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연재소설 (16)
만약에 봄바람이 내 맘 알 것 같으면(1)
광음(光陰)은 흐르는 강물 같아서 덧없이 흘러가는 법이었다. 봄이 오면 어느 틈에 여름이고 여름인가 싶으면 가을은 저만치 달려왔으며 가을이 오기가 무섭게 겨울이 찾아왔다. 사계절이 간밤 꿈을 꾼 듯 꿈속을 뒤지듯 흘러갔으니 10년 세월 역시 어제 일만 같았다.
천태산 당고랑 안은 그야말로 황상에게 있어 좋은 땅이었으니 유인의 삶을 살아가기가 안성맞춤이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황상에게 정학연이 한 장의 편지를 보내왔다.
스승 다산이 위독했을 때 천리 길을 달려가서 약을 달이고 별세함에 따라 다시 상복까지 입고 내려온 지 8년만이었으니 ‘이 무정한 사람아!’라는 말을 듣고서 할 말이 없을 터였다.
이 사람, 황상! 어찌 그대는 그리 무심하신가? 병신년(1836년) 2월 19일을 생각하면 문득 눈물부터 나온다네. 꿈속에서나 그대를 만나볼 뿐 이렇게 지내고 있을 때 그대는 논과 밭을 가꾸면서 시를 짓고 경전을 공부하는 동안 내 생각을 하고 지내는지 모르겠구려. 은거하며 지내는 근년에는 손수 밭 갈아 도의 맛이 날로 깊어만 가겠구려. 하지만 얼굴과 머리털은 능히 쇠하여 시들지는 않았나 모르겠소. 나는 3년 동안이나 독한 학질에 걸려 고약한 증세가 번갈아 일어나 점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있소. 올해 나이가 예순 둘인데, 모습은 마치 마른 나무 등걸과 같구려. 내 모습을 본 사람은 모두들 염려하며 위태롭게 여기곤 한다오. 스스로도 남은 날이 1년을 못 넘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소. 나와 그대가 다시는 이 세상에서 얼굴을 마주하지 못할 터이니 어찌 크게 구슬퍼하지 않겠소. 하지만 그대도 육순이 다 되어 가는지라 천리 길에 나를 찾아오기는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울 것이오. 나는 남쪽을 향해 한 걸음도 뗄 수가 없고 보면 그 형세가 장차 영영 볼 수 없을 것 같구려. 또한 어찌하겠소. 내 그대에게 바라기는, 모름지기 아름다운 덕을 쌓기에 더욱 힘써서 고상하고 욕심 없이 살아 「조선고사전 朝鮮高士傳」에 드는 것이라오.
이 몸은 아침저녁으로 죽을 듯한지라, 두륜산 봉우리에서 길게 휘파람 불며 눈길을 내달리던 때를 가만히 생각하면 아득한 전생의 일만 같다오. 40년의 광음이 흐르는 물과 같아 우리 두 사람이 다시는 손을 잡아보지 못한 채 내가 먼저 길을 떠나게 되니 참으로 부싯돌이요, 바람 앞에 등불이라 하겠소. 과거 보고 가는 귤동의 인편이 있기에 아픈 것을 무릅쓰고 어지러이 쓰오. 어느 날에나 손안에 들어가게 될지 모르겠구려. 이만 줄이오. 밝게 살펴주길 바라오.
갑진년(1844) 3월 10일 유산의 병든 늙은이 학연 돈수 <정민 해석>
황상은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낯익은 서체가 마치 곁에 있는 듯 정학연의 채취가 느껴졌다. 그동안 편지 한 장 보내지 못했지만 잘 지내고 있으리라 여겼던 그의 편지 내용은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 툭 던져놓은 것처럼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황상 역시 학연처럼 어찌 편지를 보내서 안부를 묻고 이쪽 생활을 시시콜콜 말하고 싶지 않았으랴만 인편이 없고 보면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설령 인편이 있다 하더라도 평소 교류가 없다 보니 부탁을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었던 터였다.
