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새해의 세 사람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바람에 뒤척이던 댓잎조차 숨을 죽였다. 무언가 큰 조짐의 기미가 있는 날들의 특성이랄까. 처마 끝 매달아놓은 풍경 끝 물고기도 공중 유영을 멈추어 2010년 새해 전야는 더할 수 없이 적요하다. 가능한 생생한 느낌의 글을 쓰려고 새해의 첫날이 되도록 초조히 기다리는 사이, 언제나 맘속으로 후원하는 후배에게 안부의 문자가 왔고, 먼 곳의 문단 대선배님께는 덕담의 전화를 올해의 첫 선물로 받았다.
‘와아! 함박눈이다. 눈송이처럼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안부문자의 구절처럼 눈 내리는 이 밤, 마치 長程의 출발일 黎明 앞에 선 나그네의 설렘을 감출 수 없다. 어쨌든 맘속으로 단단히 벼르고 있던 세 사람의 소개로 새해맞이 소회를 다잡아보려 한다.
손마디 짚어 풀어내던 사주풀이에 범 寅은 天權. 그러고 보니 삼십 여 년 전 갑인년 생애 첫 戀詩를 받고 하늘이라도 휘어잡은 듯 들떴던 기억도 난다. 각설하고, 무려 이백 사십년 전의 호랑이해에 쓴 글을 우연히 만났다. 다가올 새해의 명칭과 같은 경인년이라는 게 우선 눈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의 문필가 심익운이 ‘물정에 어두운 화가’라는 제목으로 쓴 심사정의 비문이 그것이다.
좌초한 문필가 심익운이 나머지 두 사람을 내게 만나게 한 셈인데 글쓴이 심익운을 먼저 얘기하자. 文才 뛰어난 자식들의 앞날을 막는 장애를 거두기 위해 罷養의 몰염치도, 나중엔 斷指까지 서슴치 않던 그의 아버지다.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역적의 자식이라는 오명을 벗겨주고 싶었던 눈물겨운 의도마저 빗나가고, 형이 翔雲이니 翼雲과 마찬가지로 날개라는 뜻이 이름자 첫 머리에 들어간 것이 더 애석했다. 장원급제로 젊어 요직에 등용되나 家禍의 여파로 귀양지를 떠돌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심익운, 자신이 쓴 글에서조차 이름이 모조리 삭제 당하는 최악의 불운까지, 울분을 참지 못한 그는 부친처럼 손가락을 자르는 기행도 저지른다. 하나 글 쓰는 이에게는 결국 자신의 글만이 큰 재록이라는 걸 깨우친다. 부러움의 찬탄을 쏟을 만큼 좋은 글로 후세인들의 추앙을 받고 영원히 건재 하는 伸寃 아닌 伸寃을 받았다는 큰 감명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심익운의 글 속 주인공인 민노인이다. 오랜 공부로 터득한 天機, 그 재능을 발휘해 남을 위해 명당의 장지를 구해 주되 귀천을 따지지 않고 가진 재주를 다 발휘했다던가. 궁색한 형편에 남이 복채를 주면 기뻐하였으나 약속을 어기고 주지 않아도 결코 화내는 법이 없었다는, 이 세상 머무는 동안 가장 큰 축복이라는 淸福을 떠올리는 노인의 삶이 그러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평소 가까이 지내던 심익운을 향해 가벼이 떠나는 여행길인양 뱃전의 송별을 하던 민노인. 그의 담담한 일상은 내게 긴 여운을 남겼다.
인품이 주는 감동으로 하자면 점입가경인 셈이다. 가난하여 염습할 물품조차 없어 친족인 심익운에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부탁할 정도였다는 이조후기의 걸출한 화가 심사정.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평생 물감만 입에 묻히고 살았다는 대목에서 죽비로 후려 맞은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옛 사람의 그림 비결을 깊이 연구하여 눈으로 읽은 것을 마음으로 터득하였다. 그런 뒤에 비로소 그동안 그려왔던 것을 완전히 바꾸어 悠遠하고 蕭散한 형상을 그림으로써 낮은 수준을 씻고자 애썼다. 중년 이후에는 배운 것을 융합하고 소화시켜 천성으로 그렸는데 잘 그리는데 목표를 두지 않아도 잘 그려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환이 있든지, 환락이 있든지 붓을 잡지 않은 날이 없었다.’
진경산수를 그리되 실재경관을 초월하여 내재된 자연의 본질에 자신의 내면세계를 융합시켜 새롭게 이상화된 산수화를 묘출했다는 인터넷상의 심사정을 다시 찾아보며 단 하루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옛사람의 행적에 새삼 옷깃을 여민다.
새 공책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절로 내뱉어지던 큰 숨은 백지를 향한 알 수없는 경건함이었다. 새해, 새날의 첫 발자국 떼기가 새 공책의 첫 자 쓰기에 비할까. 모든 것의 시작에는 쉽게 범접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조심스런 마음이 스민다. 이번만큼은 후회의 얼룩을 남기지 않으리라 다짐도 해본다.
갈수록 물질만능으로 가파르게 치닫는 요즘 세태의 아슬함에 어느 때보다도 가계의 엥겔계수가 높다는 진단이 외려 반가웠다. 어느 때보다 호황을 누린 상품이 내복과 자전거라는 데서 느끼는 안도감, 내친 김에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할 그 무엇을 곰곰 생각해 본다. 오고가는 시간의 찰나에 겸허히 무릎 꿇고 싶은 기도의 극점이 새해맞이라던가. 가난했지만 삶의 품격을 잃지 않은 세 사람의 先人에게서 겸손, 온유, 정진의 옥석을 정선해 말끔히 비운 새 날의 터전에 가지런히 놓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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