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유년의 길을 가다.
남편의 출근길을 따라나섰다. 봄볕은 그 파리한 기색만으로도 충분히 눈부셔서 나는 벼르던 봄나들이를 나선 듯 들떴다. 꽤 오랜만의 외출 목적은 수를 놓을 때마다 갈증나게 하던 색색의 수실을 살 수예점과, 밋밋한 청코트에 달 장식을 사러 단추도매상가에 가는 것, 그 외에도 전근가실 제 선생님께 드릴 책을 골라주라는 딸의 부탁으로 서점에 들르는 것까지 도합 세 가지나 된다.
수예점과, 단추집, 그리고 서점. 내 목적지를 다시 한 번 되새긴 후에야 나는 내가 설레던 진짜 이유가 봄볕에 있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 나를 짓누르는 갖가지 근심덩어리들을 내 집 기둥에 꽁꽁 묶어놓고 나선 듯한 홀가분함, 그보다는 수예점과 단추집과 서점이 내가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 불현 듯 찾아나선 정다운 지인들의 존재와도 같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바느질을 좋아하는 줄을 미처 몰랐다. 빨래, 청소, 요리를 좋아하는 편인데 반해 나물다듬기를 끔찍이 싫어한다. 몇 시간씩 앉아서 바구니 가득 담긴 콩나물 머리와 꼬리를 떼내는 작업에 몰두하는 여자들에게 존경심마저 품을 정도다. 고작해야 한 끼 먹을 것에 그런 정성을 들여야한다는 데 대한 반감도 없지 않다. 아무튼 그런 쪽으로 인내를 갖지 못한 나는 그동안 될 수 있으면 미가공의 음식을 선호한다는 핑계로 꼼꼼치 못한 나를 변명해 온 셈이다. 그런 내가 종일 골무를 끼고 앉아 수를 놓는 작업을 전혀 지루해하지 않는다는 게 의외였다.
‘늑대’. 이건 유년시절 어두운 방구석에 박혀 뒹굴뒹굴 책만 뒤적이는 내게 외할머니가 붙여주신 핀잔성 별명이다. ‘가시네들은 어찌됐건 걸레를 들고 설쳐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셨던 외할머니 눈에는 게으르기 짝이 없는 둘째 외손녀의 행실이 눈에 거슬릴 수밖에. 어머니께선 음식 솜씨는 뛰어났지만 유난히 뒷설거지를 싫어했다. 그래서 큰집을 청소해줄 언니와, 주방을 담당할 언니, 말하자면 식모가 둘씩이나 있었던 덕분에 그 시절 우리 세 자매들은 자질구레한 집안일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다. 어쨌든 나는 외할머니가 나를 꾸중하실 때마다 뱉으시던 ‘늑대’, 당신의 어조에서 모락모락 풍기던 나른한 게으름을 한없이 누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언제였을까. 사는 게 도통 허둥지둥이다 보니 내 속에 둥우리를 틀고 있던 한 마리 늑대는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대신해 들어온 대단히 약삭빠른 獸種이 여우인지, 뭔지를 따질 겨를도 없었다. 햇볕 쏟는 마루 끝에서 손끝 까닥 않고 멍청하게 있어도 하염없이 좋기만 하던 날들이 不知不識間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 내가 요즘 들어 그 옛날 늑대의 게으름을 다시 피우고 있다. 굳이 따지면 그 게으름은 본의 아닌 속수무책인 상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만사에 손놓고 있다는 게 더 정직하다. 누군가 다가와 날 선 가위를 들고 제 털을 싹둑싹둑 베어내도 움쩍 않는 바보 늑대, 적의를 반납하고 얻은 비굴한 평화다.
그런 내게 다가온 것이 바느질이다. 헝겊에 놓여질 모양에, 색에 골몰하다 보면 훌쩍 지나가던 내 지리멸렬한 하루. 하지만 항상 념 뿐으로 색색의 실을 구비할 엄두는 못 내었던 나다. 서점행 역시 내게 언제나 가슴 뛰는 일이지만 구슬 달기도 바느질의 응용이니 이 두서 없고 장황한 나열들이 수예점을 찾는 나의 환희를 반이나마 보여주려나.
차에서 내려 삼복서점을 가기 위해 차량 통행이 막힌 不動橋를 지난다. 옛 이름은 불로다리다. 다리 건너 양림동에서 살던 내 친구와 헤어지기 아쉬워 곧잘 서성거렸던 다리, 스물 한 살 무렵엔 다리 앞 불로다방에서 휴가 온 H가 나를 불러내곤 했다. 그의 마른 얼굴, 낮고 진지한 목소리를 듣던 추억의 밤들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아, 이내 내 집이 있던 거리를 지날 땐 급작스레 달겨든 해일에 맞은 선박처럼 내 몸체는 갑자기 휘청거렸다.
‘여기 어디쯤 길을 잃어 헤맸다는
언저리를 더듬어간다 나도 조만간
눈구덩이에 박히거나 안개 속에 묻히거나
사람과 짐승 발자국을 따라간다
엉뚱한 곳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걸음이 자꾸 휘청거린다
온몸의 털 곧추서서 긴장하는데
내 몸이 문득 나에게 말한다
그래도 나는 새장 속에서 뛰쳐나왔어
이렇게 없는 길 찾아가는 것이 더 좋아!
아무리 버둥거려 벗어나고자 해도
도로 제자리에 오기만 하는 삶은’
아무리 버둥거려 벗어나고자 해도 도로 제자리에 오는 삶이라니! 어지럼증 이는 머리 속을 지난 밤 읽은 시인의 시가 물보라처럼 퍼진다. 나라는 선박에 달겨든 해일은 내게서 무엇을 앗아간 것일까? 이 유년의 집이 있는 길목에만 들어서면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절망감,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잃은 듯한 상실감에 번번이 휘몰린다. 그 왈칵 몰려드는 그리움과 일시에 달겨드는 분노가 겹친,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함과 견딜 수 없는 통증이 한데 뒤섞인 듯한, 그 묘한 느낌을 누가 짐작할 것인가.
‘비켜, 나는 지금 서점과 수예점과 단추집을 가는 길이야.’
‘너는 지금 결코 행복하지 않아.’ 누군가 내 앞을 완강히 가로막으며 이런 질책을 했을 리 만무건만 나는 단호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점은 붐볐다. 표지의 티벳 소녀의 눈동자가 漢詩集을 사려던 내 의도를 단숨에 수정케 했다. 휘리릭 넘기는 페이지에서 ‘삶의 불가피한 슬픔’이라는 문구가 내 가슴에 덜컥 걸리기도 했고. 이어 들른 단추집의 별스팡크는 너무 비쌌다. 하지만 좋은 인상의 주인이 내가 자기집 단골이라고 착각하는 말을 차마 거역할 수 없어 소용 닿을 곳 없는 반짝이별 장식을 다섯 개나 사는 만용을 부리고 말았다. 세상에! 아무리 찾아도 수예점은 없었다. 한성모사라는 털실집에서 가까스로 구입한 열 세 빛깔의 색실이 결국 집을 나서던 때의 내 설렘을 되찾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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