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연가
‘서거프다.’ 이 말은 서글프다와 배고프다의 합성어인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누이가 밭일을 나가고 텅 빈 집의 고요함, 그 끝에 스며드는 쓸쓸한 듯 고즈넉한 봄날의 소회를 이른 어느 이의 표현처럼 가시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려 살짝만 건드려도 우수수 떨어지고 마는 매화를 보노라니 나또한 春窮期의 소년처럼 서거프다.
요 며칠 때 아닌 꽃시샘 추위는 혹독했다. 목도리에 모자까지 챙겼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산보길에 벙싯거리는 매화는 생각지도 않은 횡재다. 최남단 제주도의 개화 소식을 접한 지 불과 며칠, 바지런한 행보의 봄은 파릇한 풀섶 더미마다 밥티 크기의 잔꽃들을 틔워놓았는가 싶더니 미처 녹지 않은 잔설 속에 피어난 雪中梅는 더더욱 향그러운 자태다. 두어 가지 꺾어다 토기병에 꽂아 향나무 소반에 앉혀두니, 오호라! 말 그대로 눈이 부시다.
‘그대 내 집에 드심만으로...... ’ 그저 고맙고 기꺼워 절로 중얼거려지는 꽃을 향한 獻詞다. 檀郞이라던가. 세월 거슬러 어느 여류시인의 싯귀에 등장하던 사모하는 님의 호칭이었다. 자못 흐뭇한 눈길로 매화를 보고 있노라니 문득 떠오른 게 옛 사내의 그 지칭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저자거리 시정잡배들 틈바구니에서 순백의 두루마기를 차려입은 선비를 발견한 감회랄까. 겨우내 커튼까지 드리워 주는 정성으로 키워낸 내 집 마루의 숱한 화초들이 일순 숨을 죽인다. 다홍빛 개발선인장의 요염한 웃음도 기가 꺾인다.
꽃꽂이 기법 따위의, 굳이 기교를 부리지 않아도 좋았다. ‘떨친다’가 온당하다. 온 실내를 가득 채우는 매향! 상대와 함께 바라보던 별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별에서도 그의 향기가 난다던가. 매화, 그 훈향에 실로 아름다운 이의 체취가 섞인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사무치게 아쉽고 그리워진다. 바람이 딱딱한 나무줄기의 순한 곳을 찾아내 어루만지면 보드라운 손길의 간지럼에 견딜 수 없어진 나무가 숨겨둔 제 속내인 양 보송보송한 새순을 밀어내듯 굳은 살 박힌 내 가슴의 가장 여린 부위에 스며들어 단숨에 열어젖히는 매향의 기세에 나는 그만 아득해지고 만다.
지난 겨울은 정말 지루했다. 쥐돌고래, 그물 속에 갇히면 상어처럼 몸부림치지도 참치처럼 거세게 저항하지도 않는다는 어족이란다. 그저 순명하듯 조용히 체념할 뿐이라니. 장장 6분 동안이나 잠수가 가능할 정도로 참을성이 강하지만 어떤 스트레스엔 단 몇 초 만에 익사하고 만단다. 나또한 운명이라는 그물망에 저항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던가. 쥐돌고래에게 가능하다는 수심 200m는 간헐적으로 찾아와 나를 빠트리는 절망의 깊이이기도 했다. 목 조르는 삶의 답답증을 무던히 잘 견뎌내다가도 어느 날은 아주 사소한 건드림에도 발작하듯 반응했다. 그 후유증이었을까. 내 속의 모든 장기들이 파열하는 듯한 고통에 몇 달을 꼬박 살아있으되 이미 죽어버린 시신처럼 무감각하게 지내는 상태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 피난처 삼기 좋은 게 TV와 책이었다. ‘저 정도 밖에 쓰지 못 할까.’ 지척의 인연끼리 이리저리 얽혀 꼬이는 하나같이 지리멸렬한 내용일색의 연속극은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면서도 TV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텔레비전과 책 보기를 한꺼번에 하느라 화면 한 번, 지면 한 번이었으니 사실 나는 그 어느 것에도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 셈이다.
‘내 속에도 악마 같은 것이 들어 있어요. 나는 그 악마를 조르바라고 부릅니다. 속에 있는 조르바는 나이를 먹는 걸 싫어해요. 나이를 먹은 것도 아니고 먹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먹지 않을 겁니다. 바깥 조르바는 아이고, 가엾어라. 장구배에다 흰 머리카락도 좀 있습니다. 이 조르바가 무얼 할 수 있겠어요?’
