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으로 널리 알려진 정약용 선생. 선생의 마지막 호는 사암이다. 사암이란 호는 후세에 성인(聖人)이 나타나 자신의 저서를 본다 해도 자신의 주장이 그르지 않을 것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지은 이름이다.
정약용의 호는 다산(茶山)임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다산 정약용, 또는 정다산의 이름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정약용의 관련된 모든 명칭 또한 다산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학, 다산초당, 다산 간철집, 다산학 사전, 다산문답, 다산박물관, 다산시문집, 다산연구소, 다산학단, 다산학술문화재단, 다신계 등…
그런데 이번에 정해렴 저자가 ‘사암 정약용 전기’를 발간하면서 정약용의 호를 다산이 아닌 사암으로 사용했다. 정해렴 저자는 1939년 경기도 파주에서 출생하여 출판계에 입문한 인물로 1.000여 권의 책을 편집 교정 편역했다.
저자는 사암 선생이 귀양에서 풀려 집으로 돌아온 몇 해 환갑이 되던 1822년에 써놓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집중본과 광중본의 서술을 신뢰해 주로 의존했다고 한다. 사암의 현손이자 저자에게는 역시 집안의 조부가 되는 정규영 선생이 편찬한 사암선생연보를 참고해서 사암의 일생을 기술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너무나 일반화된 ‘다산’이라는 호칭 대신 정규영 선생이 쓴 ‘사암’이라는 호를 쓰고자 했다는 것이다.
⌜자찬묘지명⌟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그것은 장약용이 직접 작성한 자신의 묘지명으로 유배지 강진에서 1818년 해배된 지 4년째에 회갑년을 맞아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생애를 자찬했다. 굴곡 많은 자신의 생애를 타인의 손에 의해 왜곡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고,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 이룩한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자찬묘지명⌟은 집중본과 광중본의 두 종류가 있는데, 집중본은 문집에 수록하기 위해 자세하게 쓴 것이고, 광중본은 무덤 앞에 파묻기 위해 간략하게 기록한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정약용은 유년시절부터 ⌜자찬묘지명⌟을 쓸 당시까지 시간의 순차에 따라 자신의 행적과 이력을 자세히 기록하고 가계와 가족 관계 등을 기록했다.
정약용은 자신이 연루된 크고 작은 사건들의 전후시말을 잘 드러냈는데, 천주교와 관련된 사건들의 진상을 밝혔고, 임금 정조와의 각별했던 관계를 일화중심으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가장 잘 두드러진 특징은 전체 분량의 3분의 1이 저서의 목록을 일일이 제시하고 중요한 저술에 대해서는 그 개요를 설명했다.
저자는 ⌜연보로 본 다산 정약용⌟을 토대로 또 자신이 ⌜다산논설선집⌟을 만들 때 이미 작성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 연보⌟를 참고하면서 ⌜사암 정약용 선생 연보⌟를 40여장 분량으로 작성해보았는데, 이는 사암 선생 전기를 쓰면서 연대의 착오를 줄이려 함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사암이야말로 우리나라 최고 시인이자 학술적으로도 당대 한 중 일에서 최고 수준의 학자였으며, 어려서부터 중국 최고 시인인 두보의 시를 모방했고 중국 고전 <시경>의 시를 롤모델로 삼았는데, 대신 이백이 보여주는 음풍농월을 극도로 배격하고 사회 교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사암 학문은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 독일 작가 괴테 정도나 사암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사암 정약용 선생 연보⌟를 꾸며놓고 비로소 사암의 일대기를 썼다는 저자는 민병산 전기 작가의 말을 인용했다.
“전기를 쓰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 학자”라면서 “왜냐하면 학자는 그가 이룩한 학문의 요점을 알기 쉽게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라는 말.
저자가 이렇듯 서문에서 밝혔듯이 ⌜사암 정약용 전기⌟는 제1부 어린 시절과 공부할 때, 제2부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다, 제3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 제4부 실학을 완성하다로 되어 있다. 제3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는 신유옥사로 인해 장기에서의 귀양살이와 강진의 귀양살이로 시작된다. 다산학 산실 다산동암과 제자들과 두 아들에게 내려준 교훈, 사암의 두 아들 교육법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렇다면 제3부 18년 동안의 귀양살이를 어떻게 시작했고 묘사했는지 알아본다.
