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만의 복지논쟁
김윤석 (공군사관학교 교수, 재경강진읍향우회 사무총장)
우리사회 곳곳에서 복지논쟁이 한창이다. 문자 그대로 눈만 뜨면 복지를 들먹이고 자고 일어나면 복지논쟁이다. 정치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복지논쟁에 혈안인 것을 보면 복지가 대세라고 아니할 수 없는 요즘이다. 한 나라의 주권을 가진 국민으로서의 권리에 기반한 복지는 차치하고라도 내년에 실시되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는 정치권에서는 당연히 유권자의 표를 의식한 복지논쟁을 피할 수 없는 형국이다. 물론 정치하는 사람들의 이슈 선점이라고 하는 차원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것이 문자 그대로 선택적 복지인지 보편적 복지인지를 가리는 일과, 복지를 실현해야하고 복지국가로 갈 수 밖에 없는 현실적인 명제하에서 복지에 대한 현실성과 타당성을 따지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무망한 일이 된듯하다.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역사는 짧기도 하거니와 복지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적 마인드도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있었던 복지모델의 개념은 “남은 돈으로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것, 즉, 복지=적선 이라는 등식”에 다름 아니다. 다시 말해 남는 돈이 있으면 도와주고 없으면 그것마저도 할 수 없는, 복지라는 말의 개념과 의미조차도 구차한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5공과 6공 그리고 문민정부를 거치면서도 복지의 개념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소위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개발과 성장에만 몰두했을 뿐 분배에 대한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고 복지에 대한 개념이 없기는 1970년대나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거치면서 비록 초보 수준이기는 했지만 분배 및 조세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제도의 개선과 나름의 보편적 복지에 대한 복지개념을 정립하고 복지예산을 확충했다는 점은 복지국가 가는 길목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복지라는 게 그냥 어디서 뚝 떨어진 개념은 아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공동체 안에서 소위 인간답게 살아가는 최소한으로서의 개념이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헌법에는 사회 모든 구성원의 타고난 존엄성과 평등하고도 양도할 수 없는 권리로 정의된 인권(Human rights)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권은 곧,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뜻하는 사회권(social rights)을 의미하는데, 이 사회권은 도덕적 당위나 말로만 하는 선언은 결코 아니며,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 또한 아니다. 정부나 국가가 맘 내키는 대로 줄 수도 있고, 안 줘도 되는 시혜적 성격의 적선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 헌법에 기초한 사회권은 헌법 제31조에서 36조까지의 내용으로 규정되어 있는바,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 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국가는 노인과 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 신체 장애자 및 질병. 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로 되어있다. 여기서 굳이 헌법까지 들먹이며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더라도 기본적인 국민의 4대 의무인 국방, 납세, 교육 및 근로의 의무를 되새겨 보면 해답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성인이 된 남자가 왜 군대에 가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야하는지, 또한 소득이 있는 곳엔 왜 반드시 세금이 존재하는지를 따져보면 국가에 대해 국민된 의무만을 이행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와 같은 의무 속에는 한나라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인간다운 행복추구권 및 사회권이라고 하는 권리가 반드시 내재되어 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래서 복지는 국가에 대해 국민으로서 가지는 당연한 권리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복지개념을 얘기하면서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의 보편적 복지는 1인당 GDP 2만불 정도의 경제력으로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이다. 그러나 유럽의 복지천국이라 할 수 있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덴마크 등을 보라. 이들 나라의 보편적 복지는 1인당 GDP가 우리나라의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1만2천불 시대에 이미 시작했음을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또한 혹자는 이렇게도 말한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성장에 투자할 때지 분배에 중점을 둘 시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 복지를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재원이 필요하여 일반국민의 조세부담이 지금보다 현저히 커질 것 이라고 우려들을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현 정부에서의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기만 해도 그 재원의 상당부분은 마련할 수 있고, 또한 우리정부가 1970년대부터 대기업에 대해 펴왔던 수출주도형 산업 및 성장정책을 통해 이룩하고 얻었던, 정부로부터의 수없이 많은 혜택의 과실을 이제는 일정부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조세정의는 물론 분배의 정의도 실현되리라 믿으며 복지재원의 조달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대 조국 교수는 ‘복지가 바로 성장이고 고용 창출이고 생산성 향상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한겨레 신문이 2007년 조사에서 밝힌 국민이 느끼는 5대 불안 요인은 주거, 노후, 교육, 일자리 및 평화문제였다. 2004년 이후 대한민국의 자살 사망률은 OECD 국가중 1위, 2008년 인구 10만명당 자살 사망자수는 26명, OECD 평균 자살사망률 11.2명에 비해 2배가 넘는 수치이며, 전체 자살자의 1/3이 40~50대의 중년 남성이라는 통계를 보면 자살이 실업, 저임금, 경제적 불평등에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자살 사망률 하나만 보더라도 실업이나 저임금에 기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주 원인인 것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국민의 5대 불안요인은 어느 것 하나 빼놓지 않고 복지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행복은 불안한 상태를 제거하거나 완화하는 것으로서, 곧 삶의 안전 없이는 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삶에 대한 안전은 인간다운 생활을 위한 권리이며, 그것은 곧 사회권 강화를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 가치로서, 그 제도적 표현이 복지라는 개념이다. 일할 능력이 없어 스스로 소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들에겐 국민기초 생활보장제도가, 병든 이들에겐 국민건강보험제도와 의료급여제도가, 노후를 위해선 국민연금이, 일을 하다 불의의 사고로 다쳤을 때는 산업재해보험이, 불가피한 사정으로 직장을 잃은 경우에는 고용보험이 각각 안전장치가 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불안에 대한 최고의 안전장치는 사회권의 강화와 그 보편적 구축에 있다. 이 밖에도 포괄적 의미의 복지개념에 포함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노인, 장애인, 노숙인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기초노령연금과 장애연금 및 수당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와 같은 복지의 개념에 대해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또한 우리의 현실에 비추어 그것이 선별적 복지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 복지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그래서 어떤 것이 더 합당한지에 대한 논의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나라가 복지를 실현하고 복지국가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정치하는 몇 사람의 손에 의해서, 복지국가를 연구하는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 그것을 집행하는 몇몇 관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소위 말해 그들만의 복지개념과 복지논쟁이 아니라 복지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그래서 향후에도 항상성이 있는 복지, 또 세대간 및 계층간의 차이를 인정한 복지, 도농간의 서로 다른 삶의 터전에 꼭 필요한 적실성에 기초한 복지, 지역간의 산업기반 시설과 여타의 여건에 합당한 복지, 빈부 격차에 상응하는 선택적 및 보편적 복지개념의 차별적 적용에 따른 복지개념의 정리와 실현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 그래서 몇몇 그룹에만 한정된 복지 개념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그래서 국민 개개인의 삶속에 생활의 일부로서 정착된 복지개념이 정착되어야만 진정한 복지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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