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바람 장터마당
‘12월 27일에 장이 섰다. 소와 송아지를 몰고 오는 자가 있고, 소 두 마리를 몰고 오는 자가 있고, 닭을 안고 오는 자가 있고, 팔초어(八稍魚:문어)를 들고 오는 자가 있고, 돼지의 네 다리를 묶어서 들고 메고 오는 자가 있고, 청어를 묶어서, 북어를 안고, 연초(煙草)를 겨드랑이에 끼고, 섶과 땔나무를 등에 메고, 누룩을 등에 지고, 쌀부대를 어깨에 메고, 곶감을 안고, 종이 묶음을, 대광주리를, 미투리를, 큰 동아줄을, 짚신을, 무명베를, 엿과 떡을 양손에 쥔 어린아이를 업고, 고리짝을 등에 지고, 바가지에 두부를 담고, 주발에 술과 국을 담고.... ’ 각기 지니고 오는 물건의 품명과 모양새만 바뀔 뿐 사람, 사람, 사람으로 이어지는 문장은 두 페이지 분량의 글이 끝나도록 이어졌다. .
지금으로 치면 르포작가다. 주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특유의 세밀한 필치로 남긴 조선시대 문인 이옥(李鈺)이 1799년에 쓴 당시의 시장, 그러니까 저자거리의 풍경은 금방이라도 당시의 인정물태와 떠들썩함이 고스란히 전해지지 않은가. 팔도의 물건들이 모이며 투박한 인심과 정이 넘쳐나는 활기찬 곳이 예나 지금이나 시장이다.
지난 4일 내가 사는 곳의 시장이 긴 기간의 공사 끝에 말끔한 모습으로 개장하던 날, 큰 개업잔치. 우리 부부도 잔치마당의 흥겨움에 대한 기대로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버스는 만원사례였고 상설시장과 5일장을 통합해서 현대적 시설을 갖춘 전통시장으로 재탄생한 이른바 퓨전시장은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바라건 데 매 장날의 정경이 이러하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슬슬 뒷짐 지고 인파 속을 헤집었다. 어슬렁어슬렁 한가로이 장을 도는 즐거움이 꽤 쏠쏠했다.
161개 점포가 손님맞이로 함박웃음, 풍물패의 장단에 맞춰 자꾸 덩실거려지는 발걸음이다. 이윽고 발걸음 멈춰진 곳은 갖가지 약초 파는 곳. 구기자, 행인(杏仁), 두릅, 율무, 결명자, 오가피, 으름, 수세미, 마.... 등등, 우리 들판에서 나는 식물들의 이름이 옛 친구인 양 정겨워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삼삼오오 정담에 곁들여 뜨끈한 국물을 나누는 가게 안 풍경의 유혹에 이끌려 들어간 국밥집도 붐비긴 매한가지였다.
주말 장터는 날개 젖은 새들의 군락지
퇴행성 시간을 싣고 와 그도 좌판을 벌인다
얼굴색 다른 사람들이 글자판의 자음과 모음같이
마주 서서 독수리 타법으로 흥정을 한다
긴 부리 맞대고 내력을 묻는 곳
방광이 불어나도 오줌을 참아야 하는 야외 장터
서로의 입냄새 확확 풍기며 각진 생의 모서리를 다듬는 이들이
정오처럼 불끈 솟아 기지개 켜는 곳
시 속 펼쳐진 풍정처럼 모름지기 장터는 정 넘치는 만남의 장소다. 독수리 타법처럼 서툰 흥정이 오가고 어깨 스치다 만난 초면에게 꼬치꼬치 고향을 묻기도 하는 어울림의 마당, 오줌이 마려워도 참을 만큼 재미난 장소, 누가 그랬던가. 생이 기진해지면 자신은 버릇처럼 재래시장을 찾는다고. 그 곳에서 잃었던 삶의 용기를 회복한다고.
스무 살 무렵이었을까.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도 장터인으로 유입된 적이 있었다. 꽤 조리 갖춘, 말솜씨라면 결코 뒤지지 않는 나를 눈여겨 본 집안 삼촌이 자신의 처가붙이의 가게, 그러니까 서울의 남대문 시장의 점원으로 추천한 것이다. 북풍받이 출입구에서 두 번째쯤에 자리한 점포였다. 삼촌의 장담을 믿은 주인의 다정한 눈빛은 머지않아 어두운 실망의 빛으로 변했다. 손님맞이 거간은커녕 새파랗게 얼어버린 남도처녀의 입은 떨어지지도 않았으니까. 삼촌은 미처 몰랐을 게다. 나라는 사람은 철저한 탐색 후 어지간히 친해진 다음에야 상대와 술술 말이 풀리는, 늑장 소통대화형이라는 걸. 설상가상 숫자엔 젬병이었다. 겨우 두 밤이나 견뎠을까. 집에 돌아온 나는 한 사흘 끙끙 앓았다.
그 매섭고 혹독하던 서울의 추위를 생각하면 아직도 오싹하다.
‘스카브로에 장에 가거든 전하여주게 그리운 마음.
내가 예전에 사랑하던 그 곳의 여인에게’
오늘 그에 못잖은 날씨 속에서 입 속에 맴도는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숫기 없고 빼빼 마른 그 처녀를 회상한다. 흰머리 허연 주름살투성이 손님들의 손을 부여잡고 아짐, 오빠를 연발하는 시장사람들, 그들의 넉살이 존경으로 다가오는 까닭을 그 누가 짐작할까. 기대하는 건 상술에 앞 서 정직한 상도(商道)다. 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의 품 같은 훈훈함과 순박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멋진 장터마당을 나는 감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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