그런데 시를 짓고 경전을 공부하면서 내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과 스스로도 남는 날이 1년을 못 넘기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 황상은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륜산 유람을 기억하면서 그 때 눈길을 내달리던 때가 전생의 일처럼 느껴진다고 말했지만 어찌 그 추억뿐이겠는가. 1805년 겨울, 겨우 열여덟 살의 나이 때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내려 온 정학연과 서로 인사를 나눈 후 고성사에 있는 그에게 시 한 수를 보내지 않았던가. 스승 다산의 분부를 받들어 황상은 그에게 시를 보냈는데, 「두상수의 견회 시를 차운하여 고성암에 있는 유산의 나그네 숙소로 보내다」란 제목이었다. 두상수는 두보(杜甫)를 가리킨 말이고, 유산은 정학연의 별호였다. 공부를 시작한 지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그의 시는 다산과 정학연에게 충격을 주었었다. 다산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고, 정학연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시 중에서,
남녘에는 무슨 일로 내려왔을까 南來竟何事
「주역」을 알기 위해 공부하고자일세 周易明授受
하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는 정학연이 부친을 모시고 「주역」을 공부하기 위해 천리 길 마다않고 내려온 게 아니냐는 말이었다. 그러면서 시원스레 공부를 해서 우뚝 선 다음 큰 집 버틸 인재가 되어달라고 말한 후, 두터운 은혜가 있기를 앙망한다는 말도 곁들였다.
황상은 정학연을 처음 대할 때 이 같은 마음으로 대했고, 1805년 대둔사에서 혜장이 고성사에 찾아왔을 때 다산과 혜장이 「주역」에 대해 토론하다 정학연과 황상은 거기에 끼어들었다.
이 때 다산은 딱딱한 주역은 잠시 접어두고 시 짓기를 하자고 나섰다. 네 사람이 돌아가며 시를 짓자는 것이었는데, 누가 반대할 사람이 없었다. 다산이 시 짓기의 규칙을 정하겠다며 조그만 옹기그릇 안에 운목(韻目)에 속한 글자를 하나씩 적어 넣었다.
“자, 하나씩 쪽지를 뽑는 거다”
다산이 가장 먼저 아무거나 하나를 추켜세웠다. 침노할 침(侵)자가 나왔다. 혜장은 림(林)자를 뽑았고, 학연은 음(陰)를 뽑았다. 황상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금(琴)자를 뽑았다. 계속 네 사람은 쪽지를 뽑으면서 시를 지었는데, 앞사람의 구절을 이어가는 시 짓기였다.
황상은 시 짓기에서 조금도 손색없이 앞사람의 구절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앞사람이 바로 정학연이었다. 그러므로 정학연이 지은 구절을 음미하며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마지막 순서이다 보니 황상은 40구절의 긴 시를 마무리해야 했는데, ‘이만하면 즐거움을 이루었거니 卽此成快樂 벼슬아치 부러울 것 하나 없네 未必慕纓簪’하고 마쳤다. 황상도 당당하게 시 짓기에 동참할 수 있었으니 정학연과의 인연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황상은 정학연의 편지를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마재를 찾아가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드디어 황상은 1845년 을사년 3월 15일 쉰여덟의 나이에 길을 나섰다. 계절은 걷기에 좋았지만 워낙 먼 길이었다. 10년 전, 스승 다산이 돌아가실 때 마재를 찾은 후 두 번째였다.
황상은 그 10년 동안에도 스승 다산을 어느 하루 잊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스승이 손에 쥐어 주던 쥘부채를 생각날 때마다 만지작거리며 그리움을 달랬었는데, 그 부채를 보따리에 넣었다. 그리고 18일간을 걷고 또 걸었다. 걷는 일은 어쩌면 즐거운 일이었다. 백적산에 갇혀 지낸 10년 세월을 잠시 접고 날로 푸르러가는 산천경개를 보며 걷고 또 걷는 일은 신바람도 나는 일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이게 누구여?”
황상이 나타나자 정학연은 방 안에서 붓글씨를 쓰다말고 버선발로 마당에 내려서며 소리쳤다. 편지를 두 차례나 보냈는데도 답장 한 번 없던 무심한 황상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기절초풍할 지경이었다. 정학연은 황상을 보자 두 손을 으스러져라 붙잡으며 눈물을 흘렸다.
“무심하다고 원망께나 했는데 예꺼정 왔구마.”
“송구스럽구만이라. 그래도 스승님을 잊어본 적은 없구만이라.”
정학연의 안내를 받아 방 안으로 들어선 황상은 엎드려 절을 올리고 나서 말했다. 황급히 맞절을 올린 정학연이 감격에 차서 황상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10년 세월이 흘렀네 그려. 10년의 세월이…….”
