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시대(75회)
동성리 김재일(82)할아버지
“허허, 이쪽이든 저쪽이든 숫자 많은 대로 따라가야 허것더만”
김재일 할아버지는 대뜸 모두 잊어버려 아무것도 생각나는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러다가 6.25전쟁때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사연을 슬슬 풀어놓았다.
“6.25때 하여간 피난 댕기고, 이산 저산 넘어 댕기다가······그때가 지금처럼 나락빌땐디 쬐끔 빨랐던 때여.”
인민군이 기기 시작하면서 부락 사람들을 모두 집합시켜 거리로 몰았다. 인민군들의 집결지는 성전 월남에 있던 한 학교였고, 그곳으로 부락민들을 최대한 이끌고 간 후 북쪽으로 넘어 가려던 참이었다.
“근게 그때가 무서운때여, 공산주의하고 민주주의하고 두 가지로 갈라서가고 공산주의는 산에서 왔다갔다 허고 동냥허로 와, 그러면 무서운게 주어야 혀.”
김할아버지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부터 두 가지의 사상으로 세상은 갈라져 있었다.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 골수분자로 활동하다 기게 되면서 결국 가족들까지 산으로 데리고 떠나 온데간데 소식이 없는 사람도 있었고, 면서기를 하던 어떤 사람은 말 한마디 잘못해서 어쩔 수없이 산으로 따라가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
“세상이 자꾸 뒤바뀌던 시대여, 면서기허던 사람이 반란군을 가리키며 경찰한테 그랬어, 저기 반란군가요. 허고 말여.”
그러나 세상은 금방 변해서 반란군들이 득세하게 되었고, 그 면서기하던 사람은 반란군이 하라는 대로 돈과 식량을 대주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가 반란군이 산으로 기면서는 다시 경찰에게 시달리는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지서에서는 왜 반란군한테 협조했냐고 몰아붙이고, 결국 견디지 못헌게 공산당 따라나설 수 밖에 없지. 그때는 줘도 성가시고 안줘도 성가셔, 주먼 줬다고 경찰에서 그라제, 안주면 안준다고 한쪽에서는 죽일라고 허제, 그런게로 어만사람이 걸려갔고 죽고 그려. 거그서 심부름하다가 죽은 사람도 있고 그때가 참말로 무서운때여.”
김할아버지가 그때의 처절한 광경이 떠오르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후퇴하는 인민군에 이끌려가던 부락민들이 인솔자를 따라 성전 영풍리 쪽으로 넘어가던 때였다.
길은 독자갈 밭이어서 매우 험난했고 모두들 무서움에 떨리고 지쳐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앞쪽에서 가던 말구루마의 말이 자갈에 미끄러져 그랬는지 용수철처럼 뛰기 시작했다.
“누가 말을 건들었는지 어쨌는지 몰른디, 말이 폴딱폴딱 뛰더니 따발총 소리같이 요란허게 나더란 말여. 나중 알고 본게 그게 말구루마 소리였는디, 총소린줄 알고 다들 깜짝 놀랬제.”
그 순간 앞에서 인솔하던 사람이 총소리로 착각을 했는지 어디론가 도망가 버렸다. 이틈에 따라가던 사람들도 놀라서 모두 논으로 숨어들어 나락밭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아무 소리도 나지 않자 나락밭에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나왔고 모두들 흩어져 저절로 해산되어 버린 것이다.
“그때에 해산되어부서 다행이제. 그랑게 월남학교까지 못가고 흩어져 버렸제.”
그때 말구루마 사건이 없었으면 어디로 가버렸을지 모르겠다는 김할아버지다. 서로가 어디로 가잔 말도 없이 제 갈 길을 찾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도 쉽지는 않았다. 사방 길에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쏴 죽인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포도시 살어왔제. 그때 따라갔으먼 반란군 되아불어······아무집이나 가서 얻어묵고 빌어묵고 하면서 피댕기다가 돌아왔고만.”
사상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던 그 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중간 입장에 있던 순진한 부락 사람들은 그저 살기 위해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지만 특별히 표적이 되면 엄청난 댓가를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허허, 이쪽이든 저쪽이든 숫자 많은 대로 따라가야 허겄더만, 아무리 권해도 안 간 사람은 안 가거든······.”
칠량 동백리 현천 마을에서 태어난 김재일 할아버지는 그때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현재 동성리에서 부인과 함께 살고 계시며, 3남 3녀를 두었다.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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