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길목에서
<수 필>
「 나는 혼자가 아니다」
- 강 현 옥 -
강진읍동성리(동화작가)
이십여 년 전, 나는 귀밑 이 센티미터를 고수한 깔끔한 단발머리의 여학생이었다. 교복의 상의는 허리띠로 맵시 있게 졸라매고 하의는 휙 돌면 둥글게 쫙 퍼지는 후레아 치마를 입었는데 항상 단정하게 다려 입고 다녔다. 가랑잎 굴러가는 소리만 들어도 ‘까르르’ 웃어대는 그야말로 황금의 여고시절이었다. 가을이 되면 어느덧 문학소녀가 되어있었다. 옆구리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같은 문학책을 끼고는 코스모스가 도열하듯 늘어진 신작로 길을 걷곤 하였다. 마치 영화 속의 주인공인 냥, 베르테르의 독백을 감정 잡아가며 뜨겁게 열연하기도 했다. 누가 보면 미친 줄 알았을 테지만.
그러던 어느 날, 나를 일탈로 이끈 사건이 터지고야말았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단단히 빠져있었던 때이기도 했다.
‘모든 것을 버릴 때 비로소 모든 것을 갖게 된다는 것이 무소유의 역리다?’
‘모든 것이 일체 유심조라고? 마음이 지어내는 거라고?’
한 참 웅얼거리며 월요일 아침방송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나는 고등학교 삼년 내내 방송부 일원으로 활약했는데 그날도 교무실에 설치된 음향기기에서 마이크 선을 뽑아 운동장에 있는 단상까지 잡아 빼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아이코’하는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수학선생님이셨다. 내가 잡고 있는 마이크 선에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었다. 어찌나 미안하던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뛰어갔다. 그 순간 선생님의 입에서 깜짝 놀랄 욕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니미 XX 너 뒈질래?"
우리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맞나? 순간 귀가 윙윙 울더니 머리가 서늘해졌다. 수학선생님은 한참을 노려보더니 재수 없다는 듯 침을 ‘탁’ 뱉고는 현관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 자리에 붙어버렸는지 꼼짝도 못했다. 누군가 내 어깨를 잡아 흔들 때까지.
위선을 가르치는 교육현장에 남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졸업장이나 따내려고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더 큰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고심 끝에 결심했다. 학교를 때려 치기로! 그날 밤, 집을 떠나기 위해 준비했다. 옷가지와 일기장을 가방에 넣은 후 몇 통의 편지를 쓴 것이 전부였지만 왠지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잠에서 깨어나니 아버지께서 나 보다 먼저 출타준비를 하고 계셨다. 농기구를 챙기시는걸 보니 외할머니 댁에 가시는 것 같았다. 차에 올라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는데 목구멍이 뜨끈뜨끈했다. 심부름 길에 몰래 마신 막걸 리처럼. 아버지를 보내고 다음 차에 올랐다. 자꾸만 뒤돌아보았다. 내가 살던 오두막집이 멀어져갈 때 자꾸 눈물이 흘러나왔다. 다시는 가족을 볼 수 없으리란 비장한 결심 때문이었으리!
버스가 한참을 달리더니 백양사에 멈추었다. 절에 들어서자마자 연못부터 찾았다. 법정스님께서 주지로 계실 적에 키웠다는 붕어들이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연못은 생각보다 깨끗하지 않았고 붕어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결국 총무스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학생은 뭐 하러 여기에 왔는고?”
나는 맹꽁이 신발만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겨우 입을 뗐다.
“스님 되려고요.”
“스님 되서 뭐하게?”
“......”
거기까지 생각은 못했던 터였다. 뭐가 되기보다는 아름답지 못한 세상을 떠나고 싶었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우물쭈물했다. 그날 밤 스님의 훈계만 잔뜩 듣고 하룻밤 신세를 졌다.
“학생, 학교 졸업하고도 중이 되고 싶거든 부모허락 받고 와. 알았지?”
다음 날, 시집간 언니네로 돌아오고 말았다. 시골에서 엄마가 올라와 계셨는데 흰 천을 이마에 둘둘 묶은 모습이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가, 막둥아, 난 너 이는 못 산다.”
엄마는 나를 와락 보듬더니 한참을 우셨다. 서울에 있던 작은오빠도 큰 오빠도 모두 내려와 있었다. 막내가 가출했다고 하니 서울로만 상경한 줄 알고 서울역과 터미널에 선.후배를 쫙 깔다시피 했다고 하였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이틀 걸렸다. 가출 이틀 만에 크게 깨달은 것!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이 날실 씨실로 촘촘하게 엮어져 있어 부족한 나를 올곧게 지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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