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김현임 수필 : 스티브잡스

스티브 잡스

백일홍 사이를 누비는 나비 한 마리가 예사롭지 않다. 나날이 화사한 빛깔을 잃어가는 꽃 사이에 너무도 선명한 노랑나비, 그 강렬함이 문득 그를 떠올리게 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나이로 그의 생을 마감한 건 불과 2주전, 신은 모진 병마로부터 이제야 그를 구해주었을까. ‘자클린의 눈물’이라는 첼로곡이 낭자하게 퍼지는 초추(初秋)의 오후, 진한 커피 한 잔과 함께 한 사람의 생을 회상한다.

비틀스와 동양의 선(禪)문화에 심취했으며 목 부분이 접히는 검은 색 셔츠와 청바지, 신발은 굽 없는 스니커즈만을 고수하던 그가 생을 놓던 날, 때마침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의 ‘서곡’이라는 시는 죽음을 읊고 있었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숨 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 습기 찬 녹색 지대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이런 시구들에서 불현 듯 겹치는 그의 삶.

딸의 임신에도 끝까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던 외할아버지, 하여 사생아로 태어나 일주일 만에 생모의 손에 의해 평범한 노동자인 양부모에게 넘겨진다. 초등학교 때 그는 학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당시 학교수업을 자주 빼먹는 제자를 달래느라 사탕과 돈을 쥐어주던 담임선생님의 배려에도 성적은 시원찮았다. 다만 전자제품에는 관심이 많았다. 누군가로부터 아마추어 전기용품세트를 선물 받은 것이 큰 계기였다. 이후 방과 후 수업을 통해 컴퓨터에 대한 지식과 흥미를 점점 넓혀갔다. 가까스로 대학에 진학했지만 양부모가 비싼 학비를 힘들게 대고 있다는 시실을 알고 1학기만 다니고 중퇴하고 만다. 극심한 생활고에 콜라병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하고 무료급식을 먹기 위해 11km 이상을 걸어 다니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그의 전반기 생이다.

마치 고개 푹 숙인 채 자신의 신발을 내려다보며 정처 없이 걷는 것처럼 우울한 류의 음악이라는 슈게이징(shoegazing). 입양아에 고졸의 학력, 게다가 무료급식소를 전전하며 돌파구를 찾던 그에게 들려오던 서글픈 음률이 그러했으리라. 아무리 둘러봐도 단 한 곳도 출구가 없어 보이는 삶이었다. 태생부터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도 갖추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특별한 사람들의 전설 같은 삶이 그렇듯 바로 여기서부터 반전이다. 지독한 콤플렉스에다 빈곤한 성장환경, 자신을 옭은 이런 열악한 조건들이 호된 담금질을 멈추지 않는 동기부여의 요인이 된 것이다.

컴퓨터를 향한 애정 하나로 그는 양부모의 창고에서 벼르던 창업을 한다. 그리고 회사는 성공을 거둔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승승장구만은 아니었다. 자신이 시작한 회사에서도 쫓겨나는 불화를 겪기도 하고, 하지만 결국 찬란한 태양처럼 빛나는 업적을 이룬다. 아이팟, 아이폰 등 글로벌 히트작을 내놓아 에디슨, 아인슈타인에 비견되는, 이른 바 인류의 삶의 질을 바꾼 이들의 대열에 당당히 포함된 것이다.

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완벽함을 다해 아버지란 존재를 만든다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라는 유년의 아픔은 그를 쓰러뜨린 병마처럼 쉽게 치유되지 않았던가.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가족과의 단란함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던 그. 하지만 끝내 화해하지 못한 그의 생부는 아들과 함께 나눌 추억이 없다는 것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했다. 성공한 아들이 가진 재산에 대한 욕심, 행여 그런 오해의 시선이 없기를 먼저 내세우며, 바람이라면 아들과 마시는 따뜻한 차 한 잔의 시간, 그러나 아버지의 그 간절한 청마저 아들은 냉정히 외면했다.

그는 뛰어난 인재들을 혹독하게 다루기로 소문이 났다. 철저하게 책무성을 요구하는 잔인한 일터의 폭군적 완벽주의자라는 혹평도 받았다. 경쟁 난무하는 숨 막히는 소용돌이, 도처에 습기 가득한 수갱을 헤쳐 나오는데 실패에 관대하고 도전과 열망에 호의적인 미국문화의 응원도 한 몫 했을 터. ‘山不利水不利在利挽弓之間’ 이윽고 다다른 산에도, 바다에도 우리가 추구하는 진정한 즐거움은 없다고 했다. 과녁을 향해 있는 힘 다 해 활시위 당기는, 그 팽팽한 긴장의 순간에 우리 생의 큰 즐거움이 있을 뿐이라는 동양의 무위론(無爲論)까지 터득했던가. 성공의 정점에 이르러서도 트레이드마크가 된 검은 터들에 청바지 차림은 마른 체형의 그를 더욱 수척해 보이게 했다.

‘삶은 영원하지 않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라.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늘 배고프게, 늘 바보같이 살아라.’ 가파른 시대의 능선을 누구보다 치열하게 올라 마침내 정상에 이른 사내가 여전히 아득한 벼랑에서 서성이는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충고다. 그의 회사에서 만든 신제품의 출시일 다음날 56세의 생의 마감한다. 애초 제품에 시큰둥하던 소비자들의 반응이 그를 추모하는 열기에 힘입어 주문쇄도 중이라니 스티브 잡스, 그는 끝까지 역전 중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