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봄 문익환학교
필자가 근무하는 광주지방조달청은 합동청사 8층에 위치해 있다. 8층은 동네 뒷산이나 언덕 정도의 그리 높지 않은 높이다. 청사 주위에 높은 건물이 없어 전망이 좋다. 날씨 좋은 날에는 꼭 창밖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선산에서 바라보는 강진만의 비경이 눈에 어른거리곤 한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유배시절 빼놓지 않고 즐긴 강진만의 절경은 고향 어느 곳에서 접해도 아름답다. 하지만 필자가 개인적으로 즐기는 곳은 강진만의 수려한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고향선산이 있는 곳이다.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 위치해 있는 선산은 강진을 남도답사 1번지라 칭한 유홍준씨가 극찬한 뷰포인트와도 멀지 않다. 그래선지 선산을 찾을 때마다 강진만의 풍경을 놓치지 않는 게 하나의 습관처럼 돼버렸다.
이런 강진만의 비경 속에 언제부턴가 조그마한 건물 하나가 자리했다. 예전에 없었던 건물 한 채가 선산 아래 세워진 것이다. 처음엔 그냥 지나쳤는데 이듬해부터 건물이 하나씩 늘더니 어느새 규모가 훌쩍 커졌다. 궁금증이 일어 알아보니 대안학교였다.
강진에 대안학교가 있다는 것도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늦봄 문익환 학교’라는 이름은 더욱 뜻밖이었다. 필자가 아는 문익환 목사와 관련이 있는 학교인지 호기심에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역시 추측이 맞았다.
늦봄 문익환 목사는 분단극복과 통일의 희원을 온 몸으로 노래했던 분으로 시인이자 철학자요, 통일운동가이자 목회자였다. 이북출신인 늦봄의 삶과 얼을 기리는 대안학교가 어떻게 강진에 세워졌을까?
정확한 답을 찾지 못했지만 아마도 목회자였던 고인의 삶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을 강진으로 보고 고인의 유족들이 유지를 받들어 생전에 이루지 못한 꿈을 이곳에서 실현하고자 함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늦봄학교는 만덕리 백련사 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다. 문익환 목사를 큰 스승으로 삼는 대안학교로 지난 2006년에 문을 열었다. 중학교 2년, 고등학교 2년, 진학과정 2년, 모두 6년제로 개교한 농촌속의 전일제 기숙형 학교다. 학생 수는 100명 남짓이다.
겉으로는 여느 대안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배움 과목에 ‘역사와 통일학습’ 시간을 두고 있으며 고인의 삶과 얼, 그리고 남북한 평화와 통일을 공부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진입로 표지판에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다."라는 말에 담긴 고인의 뜻과 학교 설립취지가 가슴속에 와 닿는다.
주로 목조와 흙으로 지어진 학교건물은 자연과 닮아 있다. 새로 지은 통나무 건물도 주변과 잘 어우러져 보기에 좋다. 기숙사, 도서관 강당 등도 잘 갖춰진 게 일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는 늦봄학교를 알고 나서 문학적 자질이 풍부했던 고인이 자신의 호를 유독 ‘늦봄’으로 정한 이유가 내심 궁금했다. 북적한 듯 한적한 학교 곳곳을 둘러보면서 새삼 느낀 ‘늦봄’의 따스함에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흔히 인생의 꽃을 봄이라고 한다. 하지만 가장 성숙하고 알찬 때는 늦은 봄이다. 고인의 삶 또한 이와 다르지 않아 늦봄을 호로 택했던 게 아니었을까? 당초 조그만 건물 한 채에서 시작한 학교가 조금씩 규모를 넓힌 것도 늦봄과 다르지 않다.
늦봄의 삶과 고난, 그리고 늦봄에 담긴 그의 소망을 접하고 돌아서는데 강진만의 너른 풍광이 눈앞에 펼쳐진다. 오늘따라 강진만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감미롭게 코끝을 스친다. 이곳에는 사계절 항상 따스한 늦봄의 향기가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대안학교여 길이 빛나라!
광주지방조달청장 이 성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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