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 (10)
여기서 족히 인(仁)을 볼 수 있나니(3)
다산이 내려준 삼근계는 황상에게 있어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충격이었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의 어린 소년이었지만 세 가지 병통에 있음에도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며 부지런하면 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스승 다산의 가르침은 세상이 열리는 감동 그것이었다.
집안이 좋아서 반가(班家)도 아니요, 전답이 많아서 가난을 면하고 사는 것도 아니며, 머리가 좋아서 남들보다 앞서는 것도 아닌 자신에게 ‘삼근계’란 방편을 일러줌으로써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다산이었다.
다산의 이 같은 가르침은 서산대사의 제자 청매선사가 했던 말과도 일맥상통된 말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제아무리 진리를 배워도 이익이 없다’는 말. 그러므로 황상은 스승 다산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자세가 갖추어져 있는 소년이었다.
황상은 그 가르침에서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과도 같은 엄청난 희망을 느꼈다. 이보다 더 큰 희망과 설레임이 이디에 있을 것인가.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목마른 이가 물을 생각하듯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화두를 참구하면 비로소 높은 도를 이룰 수 있다는 서산대사의 말과도 같은 다산의 가르침은 황상에게 처음부터 정확히 길 안내를 한 셈이었다.
그러나 황상의 학문적 욕구는 아버지 황인담의 술병으로 인해 더 이상 정진을 못하고 붓과 벼루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동생이 어리고 집안조차 가난했기 때문이었다. 황상은 다산 문하에 들어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드러누운 상태였으므로 황상의 마음은 늘 무거웠다. 그러나 하루도 쉬지 않고 아버지의 병시중을 들었는데, 끝내 아버지는 1807년 3월 16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해 황상이 아들을 낳은 해이기도 했지만 손주의 얼굴은 보지 못한 채였다.
아버지는 임종을 하기 직전 두 아들을 머리맡에 앉혀놓고 마지막 유언을 했다. 숨이 한참동안 멈췄다가 휴우우, 길게 내뿜는 아버지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가 죽거든 삼일장을 해라.”
“네.”
“그리고 시묘(侍墓)도 하지 마라. 그냥 이대로 가고 싶다아.”
“아버니임!”
황상은 크게 아버지를 불렀지만 고개가 옆으로 꺾어진 황인담은 싸늘하게 몸이 식어갈 뿐이었다.
황상은 한바탕 곡지통을 끝낸 후 이내 정신을 수습하고 장례절차를 하나하나 밟아갔다. 그 때 다산이 황인담의 부음을 듣고 피부병 때문에 곧장 조문을 할 수 없는 대신 편지를 보냈다. 내용인즉슨, 네 어른이 큰 병 끝에도 너는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니 이를 슬퍼하지만, 죽을 먹더라도 몰래 고깃국물을 먹어 위장의 기운을 북돋아야 한다는 말과 지나치게 음습한 빈소를 지키다보면 반드시 몸을 상하게 되니 주의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문을 가지는 못했지만 다산은 부친의 장례를 삼일장으로 한다는 말을 듣고 크게 노했다. 황상과 함께 고성사에서 한 겨울을 보내면서 <예기>에 대해 논하고 공부한 것이 부질없었다는 생각과 함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무릇 사람들이 부모를 모심에 있어 大抵人子之於父母也
먼저 뜻을 받듦이 마땅하고 必當先意承志
정성의 힘을 다하되 竭力盡誠
따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며 如恐不及
뜻하는 대로 잘해내지 못할까도 생각하면 如將不勝然後
겨우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게 되어 섭섭함이 없게 된다 其庶幾乎於子道無憾也
다산은 황상에게 이렇게 부모를 섬기는 법을 가르쳤건만 잘못 가르쳤다는 생각에 분을 삼키지 못하다가 아내 마음을 고쳐먹고 편지를 보냈다. 내가 무슨 말을 다시 하겠느냐만, 내일 당장 장사를 치른다니 망극할 따름이다. 만사(輓詞)를 지어 정을 표하니 만사를 널 곁에 두라는 내용이었다.
황상은 스승 다산이 직접 조문을 오지 않았지만 편지와 만사를 보내 조상을 해온 일에 그저 감사한 마음이었다. 황상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삼일장으로 장례를 무사히 마쳤는데, 나중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삼일장을 고집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은 다산은 다시 산역(山役)을 잘 치렀는지 편지를 보내 그를 위로했다.
황상은 아버지를 삼일장으로 치른 후 삼우제 역시 생략했다. 아버지가 임종할 때 삼우제조차 지내지 말라고 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가묘일망정 당연히 찾아가 봉분이며 주변의 상태를 살펴보고 나서 올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시묘조차도 하지 않았다.
그런 황상을 소식을 들은 다산은 드디어 크게 노하고 꾸짖는 글을 보냈다.
--사흘만에 장사를 지낸 것이 비록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는 하나, 너의 정리에 있어서는 편안하게 집에 있는 것은 절대로 예가 아니다. 내 생각에 안석이는 집에 남겨두더라도, 너만은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5월 보름까지는 있어야 한다. 애초부터 들어온 것으로 치면 석 달간 장사 지낸 것과 그 예가 서로 같다. 집안의 의론이 비록 하나로 귀결되지 않더라도 절대로 흔들려 뜻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내일 산소 아래로 나가도록 해라. 다만 그믐과 보름에 들어와서 제사에 참여하고, 그 밖에는 늘 산소 아래 있어야 할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무덤에 곡을 하고, 한낮에 또 곡을 해서 3월 보름께까지 해야 한다. 어버이가 돌아가셨는데, 사흘 만에 들어다가 산속에 놓아두고, 집안사람이 가서 모시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이는 오랑캐나 다를 게 없다. 반드시 결단해서 행하도록 해라. 정민 해석
다산은 편지를 보낸 후 다시 황상이 시묘를 했는지 알아보았다. 삼일장은 유언 때문이었다 해도 시묘까지 안 하는 것은 다산의 성품 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산 속에 그대로 방치한 채 지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한낱 오랑캐나 다름없다고 꾸짖었지만 사실 확인을 하고 싶어서였다.
