 시마즈 요시히로 번주는 그제야 남원성 도공들을 기억해 내고 찾아보라고 했다. 관리가 이들의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고 번주에게 보고하자 번주는 이들을 사쓰마 성내로 들어와 살도록 하라고 다시 관리를 보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들은 한사코 떠나기를 거부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성내에는 남원성이 함락될 무렵 왜군의 앞장이 노릇을 한 주가전(朱嘉全)이란 자가 있으니 그런 배신자와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고향이 그리워서라고 했다. 이에 관리가 여기서 성까지는 불과 6리인데 여기서는 망향의 정이 달래지고, 성으로 들어가면 그게 안 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시바 료타로는 전하고 있다.
“저 언덕을 보십시오. 저 언덕애 오르면 바다가 보입니다. 그 바다 너머로 조선의 산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운이 나빠 조상의 무덤을 떠나 이 나라에 끌려 왔으나 저 언덕에 올라 거기에 제단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 아득히 먼 조국의 산하도 감응하여 그곳에 잠든 조상의 넋을 달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관리가 번주에게 보고하자 번주는 크게 감동하여 특별히 명을 내려 영지와 녹을 내리고 17개 성씨의 신분을 ‘조선계열’로 분류하면서 사농공상에서 ‘사’에 해당하는 사무라이 계급과 동등하게 대우하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안정된 삶 속에서 도자기 제작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조선도공들은 가마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도자기 제작에 들어갔는데, 번주는 사쓰마 백자를 만든 그들에게 이름도 내려주고 초대 장옥(庄屋)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번주는 대단히 기품있고 우아한 흰빛깔의 사쓰마 백자를 쇼군에게 헌상하고 또 여러 다이묘에게 선물해 사쓰마 백자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유홍준, 나의문화답사기 일본편1 규슈)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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