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이웃사촌
김현임(수필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새 이웃이 생겼다. 10여년 만에 맞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인사성 밝은 신혼부부, 나는 틈만 나면 그 새댁네가 궁금해 고개를 빼들고 우리 집 뒤편을 기웃댄다. 새내기 부부 합심하여 집짓기에 바쁘더니 어느새 가구를 들이느라 여념이 없는 눈치다. 얼마 후면 귀여운 아가들이 생겨 내 집 마당에서 아장아장..... . 여기까지 쓰다가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만다. 이 무슨 동화의 서두이련가. 마을 어르신께서 이런 시골에 새집을 짓는 건 자재값 폭등한 이 판국에 참으로 미련한 일이라고 하셨다. 하여 새 이웃은 우리 집 뒷마당 아슬한 높이의 가죽나무 위에 집을 지은 까치부부다.
뉴스 보기가 겁난다. 미국산 쇠고기 파동에다 조류 독감의 공포가 전국을 휩쓸고 있다. 며칠 전 신문엔 ‘저리 가!’라는 제호로 비둘기를 발로 차는 소녀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비둘기를 발로 차는 잔인한 소녀라니! ‘장미를, 비둘기를, 백합을’ 하고 시작되던 ‘소녀’란 시가 흔들린다. 쫑쫑 조롱 속에서 걸어 나와 앙증스런 부리로 빼곡한 점궤상자 속에서 콕 집어주던 운세에 일희일비하던 젊은 날의 추억도 이젠 전설의 장면으로 남을까.
우리나라에선 조류 인플루엔자 환자가 아직 없다.
어린이 대공원 갔어도 감염 가능성 거의 없다.
항목마다 꽤 친절한 설명 곁들인 ‘AI 감염 과잉 공포도 방역하라’는 진압성 기사에도 모두의 불안은 여전하다. 급기야 서울 시내 전역의 가금류를 폐기처분하기에 이른 작금의 사태를 보며 과연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다소곳하지 않은 공격적인 성품이 만병을 만든다고 했다. 열악한 환경에 견딜 수 없어진 새들이 지들을 잔뜩 성깔나게 만든 장본인인 우리를 향해 펼치는 복수전인가. 실로 우리들의 오만은 극에 달했다. 좁은 우리에 갇혀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포로들의 반란이다. 양계장 닭과 오리들이 핏발 선 눈으로 내놓은 ‘너 죽고 나죽자’란 최악의 카드다.
나무 그늘을 자못 데데하게 거닐며 개미, 지렁이, 거미, 딱정벌레, 진딧물 따위를 포식하던 그 아늑하고 평화롭던 시절이 그리웠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기꺼이 보시하던 아름다운 체계를 흔들어버린 건 탐욕자라 불려 마땅한 우리들이었다. 제 아무리 미미한 미물의 삶에도 우주의 온 힘이 작용한다 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궤를 끊어 버렸다. 자연은 얼마든지 통제할 수 있다는 저 엄청 난 착오, 그래서 벌어진 인간과 자연, 필연적으로 뿌리 깊던 이웃 간에 벌어진 처절한 전쟁이다.
닭, 오리를 안전하게 식용할 수 없음만 안타까울까.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로와 지혜와 용기를 새들에게서 배웠던가. 바닷가 욕심 없는 노인의 손에 사뿐히 내려앉아 欺心이라는 단어를 깨닫게 해 준 건 갈매기요,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먹는다는 근면의 덕목을 몸소 일러준 것은 曉鳥, 어버이 섬기는 反哺之孝의 까마귀다. 그 무엇보다도 새들은 날개라는 천혜의 신체기관을 통해 ‘飛翔’이라는 꿈의 단어를 우리에게 선물해 주지 않았던가.
닭, 오리를 키우는 체험학습실이나 학교의 사육실 둥에서도 물론이요 야생 조류도 불필요하게 접촉치 말아야한다고 이른다. 가차 없이 매몰 당하는 조류들을 보는 가슴 쓰라림을 어찌 말로 다하랴. 아름다운 유선형 날개로 창공을 가르는 새들을 바라보는 은총마저 사라진 삭막한 세상, 비단 새 뿐 아니다. 우리 곁에서 작별의 통고도 없이 사라지는 멸종동식물들의 이름은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간다. 너그러이 용서하는 마음, 즉 관용의 마음이 자연이라 배웠건만 충고마저 포기한 벗들의 눈에 드리운 살벌한 분노, 별리의 기운을 어느 융숭 깊은 이 나서서 가라앉힐까.
그들과 共生共樂하던 날의 기꺼움은 사라졌다. 물은 물에 사는 것들의 오롯한 영역이, 하늘은 날 것들의 치밀한 도로망이 있다. 그 사잇길 오가며 서로에게 부족한 살림살이를 더불어 나누는 互惠의 이웃이어야 했다. 친구가 사라진 동구의 기억을 떠올려 보라. 간다온다 기별도 없이 자취 감춘 친구 집을 들어섰을 때의 허망함이다. 이러다간 우리 인간만이 지구라는 삭막한 벌판에 남아 있게 될 것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공포도 밀려온다. 이제라도 이웃 간의 예를 차려야 한다. 사냥을 나가기 전 그날의 사냥감에 대한 공손한 묵념을, 하다못해 손수 심은 밭작물을 수확할 때도 무릎 꿇고 작물에 대한 감사를 올리던 옛 사람들의 지혜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가 밭에서 깡그리 훑어오지 않은, 우리 외의 목숨들을 염두에 두고 안 거두어들인 것들이 많이 남았으면, 이 지상에서 우리의 의도만이 옳고 우리만이 지상의 모두를 누려야한다는 어리석은 계획 밖에 있는 게 더 많아졌으면, 기원하고 기원하던 시가 로버트 프로스트의 ‘안 거두어들인’이었던가. 멀리 있는 사촌보다 낫다는 소릴 듣는 참이웃이 되기가 어디 그리 쉬우랴. 호잇호잇 경쾌한 음색으로 나의 아침을 열어주는 공에 대한 답례는커녕 성품 너무도 겸손하여 여즉 일면식조차 사양하는 내 이웃에게도, 깍깍깍 마주칠 때마다 반가운 인사를 잊지 않는 내 정다운 이웃에게도 자꾸 면목 없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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