황상은 아버지의 유언을 그대로 지킨다는 것은 크게 죄가 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만큼 지쳐있기도 했다. 병수발과 장례도 그렇지만 식솔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위치가 더 힘들었던 황상이었다. 하지만 다산은 다시 제자를 꾸짖는 말이 송곳처럼 날을 서 있었다. 아니, 아예 제자가 되지 않아도 좋다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는 말을 쏟아냈다.
“그래, 이놈아. 날마다 침실에서 두 끼 먹고 지내는 것이 그리 편하더란 말이냐? 어버이가 세상을 떠나면 마땅히 삼일장은 물론이려니와 시묘를 행함이 마땅하거늘 그것을 저버린 네가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 고금천지에 너 같은 놈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너는 이제 스무 살을 먹은 사람으로 집안일도 마땅히 나서서 해야 하고 조석의 끼니를 거르면서 돌아가신 어버이를 생각하는 게 자식의 도리이거늘 정녕 너는 더 이상 사람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구나. 이제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다. 당장 산소에 가서 시묘를 해라. 그러하지 않으면 너는 내 제자가 아니니······.”
황상은 몸 둘 바를 모른 채 스승 다산의 말대로 시묘살이를 했다. 두 달 간 그렇게 함으로써 스승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1808년 3월 15일은 아버지가 세상을 하직한 지 1주기가 되던 날이었다. 그 때까지 그는 아버지를 좋은 땅에 새로 모시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은 피폐했고 어려웠다. 아버지의 와병으로 인해 살림 꼴이 말이 아니게 어려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이웃집에서 됫박쌀을 꾸어다 먹는 일까지 있었다. 당연히 책 한 줄 읽지 못했고, 붓질 한 번 해보지 못한 세월이었다.
스승 다산은 그 때 황상에게 편지를 보내 소상(小祥)을 마쳤으니 네가 애통하고 망극하겠으나 형제 중 한 사람은 묵재(墨齌)에 와서 공부할 것을 종용했다. 그동안 중단됐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것을 말했지만 황상은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스승 다산에게 하소연했다.
-- 스승님의 근념으로 무사히 부친의 장례절차를 마쳤고 이제 1년이 되어 소상 또한 무사히 보냈으나 아버지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을 마련해 드리지 못해 그 불충함이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아버지의 봉분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초라한 곳에 누워계시는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옮겨 모시는 것이 자식의 도리 중 으뜸일 것인데도 마땅한 땅과 그에 따른 비용도 걱정이어서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편지를 받은 다산은,
“산역이란 쉬운 일이 아니어서 네 근심이 크구나. 그렇다고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산역이니 기일을 어겨서라도 반드시 행해야 할 것이다”
며 답장을 해왔다.
그 후 황상은 스승 다산의 말대로 무사히 아버지의 만년유택을 지어드렸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자 비로소 공부할 결심을 했다.
“형님. 형님은 평생 이곳에서 사실 것 같구만이라.”
동생 황경이 차 한 잔으로 입을 축인 후 말했다. 형 황상이 사는 모습은 여전히 애옥살이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삼시세끼를 위해 텃밭을 만들고 개울물을 막아 논다랑이를 만들어 벌어먹는 농사 뒤끝이 풀칠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었다. 그런데도 형 황상의 눈빛은 한없이 형형해서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좁은 방안에 차곡차곡 쌓여진 버려진 종이더미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얼마나 덧칠하듯 붓글씨를 썼는지 모아둔 종이더미는 앞뒤로 새까맸다.
“차나 드시게.”
황상이 찻그릇에 차를 부어 동생에게 권했다. 그러나 황경의 눈길이 책상 아래 곱게 개어진 서찰 하나에 멈췄다.
북부자중(北夫子仲)이란 말로 시작된 글씨는 형 황상이 쓴 필적이었다.
“형님. 무슨 사연이 있길래 이 편지는 이러저러하니 합첩한다고 써졌는디 뭘 보관한다는 말이당가요?”
“오래 된 일이지만 내가 다시 한 번 스승님의 사랑을 느껴볼라고 꺼내놓은 것이네. 그 분 역시 돌아가셨제만 손암 정약전 선생생님의 친필 아닌가.”
“아, 형님 얘기가 온통 담겨져 있었다는 정약전 선생님의 친필에 합첩을 했다는 말씀이구만이라.”
스승 다산은 평소 둘째형님인 정약전의 안부에 대해 몹시 궁금해 했었다. 네 살 위인 정약전은 나주 율정에서 헤어진 후 만날 수는 없지만 자주 음신(音信)이라도 주고받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했으나 뱃길이 워낙 멀고 인편을 얻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산은 보은산 우두봉을 자주 오르곤 했다. 절해고도 우이도(牛耳島)가 보일 리 만무했지만, 탐진바다 저 바닷길 따라 가다 보면 우이도에 닿을 수 있으리라는 상상과 함께 눈이 아프도록 우이도 쪽을 향해 망연스레 바라보는 다산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신이 오르는 산 이름이 우이봉인데다 보은산 우두봉과 우이봉 두 봉우리가 불쑥 솟아오른 모습을 형제봉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더욱 산 이름에 애착이 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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