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기이한 인연, 아름다운 사랑, 그리고 시
조용호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교수
18,9세기에 기이한 인연으로 맺어져 살다 간 아름다운 부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담락당(湛樂堂)이란 호를 가진 하립과 그의 부인 삼의당(三宜堂) 김씨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전북 남원의 같은 동네에서 같은 해ㆍ같은 달ㆍ같은 날에 태어나 18세 되던 해에 혼인한 기이한 인연의 주인공들이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한 가문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각기 공부와 가사에 전념하며 청춘 시절을 10년 이상이나 생이별한 채 살았다. 하지만 끝내 하립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고 가문의 중흥에 대한 열망도 접어야 했다. 그러나 과거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면서 두 사람은 비로소 부부의 참모습을 찾게 된다.
글을 배운 남성들이 시를 짓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여성인 김씨가 품격 있는 여인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주옥같은 시를 많이 남긴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부부간에 주고받은 시는 마치 연애를 하는 것처럼 평생을 다정다감하게 살아간 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그들의 시에는 남존여비니 칠거지악이니 하는 천박한 어휘로는 도저히 형상화할 수 없는 담백하고도 고결한 사랑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일부를 소개한다. 위의 것은 남편의 시이고 아래 것은 부인의 시이다.
三更明月仲春花(삼경명월중춘화) 삼경의 밝은 달은 한봄의 꽃
花正華時月色加(화정화시월색가) 꽃이 정녕 화려한 때에 달빛마저 더했어라.
隨月看花人又至(수월간화인우지) 달 따르며 꽃구경하는데 부인도 오시니
無雙光景在吾家(무쌍광경재오가) 둘도 없는 광경이 우리 집에 있구나.
滿天明月滿園花(만천명월만원화) 온 하늘엔 밝은 달이요 정원엔 꽃이 가득한데
花影相添月影加(화영상첨월영가) 꽃 그림자 서로 겹친데 달그림자 더했어라.
如月如花人對坐(여월여화인대좌) 달 같고 꽃 같은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으니
世間榮辱屬誰家(세간영욕속수가) 세간의 영욕이란 뉘 집에 있다는 것인가.
두 사람은 같은 운을 써서 창화(唱和)하고 있으며 동일한 소재를 사용하여 일체감을 확인하고 있다. 게다가 시를 읊은 춘삼월 달 밝은 밤이라는 시·공간이 주는 포근함은 두 사람을 매우 특별한 감미로움을 주기에 족하다. 그 밤은 오늘날의 세태에서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지고지순하고 고결한 사랑이 피어나는 밤이었을 것이다. 깊은 밤에 부부가 정원에 꽃구경을 간다는 사실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부부애를 느낄 수 있는데, 만발한 꽃 속에서 청명한 달빛을 완상하는 두 부부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결혼의 미래형은 이혼이라는 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들리는 요즘, 애정 표현을 드러나게 하지 못했을 조선조를 살다간 한 부부의 담백하고 청아한 사랑을 보면서, 부부의 의미를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바야흐로 결혼식의 계절에 들어선 요즈음, 한 겨울의 추위를 견디고 맨 먼저 피어서 은은한 여운을 남기는 매화를 닮은 그런 사랑을 그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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