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와 승리, 그 역전의 드라마
안타깝다. 기어이, 아깝다. 이런 말들 앞에 ‘아이쿠!’라는 탄식어가 어김없이 붙었던가. 텔레비전 화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말들이다. 마침내 박영석 대장을 비롯해 눈 속에 실종된 산악인들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감당 못할 슬픔이 빚은 원망이었을까. 누군가 내뱉듯 질책하던 ‘그렁께 뭣 땜새 그런 디를 꺽꺽 가냐고?’가 지워지지 않는다.
히말라야 산맥 도처에 자리한 눈보라 속 골 깊은 크레바스만 치명적일까. 사하라의 사막의 자동차 레이스는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그 곳에서 시합 중 한쪽 발을 잃은 레이서는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사하라, 그 쪽을 향해서는 오줌조차도 누지 않겠노라고. 그랬던 그가 상처가 아물고 의족을 매달기 무섭게 다시 사하라로 달려갔다.
육상이든 해상이든 공중이든 우주든 미지의 땅에 제일 먼저 발자국을 찍겠다는 도전처럼 마력적인 호소력을 지닌 명분이 있을까. 역사가 시작된 이래 그곳을 향한 인류의 도전도 함께 시작되었다. 도전과 탐험은 인간의 기본적 욕망이라고 했다. 한 예로 ‘기네스북’이라는 숱한 악동들의 기행을 담은 기록물, 그 책에 등재되기 위해 갖가지 기발하고 위험천만한 행태의 신기록에 도전장을 내미는 이들을 보라.
검증된 안전지대로만 어슬렁거리는 비겁한 세태에서 위대한 자연 앞에 날 몸 그대로 부딪히는 어리석은 사람의 무모함마저 신선하다. 그들과 맨몸으로 맞장 뜨다 맞이한 실패는 결코 패배가 아니다. 이룸만이 능사가 아니었다. 그가 헛딛은 한 발자국의 실패가 뒷사람의 두 번째 발자국의 성공을 인도했다. 이를 증명하는 한 예다.
얼음과 눈보라의 땅, 양극지방 중 이미 정복된 북극, 더 험준한 곳으로 알려진 남극은 모험가들에겐 여전히 매력 넘치는 땅이었다. 1910년 10월 영국해군 장교 스콧은 남극으로 향하는 야심 찬 남극장정의 계획을 발표했다. 그에 수반되는 엄청난 자금을 각출하기 위해 동분서주 중, 그보다 앞 서 남극탐험의 계획을 비밀 리에 추진 중인 사람이 있었다. 스웨덴의 속국이라는 오랜 족쇄를 벗은 신생국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었다. 처음부터 아문센은 자신의 계획을 의도적으로 베일에 감추었다. 이 계획이 누설되면 경쟁자인 스콧만 좋을 뿐이라는 계산에서였다. 상대가 거사를 치를 자금 모금에 애를 먹고 있는 동안 은밀히 감행하리라. 더욱이 아문센이 침묵을 지킨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새로 발족된 노르웨이 정부가 대영제국의 탐험대를 앞 서 간다는 아문센의 시도를 알아챈다면 당장 질겁하며 재정후원을 철회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기온이 화씨 마이너스 70도까지 내려가고 맨살은 몇 초 만에 얼어버리는 극지 탐험을 향한 아문센의 준비는 철저했다. 장비도 훌륭했다. 짐의 운송에 제일 중요한 개들 외에도 에스키모 털옷, 가벼운 썰매와 스키, 엄청난 양의 식량과 등유를 준비, 뛰어난 계획가인 아문센은 준비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결과는 뻔했다. 지구 상에서 가장 험한 지형인 남극의 700마일 고지 위에 휘날리는 노르웨이 국기, ‘텐트 속에 남은 것들 중에서 소용되는 것이 있으면 부담 가지지 말고 사용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뒤늦게 도착할 스콧에게 주는 아문센의 친절한 편지도 남아 있었다. 전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된 아문센과 달리 회귀일을 훌쩍 넘기고도 무소식인 스콧 일행. 여러 날이 흐르고 여러 주가 지나고 여러 달이 되었건만 무사귀환의 전보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남극의 여름이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는 4월이 되자 전 영국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10월 말이 되서야 수색대가 나섰다. 드디어 11월 12일 눈 덮인 텐트 속에서 발견된 스콧 일행의 시체. 그들은 충분한 식량을 재공급 받을 수 있는 보급소 앞 11마일 지점에서 사망한 것이다.
‘오직 철저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승리의 여신은 찾아온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것을 행운이라고 부른다. 알맞은 시간 안에 필요한 사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사람에겐 패배가 있을 뿐이다. 모르는 사람은 그걸 불운이라고 한다.’ 이는 승리자 아문센의 냉혹한 진단이다. 하지만 오직 승자의 기록이라는 역사는 남극탐험에서만큼은 예외적으로 패자인 스콧의 머리 위에 승리의 월계관을 씌웠다. 특히 오래된 상처가 재발하여 절뚝거리며 힘들게 행렬을 따르다가 자신이 다른 동료들의 생존 가능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살신성인, 기꺼이 희생의 길을 택한 스콧탐험대의 조랑말 담당자 오츠에게는 용감한 영국신사의 표본이요, 아름다운 정신의 표상, 진정한 승리자란 명예가 수여되었다.
<“텐트 바깥에 잠깐 나갔다 올께.”
그는 텐트를 나가서 눈앞을 가리는 눈보라 속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피 말리는 극지의 여정을 위대한 서사시로 써내려간 스콧의 기록은 이런 영웅들의 일화를 고스란히 전한다. 왜 그곳을 향했느냐고 묻지 말라. 그저 먹고 배설하며 서로 다투며 아등바등 거리는 속세를 떠나 청아한 빙벽, 신이 빚은 그 고결한 산정에서 우주 한 복판의 절대 고독자로 선 내 실체를 꼭 한 번 대면하고 싶었노라는 산 사나이들의 응답이 메아리 되어 울리는 히말라야, 여전히 인간의 정복을 거부하는 신령스런 설산. 그곳에 남겨진 박영석 대장 일행의 푸른 정신도 우리의 뇌리에 낱낱이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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