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유학 시절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하고 읊으셨습니다. 저는 남루한 저를 키운 건 팔 할이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2017년 11월 23일 한국교총 창립 70주년 기념식 축사
이낙연은 전남 영광 법성면의 자그마한 분교, 삼덕초등학교를 다녔다. 전체 학생 수가 2백 명 남짓 되었을까. 교실이 3칸이었고, 한 칸에서 두 개 학년이 수업을 같이했다. 칠팔십 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마룻바닥에 앉아 북적대며 공부했다. 교원도 적어 교장 선생님이 직접 수업에 들어오기도 했다.
이런 시골에 도시 출신의 선생님이 오셨다. 이낙연의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인 박태중 선생님이다. 군대를 갓 제대한 여드름투성이의 20대 선생님은 소년 이낙연의 영민함을 알아보고는 다짜고짜 ‘너는 반드시 광주서중학교에 진학해야 한다’고 했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밑으로 동생이 다섯이나 있던 처지의 이낙연에게 광주 유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은 당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과목별로 목표를 정해 집중 훈련에 들어갔고, 미리 정해놓은 점수에 미치지 못하면 매를 들었다. 공부를 잘 하면서도 매일 회초리를 맞는 게 억울하고 아파서 하루는 이낙연이 ‘제가 언제 광주서중 간다고 했습니까?’라고 항변해 봤지만 선생님은 조금도 그 뜻을 꺾지 않았다.
박태중 선생님은 일주일에 두세 번 쯤 간식거리와 수련장을 들고 가정방문을 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박 선생님의 지지와 응원을 업고 이낙연은 중학교 시험을 보기 위해 광주로 향했고, 박 선생님 댁에서 먹고 자면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평균화되기 이전인 1960년대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낙연이 목표로 한 광주서중은 호남 수재들이 모이는 일류학교로 평가되던 곳이다.
이낙연은 애초 가고자 했던 광주서중에는 합격하지 못하고 후기에 도전해 광주북중에 입학했다. 그것은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이를 ‘원점’이라고 표현했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이셨던 박태중 선생님은 시골뜨기였던 저에게 넓은 세계로의 꿈을 심어주시고, 저를 도시 중학교로 진학시켜 주신 은인이십니다. 저는 국회의원이 된 이후에 후원회장에 박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제가 박선생님을 모신 것은 그분이 후원금을 주시거나 모으시는 데 적합해서가 아니라, 제 인생의 원점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제 인생의 원점을 잊지 말자는 생각에서 박 선생님을 후원회장으로 모신 것입니다.” (이데이 뉴스 2014.8.16.)
1964년. 열세 살 소년의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이낙연이 만난 광주는 신세계였다. 고향 영광에서 광주까지 거리는 고작해야 4~50킬로미터였지만 시골과 대도시의 차이는 엄청났다. 이낙연은 광주에 가서 알게 된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 교장 선생님은 수업을 하지 않는다는 거였고, 둘째는 분교에서 반이 없다 보니 급장만 있었는데 도시에선 학년마다 반이 나뉘면서 반장이 있었다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학생들도 의자에 앉아 공부한다는 사실이었다.
광주의 생활은 흥미로웠지만 낯설었다. 친구도 집도 익숙하지 않으니 마음 붙일 곳이 없었다. 또래보다 키도 작고 체구도 왜소했는데, 싸게 하숙 치는 집에 들어간 탓에 영양 섭취도 부족했다. 이낙연은 2주에 한 번씩 시골집에 가서 하룻밤을 자고 용돈과 먹을거리를 챙겨 광주로 다시 향했는데, 집을 떠나기 싫어 매번 길모퉁이에 서서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추억⌟의 한 단락이다.
아버지께 들키면 야단을 맞으니까 아버지가 보시지 않을 때만 울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시골집을 떠날 때마다 아버지가 몰래 운다는 것을 어머니가 눈치채셨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제게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광주 가기 싫으면 가지 마라. 내가 자전거 사줄게. 법성으로 학교가거라.”
그래도 아버지가 무서워 광주로 갔다. 광주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낯선 곳에서도 기댈 언덕이 생겼다. 광주북중 1학년 때의 담임을 맡은 성종선 선생님이었다. 성 선생님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제자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밥상을 차려줬다. 이낙연은 훗날 그 시절, 선생님 댁에서 먹었던 따뜻한 놋그릇에 담긴 쇠고깃국, 고소한 김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성 선생님은 밥상에 마주 앉아 이낙연의 가정 사정을 묻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고향에 갈 때 가지고 가라며 감이나 쇠고기를 싸주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또 한 분의 은사를 만났다. 광주일고2 때 국어를 가르치고 고3 때는 담임을 맡은 김정수 선생님이다. 김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 나이에는 잘 먹어야 하는데 내가 가난해서 이것밖에 못 준다.”라며 돼지 불고기를 구워주었다. 밤이면 마실을 나와 골목으로 나 있는 이낙연의 하숙방 창문을 두드리며 “공부하냐.” 제자의 안부를 묻곤 했다.
인생을 한 단어로 정의하라고 하면 이낙연은 ‘만남’으로 정리하고 싶다고 했다. 많은 만남이 쌓여서 인생이 이루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진다고 했다. 그에겐 세 분 선생님의 만남이 그랬다. 이낙연은 “중요한 고비마다 선생님들이 크게 도와주셨고, 올바른 길을 제시해 주셨고, 거의 정기적으로 고기를 먹여 주셨다.”라며 감사를 표했다. 그분들의 존재가 학교를 떠나서도 인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학생들 앞에서 고백했다.
“여러분의 등 뒤에서 여러분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어른들이 계신다는 것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 이런 말을 하냐면 저도 인간인지라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바보 같은 실수를 하는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그런 분들이 떠올라요. 어렸을 때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은 제가 어떻게 자라기를 바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 장학금을 주신 분들게 보답하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분의 인생에 기둥으로 삼기 위해서라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전남도청 인재육성장학금 수여식 격려 말씀 2016.10.28.)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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