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사람 사는 이야기> 미래위한정책개발연구소 소장 박병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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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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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 미래위한정책개발연구소 소장 박병춘 씨
그릇된 일과는 야합하지 않는 가치와

남에게 피해주지 않는 생각으로 사는 사람

  

우리 살면서 야합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 야합이란무엇일까?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먼저 유래를 알아보자. 야합(野合)이란 말의 유래를 보면 중국 공자(孔子)의 아버지 숙량흘(淑梁紇)은 같은 동네에 사는 안징재(顔徵在)라는 처녀를 사모했다. 두 사람 간의 나이 차이는 무려 40세나 되었다. 이런 두 사람이 서로 연정을 품고 만났는데 동네에서 나쁜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두 사람은 이웃 주민의 눈을 피해 멀리 들판으로 나가 만날 수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들판에서 급기야 사랑을 나누게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공자가 태어났다 한다.

중국은 산이 없고 드넓은 들판뿐이다. 이런 모습을 본 후세 사람들이 들()에 나가 두 사람이 합()했다고 하여 野合(들씹)이라고 불렀다.

  야합이라는 말이 그만큼 추잡하고 불순하다는 뜻이다. 정치권에서 등장하는 야합(野合)이라는 말은 두 단체 간, 혹은 두 사람 사이에 매우 불순한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서로 어울리고 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야합이란 말이 생겨난 배경만 봐도 이 말이 얼마나 불순한 의도가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야합이라는 말은 세계 4대 성인중 한사람인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로 인해 생겨난 말이다. 그러나 입장이나 생각이 다르더라도 뜻을 한데 모으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뜻이 온당한 뜻이 아니라면 정도(正道)가 아닐 것이다. 정도가 아닌 오로지 목적달성을 위해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야합(野合)'이라 한다.

요즘에는 주로 정치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마천의 <사기(史記)>"공자의 부모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라고 나온다.(紇與顔氏女野合而生孔子(숙량흘은 안씨녀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 숙량흘은 70세 때 17살 된 안씨녀(顔氏女)에게서 공자를 낳았는데 정상적인 혼인관계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합(野合)'이라는 말의 유래이다. 박병춘 씨는 정치에서 그런 야합을 모르는 사람이다.

박병춘 씨는 누구?

누구에게나 빚을 지는 게 없고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삶을 사는 사람

  박병춘 씨는 평소의 삶에서 올바른 삶이란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그릇된 일과는 야합하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다. 누구에게나 빚을 지는 게 없고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삶을 사는 사람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검은 돈이나 야합하지 않는 후회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다. 남을 해치거나 피해를 주는 일 없이 올바르게만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면서 지역 발전에 봉사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는 70년경에 서울 전업사를 잠시 운영했다. 그것은 매형이 정치는 그만 두고 사업을 하라고 도와 주셨기에 그 일을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회적 현상 때문에 전업사를 그만 두게 된다. 1970년에 강진로타리클럽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 활동 중에 JCI 청년회의소 봉사클럽이 있음을 알고 광주에서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국제 청년 회의소의 여건 조성을 위해 알아보고 강진에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창립을 시작했다.’735월에 33명의 회원을 구성하여 창립 했다. 74년 제2대 강진청년회의소 회장을 역임했다. 그 후 강진삼세의원 원장 김재려 씨의 권유로 청년지역사회개발 상록회를 창립하는데 협조를 했다. 중앙회장 이종웅회장을 참석하게 하여 강진상록회창립에 힘썼다. 당시 박병훈 씨가 상록회 중앙회 부회장과 전남지역 대표를 겸하고 있어 영암, 나주, 광주, 구레, 해남 등도 클럽이 창립하도록 독려 했다. 박병춘 씨는 1974년에 강진군요식업조합장을 역임했다. 75년에 마량항 바다낚시 관광계발포스터를 제작해서 전국에 배포하면서 마량만 바다낚시개발에 힘썼다.

1987,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선거 때는 강진완도통일민주당(대통령후보 김영삼) 선거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지구당직무대행 위원장도 역임했다. 1992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선거(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 때도 그 직책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1992년 강진군민주산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93년에 호남대학교행정대학원을 수료했다.

97년에는 국민신당에 참여하여 영암장흥위원장과 이인재 대통령선거 영암장흥대책위원장을 역임했다. 후에 새천년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했다.

박병춘 씨는 강진읍에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아버지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장남으로 태어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야 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의사이셨다. 강진에서 계시다 한지 의사로 발령을 받아 근무를 하셨다. 그 때만 해도 의사가 많지 않고 낙도나 시골은 의사가 거의 없어서 한지 의사를 파견하는 제도가 있었다. 옛날 시골의 약방처럼 그런 제도였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의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그 지역에서 의사 활동을 하셨다. 그 지역이 제주도였다. 제주에서 서귀포 해물리 바닷가 마을로 가셨다. 어머니와 함께 가서 생활했다. 의사생활이라지만 너무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그곳에서 가족이 함께하는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와 박병춘 씨는 다시 강진으로 오게 되었다. 아버지께서도 생활이 어려워지자 그곳의 생활을 정리하고 강진으로 오시게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했다. 제주에서 강진으로 배를 타고 오는 도중 폭격기를 맞아 배가 바다로 수장 되고 말았다. 그 때 아버지께서는 그만 돌아가시게 된다. 유치원을 다닐 무렵의 일이었다. 그것이 아버지와 추억의 전부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외가에서 성장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어린 생각에 고숙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고 싶지 않는 마음이 생겼다. 모든 환경들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고등학교를 포기한 것이다.