강진의 귀양살이
순조 1년(1801) 11월 22일 나주 율정에서 사암 형제가 헤어져 중형 정약전은 서쪽으로 흑산도를 향해 떠나고, 사암은 남쪽으로 강진을 향해 떠나고 영암을 거쳐 11월 23일 강진읍에 이르렀을 것이다. 사암이 강진에 이르러 귀양살이할 집을 찾아보았으나 모두 문을 닫고 아무도 만나주지 않았다.
그러다 겨우 동문 밖 밥을 파는 노파의 주막집에 머물 수 있었다. 사암은 이 밥 파는 노파의 집에 살며 ‘나그네 신세’라는 시를 지었으며, 순조 3년 겨울 12월 10일에 이 주막집의 당호를 사의재라 짓고 사의재기도 지었다.
사암이 이렇게 강진에 이르러 겨우 주막집 노파로 보수주인(保授主人)을 정하고 있을 때인 12월 10일에도 악인들은 정약전과 정약용을 다시 붙잡아다 조사 신문하자는 요청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암은 이 신유년 한해 동안 장기로 유배되어 귀양길 왕복 1600리를 갔다 오고, 다시 강진 귀양길 천릿길을 내려오면서 액운의 40세를 보내며 천운(天運)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는 곡산부사로 선정을 베풀고, 형조참의로 억울하게 12년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한 죄수를 무죄로 풀어주게 하고, 운수 사납게 사람을 죽게 한 살인 죄수를 살려낸 음덕(陰德)으로 목숨을 스스로 지켜 살려낸 것이기도 했다.
사암은 귀양지 강진에서 악운의 신유년 연말을 보내고 임술년 새해를 맞이했다. 이 임술년은 순조 2년(1802)으로 이제 사암의 나이도 41세가 되었다.
이 순조 2년 1월 18일에 사헌부 장령 한영규가 또 정약용 형제를 의금부에 붙잡아다 엄중히 신문하자고 요청했다. 1월 20일에는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없애라고 정순왕후가 명령을 내렸다.
2월 5일쯤에 어린 종 석(石)이가 강진에 이르러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2월 7일쯤에 돌아가는 석이 편에 두 아들에게 쓴 편지를 부치고, 또 작은아버지 정재운에게 시로 쓴 편지를 보냈다. 이때 17세인 작은아들 학유에게는 “필법이 차차 나아지고 문리(文理)도 또한 나아감이 있다. (…) 폐족으로서 글을 배우지 않고 예의도 없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모름지기 보통 사람보다 1백배의 공력을 더 들여야 사람 축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아버지의 마음을 신신당부하고, 큰아들 학연에게는 “아무쪼록 4월에 말을 사서 타고 오도록 하여라. 그러나 헤어질 생각을 하니 벌서부터 마음이 괴롭구나”라며 육친의 정을 드러냈다. 이 편지에 말을 사서 타고 오라고 한 것은 아마 사람이 공부하고 저술할 때 꼭 필요한 책을 실어 오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 2월 17일에 두 아들에게 쓴 편지에는 “폐족 중에서 더러 기재(奇才)가 많이 나오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과거 시험공부에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니, 절대로 과거에 응시할 수 없다 하여 스스로 주눅 들지 말고 경전에 힘과 마음을 써서 사람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를 바란다”라고 하며 아들들에게 공부할 것을 다그치면서 어쩔 수 없는 잔소리꾼 아버지 노릇을 한다.
또 그 뒤에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고려사에 대한 공부는 아직도 착수하지 않았느냐? 젊은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생각과 통달한 생각이 없으니 한탄스럽구나! 네 편지 가운데 모든 의심스럽고 모르는 부분을 물어볼 곳이 없다고 한탄했으나 정말로 네 마음에 참으로 의심이 나서 견딜 수 없고 생각이 나도 감내할 수 없다면, 왜 조목조목 기록해서 인편이 날 때 보내오지 않느냐? 부자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는 것 또한 즐겁지 않겠느냐?” 하면서 큰아들을 제자로 삼을 뜻도 은연중에 내비쳤다. 이때 사암은 아들이라도 제자로 삼지 않으면 괴로워서 견딜 수 없었을 듯하다.