“스승님을 뵌 적이 엊그제 같구만이라. 돌아가신 날을 기억해서 곡(哭)을 올렸습니다만 어찌 그것으로 스승님의 은혜를 갚을 수가 있것소. 그나저나 스승님께 인사를 드려야지라.”
“그래그래, 그래야지.”
두 사람은 만년유택에 누워계시는 스승 다산의 산소를 찾았다. 뗏장을 한 장 한 장 올려가며 새봉분을 쌓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산소는 조금씩 헐어진 구석도 보였다. 황상은 절을 올리기 전 손에 쥐고 나온 부채를 석상(石床) 위에 놓았다.
“치원! 웬 부채인가? 왜 부채를 들고 와서 아버님께 보이시는가?”
두 번 절을 올리고 난 황상에게 정학연이 물었다. 그러나 황상은 그 말을 못 들었는지 고개를 떨군 채 한참동안 곡을 그치지 않았다. 나중에는 사뭇 어깻죽지를 떨어가며 곡지통을 하고나서야 황상이 입을 열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제게 준 부채구만이라. 이 부채를 보면서 항상 스승님을 생각함시로 살아 왔구만이라. 공부가 부진할 때도 공부가 잘 나갈 때도 이 부채는 제게 많은 힘을 주었지라.”
“세상에! 치원이 아버님을 그렇게 생각하며 지냈다니……. 병신년(1836) 2월이었으니 치원이 딱 10년 전에 이곳엘 왔을 때 아버님께서는 병환 중이었지 않았나. 아버님께서는 비록 혼미한 상태에서 치원과 이별을 했지만 접부채와 운서, 그리고 호주필(湖州筆)과 휘주묵(徽州墨) 등을 전별 선물로 주셨지. 그런데 아버님께서 별세를 하시자 부음을 듣은 치원은 도중에 달려와 상을 치루지 않았는가. 치원은 상복을 입은 채 강진으로 내려갔는데 지난 10년간 아무 소식이 없다 보니 도무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얼마나 서운하면서 또 그리웠는지 몰랐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홀연히 나타나니 꿈을 꾼 것 같구려. 내 얼마나 반가웠으면 신발을 다 거꾸로 심었을까. 그런데 치원이 손에 쥔 것을 보니 10년 전에 아버님께서 주신 부채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네.”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저는 이 부채가 스승님의 분신이라고 여기고 있구만이라.”
“고마우이, 정말 고마워.”
두 사람 다산의 묘 앞에서 한식경이 지나도록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 소식을 들은 학유가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학유와 수인사를 나누고 나자 이번엔 학연의 아들인 대림(大林)이 들어와 큰절을 올렸다.
저녁을 마치고 났을 때 학연이 황상에게 부채를 달라고 하더니 거기에 학연이 시를 지었다. 그러자 학유와 아들 대림이 학연이 지은 시를 이어 시 한 수를 완성했다.
쥘부채 들고와 옷깃에 눈물 가득하니
摺疊携來涙滿衣
지난 날 만남과 헤어짐이 오히려 또렷하다
當年逢別尙依依
내 아직 죽지 않고 그대 건강하니
吾猶不死君猶健
또 다시 강루에서 버들 솜 나는 것을 보네
又見江樓柳絮飛
이에 황상이 쥘부채 뒷면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 시 한수를 적어 냈다. 학연과 학유와 아들 대림의 시에 대한 화답이었다.
십년간 북쪽을 향해 만날 일만 생각했네
十年向北想摳衣
정익(鄭益)은 은혜를 품듯이 그렇게 지냈나니
鄭益恩存尙可依
만약에 봄바람이 내 마음 알 것 같으면
若使春風知客意
이별 나눌 때 남은 꽃잎 흩날리지 않으리
殘花應不別時飛
황상은 이 시에서 한나라 학자 정익을 언급했다. 은혜를 갚고자 하다가 오히려 죽음을 맞이한 정익을 언급한 것은 정학연의 깊고 웅숭한 마음을 높이 여긴 탓이었다. 황상이 들고 온 부채는 10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우정과 은혜를 상징하고도 남았다. 황상과 다산 형제는 그 부채에 각각 시 한 수씩을 지으며 서로의 마음을 담아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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