이런 대사에나 공감하였을까, 검은 표지의 ‘희랍인 조르바’는 이불 속에서 귀퉁이가 다 헤졌다.
‘물어라 물어, 니 맘껏 물어뜯어라.’ 갓 젖 뗀 코카스페니엘 강아지, 새 사냥용이라더니 녀석의 齒力은 대단했다. 또 가끔은 녀석의 스파링 상대, 아니 뼈다귀가 되어 주었다. 하여 그렇잖아도 거친 내 손은 상처투성이가 됐다. 그러고도 물리치지 못한 무력감에 긴 머리를 댕강 잘라 보기도 했다. 욱신거림과 흔들림에도 몇 년을 방치했던 앞니를 용감무쌍 뽑기도 했다.
속 주인에게 학대당한, 거울 속의 겉나는 참으로 서거펐을 것이다. 몰골만 서거펐을까. 한 치쯤 짧게 조립해 끼워진 假齒에 새나가는 발음이 아다다가 따로 없다. 게다가 그 지독한 이물감이라니!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무어 이따위 삶이 다 있어. 목울대에 걸리는 치사한 느낌을 꾹꾹 참으며 먹어야 하는 밥, 그것은 자주 체했다. 밥숟갈 빼기가 무섭게 미련퉁이인양 잠을 청하고 그러다 깨면 손끝이 얼얼하도록 리모컨과 한 구절도 들어오지 않는 책과 씨름하고, 그것도 질리면 사람들 잔뜩 불러 이박 삼일 치다꺼리에 매달렸다. 그 끝에 복병처럼 찾아든 몸살은 이불 속에서 죽은 듯이 누워있을 좋은 핑계였다.
그러다가도 딸이 치는 브라암스에 가슴이 저렸다. 내 가슴을 찌르는 유일한 뜨끔거림이었다. 한편 나약함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런 어미를 보는 딸의 마음인들 오죽했을까. 同病相憐, 체 한 제 손 끝 하나 따줄 줄 모르고 도망가는 겁쟁이 엄마라고 핀잔주던 딸. 어찌 제 손 끝뿐이랴. 세상에 대패한 듯한 무안함에 어미는 마당 나서기도 꺼려질 지경인 것을. 정작 해야 할 일을 태산처럼 미뤄 두고 대신해 아무 쓸모없는 일들을 양산해 매달리는 엇박자의 삶.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속에서 대상 없이 반복되는 그 말도 싫었다. 봉합사가 허술한 바느질처럼 움쩍 할 때마다 터지고 마는 솔기랄까. 바라노니 세상일이 화분 가꾸기와 같다면 오죽 좋으랴. 요행 盆과 궁합이 맞았던가. 별 수고 기울이지 않아도 사년을 키우는 동안 제법 튼실해진 가지다. 그러나 올곧게 살 오른 사철나무가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일, 그에 지쳐 제 몸 둥그렇게 말고 아늑한 굴을 찾아 동면에 드는 종족들처럼 나도 지난겨울 내내 어디선가 긴 긴 잠을 청하고 싶었던가.
3월은 어느 새 중순을 치달으니 부정할 수 없는 봄이다. 그만 깨어나야 된다. 어설픈 死者놀음은 이제 그쳐야 한다. 무엇인가 그립고 아쉽다는 것, 한없이 배고프고 서글픈, 와락 몰려드는 이 서거픔은 산 자의 건강한 증세려니 잡혀있던 마술에서 깨어나기 위한 주문인 듯 나는 자꾸 옛 시구를 외운다. 虛廊風掃淨, 내 맘 속 티끌들을 봄바람이여 부디부디 말끔히 쓸어 버려다오. 불현듯 깨어난 긴 잠에 욕심껏 기지개를 켠다. 허기와 부신 봄햇살에 아직은 설 깬 잠이려니 뒤뚱거리는 갈 짓 자 걸음. 어쨌든 나는 또 새로운 삶의 노래를 부르리라. 혹한 속에서 이토록 고운 꽃망울을 틔우신 어여쁘신 님, 오늘 내 집에 황홀히 드신 白梅에게 바치는 이 서툰 매화연가를 시작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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