2월 27일에도 악당들이 정약전 정약용을 엄중히 신문하라고 아뢰는 일이 있었고, 또 2월 27일과 3월에 들어서도 같은 상주가 계속 있었다.
저자는 사암의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을 군더더기 없이 서술하고 있다. ‘순조 3년 겨울 12월 10일에 이 주막집의 당호를 사의재라 짓고 사의재기도 지었다’란 대목만 보아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은 사의재와 사의재기에 대한 설명을 얼마든지 덧붙일 수 있었는데도 단조로울 만큼 단 한 줄로 끝낸다. 사암 정약용의 전기라고 저자가 말한 만큼 방대하고 또 방대한 사암의 일대기를 쓰겠다고 나섰다면 쭉쭉 치고 나가는 발 빠른 구성이 아니고선 다 담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강진에서 얻은 첫 제자 황상
이 순조 2년(1802) 봄에 이안묵(李安默 1756~1804)이 강진현감으로 내려와서 사암을 무고했으나 그 사실이 밝혀져 탈이 없었다. 이 이안묵은 신유옥사 때 기록관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순조 4년(1804) 죄를 얻어 절도(絶島)에서 죽었다.
여름 4월 10일 경에 큰아들 학연이 강진의 아버지 배소(配所)로 근친하려고 소내 여유당을 떠나 4월 15일쯤 강진에 이르고, 사암과 같이 구강포와 백련사를 유람하고 나서 소내로 돌아갔다. 학연은 아버지가 편지에서 당부한 대로 말을 사서 타고 오면서 아마도 아버지의 저술과 공부에 필요한 책을 여유당에서 싣고 왔을 것이다.
여름 5월 16일 악당들이 또 귀양 중인 사암 형제를 의금부에 불러다 엄중히 신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강진에 이르러 어느 정도 심신이 안정되자 예서를 읽고 주를 달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10월 10일에 15세인 황상(黃裳 1788~1863)이 사암의 제자로 들어와 공부를 배우기 시작하고, 사암의 아버지 정재원의 친구인 윤광택(尹光宅 1732~1804)은 이 무렵 조카 윤시유를 시켜 자주 물건을 보내고 안부를 물으며 위로한다.
저자는 사암의 1호제자 황상을 언급하면서 딱 한 줄을 허용하고 있다. ‘10월 10일에 15세인 황상이 사암의 제자로 들어와 공부를 배우기 시작하고…’가 그것이다. 저자가 다시 황상을 언급한 대목을 살펴본다.
‘백련사에서 아암 혜장과 만나다’란 소제목에서 ‘가을 9월 16일 김세준과 황상을 데리고 정수사를 유람했다’와 ‘아암 혜장이 또 고성사로 와서 사암 부자, 황상과 시를 지었다’와 ‘12월 24일 정학연은 아암‧황상과 같이 두륜산 대둔사로 가서 표충사에서 자고, 아암은 상원으로 갔다’란 대목으로 아주 짧게 황상을 언급한다.
저자는 소제목에서 ‘강진에서 얻은 첫 제자 황상’이라고 했던 만큼 황상이란 인물의 비중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몇 마디 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미 소제목으로 황상의 비중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제5장 제자들과 두 아들에게 내려준 교훈편에서 가장 먼저 ‘황상에게 준 중요한 교훈’ 내용이 나온다.
사암은 황상에게 산석이란 자(子)를 지어주고, 삼근계를 교훈으로 주었으며, 추사 김정희에게 지금 세상에 이 같은 작품은 없다라는 격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달(上達)과 하달(下達)이란 교훈을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다.