195810월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이 들었든지 광주로 올라갔다. 그는 이유가 있었다.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에 광주를 간 것이다. 당시 전라남도에 호남일보가 있었는데 그 신문에 기사가 나와 있었다. 민주당 대표 최고위원인 조병옥선생님에 대한 기사였다. 조병옥박사가 도당대회 참석차 광주에 온다는 기사 내용을 보았다. 그 기사를 본 박병춘 씨는 나도 사회에 참여해서 활동을 해 보아야겠다고 생각을 먹었다. 그 때 나이가 19살쯤이었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먹었을 가 싶기도 하다. 남들이 생각하지도 못한 일을 생각하고 결심한 일이기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시절에, 지금 생각해봐도 결심이 확고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광주에 가자마자 택시를 타고 <동명호텔>로 바로 갔다. 조병옥 당 최고 위원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별 면담을 요청을 했다. 주변사람들이 어린애가 이런 곳에 오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래도 반복해서 박사님을 만나야겠다고 소리를 지르는 과정에서 주변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으신조병옥박사가 나오게 되고 전 후 이야기를 들으시고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박병춘 씨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하고 가지고 갔던 하얀 천을 호주머니에서 꺼내어 민주당 지지혈서를 썼다.

당시 조병옥 최고 위원장께서 머리를 쓰다듬고 하시는 말씀이

메마른 대지위에 민주주의 새싹이 돋고 있는 증표다.” 하시면서 고향과 나이를 물어 들으시고 강진이라는 말에 그 때 양병일 의원(당시 민주당 전남도당위원장) 지역구라고 말하며 찾으시고 보통 생각을 하는 아이가 아니니 양위원장께서 특별히 관리를 해달라고 말씀하셨다.

그 때부터 정치에 입문하게 되고 5일 후 양위원장께서 찾아오셔서 지금의 영랑생가의 서재에서 기거하며 살게 되었다. 한 때는 경찰의 요주의 인물이 되어 여기저기 피해 다녔다. 689월에는 강진향교로 잠시 피신을 하기도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께서 3선출마를 하셨고 조병욱 박사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었다. 부통령으로는 장면 씨가 나왔다.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다가 지명수배를 받고 경찰에 입건되기도 했다. 602월에 향교에서 내려와 경찰에 연행되었을 때 강진경찰서장으로부터 공산당원이라고 호댄 지탄을 받기도 했다. 권총을 빼서 머리에 대고 협박도 했다. 다음 날 장흥검찰지청으로 이송 되어 여러 가지로 회유책을 썼으나 변화가 없었다. 끝내 구속 되었다 방면운동으로 풀려나오게 되었다. 그 뒤 강제로 군대입대를 하게 되었다.

그는 2000년 성하대학교평생교육원이 생기자 1~4기까지 지역사회 개발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학생들의 모집부터 운영하는 면까지 많은 노력으로 협조를 해냈다.

 

박병춘 씨는 김영삼 대통령과는 깊은 인연이 되는 일이 있었다. 1987년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선거 때 김영삼 당시 후보가 나주에 선거 차 유세를 위해 방문했는데 주민들로부터 개란 투석 등 심하게 반발하는 기세의 이유로 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과정이 있었다. 그 때 박병춘 씨도 당직자이기에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 때 어느 나이가 드신 분께서 어쩌노 이를 어쩌노하기에 다가가서 여쭈어보니 본인이 김영삼 후보의 아버지라고 말씀하셔서 자기소개를 하고 차로 섬진강 휴게소에 모셔다 드리면서 깊은 인연이 되었다. 13년의 세월동안 한 달에 3~4번씩 오가며 만남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분이 김홍조 씨이었다. 마산에 오가며 강진에도 한번 오셨는데 김영삼 대통령 취임 중이었다. 항상 찾아가면 박 위원장 왔나하시곤 했다. 식사를 꼭 챙겨주시며 자리를 같이하는 인자함도 계셨다. 민정수석실 김홍길과 정무수석에서 전화가 오가는 관계도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 아버지께서 여러 가지 추천사항으로 정무실과 민정수석실에서 여러 차례 권유가 있었지만 박병춘 씨는 모든 것을 반대하고 나서지 안했다. 지금도 그 때의 정치인들과는 교류를 하고 있다.

김영삼 대통령께서 43일 퇴임하시고 상도동 자택으로 가신 후 불러서 가지 않는다고 했으나 주위의 권유로 찾아뵈었다. 그 때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지난 60여년 넘게 정치와 함께 하면서도 검은 돈과 비유와 정치적 야합도 하지 않고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후회 없이 살아왔다. 누구에게나 빚진 것 없이 사람을 없인 여긴 적 없이 피해주지 않고 삶을 살았다. 앞으로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런 그의 마음의 빛이 빛나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정관웅-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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