과연 황상이란 인물은 누구인가? 황상은 사암이 자랑할 만한 제자이고, 그 누구보다도 사암의 가르침을 그대로 받든 제자이며, 나중 조선 문단에서 인정을 받을 만큼 크게 이름을 날린 제자이다. 황상에 대한 얘기를 짧게 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황상이 지금의 대구에 있는 백적산으로 간 것은 다산이 해배되어 강진을 떠난 1818년이었는데, 1849년 예순 둘의 나이에 홀로 지낼 수 있는 조그만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한 칸짜리 방으로 된 일속산방이 완공된 것은 1855년이었으므로 6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일속산방은 본집에서 40m 쯤 위로 올라간 북쪽 공암(蚣岩:지네바위)에 지어졌는데, 비가 올 때면 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황상은 일속산방의 네 창문에 이름을 지었는데 동쪽은 석영옥(石影屋)으로 바위 그림자란 뜻이고, 서쪽은 노학암(老學庵)으로 늙어 배우는 초라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남쪽은 일속산방(一粟山房)으로 산 속의 좁쌀만한 방이라는 뜻이고, 북쪽은 만고송실(萬古松室)로 오래된 소나무 안방이라는 뜻이었다.
황상이 일지암을 찾아가 초의를 만나고 온 직후 초의가 화답한 ⌜일속암가⌟를 보면 일속산방이 어떤 집인지 엿볼 수 있다.
-백적산은 깊은 산이어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이 드물지만 오색 빛깔의 무늬가 있는 바위에 띠를 얽어 집을 짓고 안개 노을을 곁에 두었네.
초의는 이렇게 시작되는 ⌜일속암가⌟를 보낸 후 자신의 제자인 소치(小癡) 허련(許鍊)으로 하여금 <일속산방도>를 그리게 해 황상에게 보냈다. 나중에는 일속산방만을 그린 <백적산방도>를 보내기도 했다.
정학연도 ⌜일속산방기⌟를 지어서 보냈는데 그 내용 일부분에서 일속(一粟)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천하의 크기가 몇 만 리나 되는지 알지 못하고 인물과 초목과 금수(禽獸)가 또 몇 천만이 되는지 모르는 것을 일러 대괴(大塊)라고 한다. 그러나 푸른 바다에서 보면 한 줌 흙일뿐이니 황자(黃子)가 사는 산도 궁벽하게 바닷가에 있어 좁쌀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 황상 또한 한 톨 좁쌀에 지나지 않지만 공경과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니 일속 그 속에 광대무변한 우주가 있다.
김류 또한 ⌜일속산방설⌟에서 일속산방이 비록 좁쌀 한 톨 만큼 작을지라도 그 속에는 세계가 있고 우주가 있으며 자연이 펼쳐지고 있다면서 불가의 겨자씨와 장자의 손가락에 비유했다.
요컨대 다산의 가르침대로 두보(杜甫), 한유(韓愈), 소식(蘇軾), 육유(陸游)의 시를 모두 익혔으며 황상시(黃裳詩)를 탄생시켰다. 당나라 조업(曺鄴), 조가(曺駕), 류득인(劉得仁)의 사상도 체득한 황상시였다.
그런데, 사암과 연계된 사람치고 아암 혜장 등도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사암에게 있어 훌륭한 제자가 된 황상은 이미 학자들에 의해 크게 조명이 된 상태다.
2012년 양광식 강진문사고전연구소장이 460쪽으로 ⌜다산 제자 황상의 일속산방길⌟이란 책을 발간한 바 있고, 2010년 358쪽으로 ⌜다산제자 1호 치원 황상이 받은 편지⌟를 발간한 바 있다.
2011년에는 한양대 정민 교수가 756쪽의 ⌜다산의 재발견⌟을 통해 황상을 언급했고, 같은 해 590쪽의 ⌜삶을 바꾼 만남⌟을 통해 황상의 일대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정민 교수는 발문에서 “단 한 번으로 삶 자체가 업그레이드 되는 만남, 그런 만남을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다산 정약용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제자 황상이다. 내가 황상을 처음 안 것은 예전 임형택 교수 논문에 잠깐 인용된 ⌜삼근계⌟란 짧은 문장 때문이었다. 글이 가슴을 쳤다. 당장 수소문해서 황상의 ⌜치원유고⌟ 복사본을 손에 넣었다. 앞뒤 맥락을 알고 읽으니 더욱 뭉클했다. 이후 틈날 때마다 그의 글을 찾아 읽었다.
나는 지난 몇 해 동안 황상의 자취를 꼼꼼하게 추적해왔다. 2006년 가을, 주룩주룩 내리던 빗속에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에 있는 일속산방 터를 물어물어 찾아갔다. 30년 전 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로 폐교가 된 용운초등학교 터의 뒤편이었다. 덤불은 수십 년 인적이 그친 터라 발을 들일 수조차 없었다.
저수지의 벼랑길을 따라 아슬아슬 위태롭게 찾아간 집터에서 나는 망연해져서 한참을 서성였다.”
정민 교수는 ⌜다산의 재발견⌟이란 책자의 말미에서도 ⌜황상의 일속산방 경영과 산가 생활⌟을 소개하고 있다. 앞부분만 소개해 본다.
“이 글에서 치원 황상이 강진군 대구면 백적동에 조성했던 일속산방과 그곳에서의 산가생활에 대해 살펴보겠다”며 “황상은 다산에게서 동문 밖 주막 시절에 배운 읍중 제자다. 다산은 15세 때 만난 그를 몹시 아껴 <산근계>의 가르침으로 훈도했다. 평생 스승의 뜻을 따랐고, 다산 사후 두 아들과 맺은 정황계의 아름다운 사연이 널리 알려져 있다.
다산은 그를 시인으로 키웠다. 그는 다산 해배 이후 30년을 농부로 묻혀 살다가 60세를 넘겨서야 중앙 시단에 화려하게 데뷔했다. 스승을 향한 그의 진실한 태도와 한결같은 자세는 정학연‧정학유 형제와 추사 형제 뿐 아니라, 이재 권돈인 등 여러 경화사족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황상은 스승의 가르침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대로 따랐던 인물이다. 75세가 넘어서도 쉼 없이 초서하며 시작에 몰두했다. 그가 조성한 일속산방 또한 어린 시절 스승이 일러준 이상적 주거의 모델을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그대로 실현한 공간이었다.
그의 문집 <치원유고>에는 일속산방의 모습과 그곳에서의 산가 생활을 증언하는 시가 다수 남아 있다. 소치 허련이 그린 <일속산방도>도 전한다“
2천권의 서재 송풍루
저자는 ⌜사암 정약용의 전기⌟에서 다산의 시를 ⌜다산시정신⌟에 실린 시를 많이 인용해 실었다. 특히 ⌜송풍루⌟는 사암이 다산초당에서 지낸 3년 동안 자연 속에 파묻혀 자연을 벗 삼아 제자들과 더불어 조용히 살면서 공부하며 가르치고 저술을 하며 즐겁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한다.
저자는 이 당시가 사암이 귀양살이 하는 중 가장 유쾌한 시절이 아닐까 싶다고 지적하며 이 송풍루는 다산동암의 다른 이름이라고 밝히고 있다.
송풍루
1
산속에 사노라니 만사가 한적하기만 해
새로 얽은 띠 집이 두 칸뿐이네.
방은 겨우 병든 몸 누울 만큼 되고
들창은 푸른 산을 대하도록 뚫었다오.
네 계절 솔바람 소리 피리와 거문고 소리인 듯
푸르른 바위들이 병풍이요 장막이지.
2천권 서적이 쌓여 있기에
문에 들어서면 언제나 기쁜 얼굴 마주본다오.
2
산속에 사노라면 매사에 청빈해져
외물에 얽매임 끊어 이 몸 하나뿐이라네.
타향은 내 땅이 아니라는 말 믿기지 않고
평지를 거닐면서 신선처럼 군다네.
약절구는 자주 찧어 이끼 끼는 번거로움 없는데
차 달이는 일 드물어 화로에 먼지 끼었지.
법희(法喜)를 아내 삼으면 참으로 즐거울 수 있다는데
부처님 말씀 다 허망하나 이 말은 진실일러라.
(중략)
‣법희(法喜) 불법을 듣고 희열을 느끼는 것. 유마경에 법희를 아내로 삼고 자비로 딸을 삼는다는 말이 있다.
(글 송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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