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고사성어 <37>
화호성구(畵虎成狗)
김현임(수필가)
종일 하염없이 눈은 내리고. 오슬오슬 한기(寒氣)처럼 밀려드는 어머니 생각.... . 행여 당신의 냄새라도 맡아볼까 뒷방의 낡은 옷장을 뒤졌다. 차마 버리지 못한 붉은색 엑스란 속치마를 반가이 큼큼 거리는데 툭 떨어지는 주머니! 수건의 호랑이 머리 부분만 용케 도려내어 안감까지 꼼꼼히 덧댄 복주머니는 분명 내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다.
내 집 벽에 붙은 포효하는 호랑이가 그려진 액자를 연신 쓰다듬으시던 어머니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면두거족(面頭據足) 형상장진목(形顙壯瞋目) 장염기불우(張髥氣不愚)’, 큰 낯바닥을 용맹스런 발에 의지하고 강건한 목, 부릅뜬 눈, 긴 수염이 영민하다는 운당 선생님의 화의(畵意)를 해득하시진 못하셨어도 어머니께서는 그림 속 넘치는 호랑이의 패기는 능히 포착하셨으리라. 당시 신문에까지 보도된 해남에서 포획된 한국호랑이, 그 주인공인 호랑이와 포수가 우연히 여관인 우리 집에 머물러서 비록 큰 개만한 크기의 어린놈이었긴 했지만 호랑이를 손으로 직접 만져보았던 옛집에서의 추억도 아련하다.
지금은 멸종된 호랑이를 어찌 기르겠는가만 하다못해 모형 호랑이라던가, 어떤 식으로든 호랑이를 집에 비치해놓으면 어떤 재앙도 다가오지 못 한다 신봉하셨던 어머니. 그러고 보니 당신은 유독 호랑이를 좋아하셨다. 새댁시절 깊은 산중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호랑이 새끼를 발견해 한참 데리고 놀았다는, 흡사 전설 같은 당신의 경험담도 그렇고 어디서 구하셨을까. 호랑이의 석물상(石物像)을 애지중지, 잦은 이사에도 잊지 않고 챙기셨다.
호랑이, 호랑이... . 때 아닌 호난(虎難)으로 연일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서울대공원의 호랑이다. 저를 돌보아주던 사육사를 중태에 빠트린 호랑이니 그 처리문제로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피 맛을 본 호랑이를 계속해 관람할 수 없으니 격리 하던가 사살하라’는 주장이고 ‘호랑이가 우리를 나와 사람을 물었다면 그건 야성을 가진 호랑이의 본능이니 절대 호랑이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옹호론도 만만찮다. 한.러 수교 20주년을 기념하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선물로 주었다는 로스토프라는 이름이 붙은 호랑이, 녀석은 제 우리를 떠나 좁은 여우 굴로 옮겨 받은 스트레스로 저지른 과오의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곶감과 호랑이’, 호랑이 등에 탄 사람’ 등등. 호랑이처럼 우리 전래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 또 있을까. 특히 ‘효자 호랑이’는 그 포악무도한 야생동물에 대해 애틋한 친근감까지 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느 마을의 효자가 병든 어머니의 약초를 구하러 나섰다. 오직 어머니를 살릴 약을 구해야한다는 일념으로 깊은 산골짜기를 헤매다가 덩치 큰 호랑이와 마주쳤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호랑이. 그러나 화살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효자는 결코 죽이지 않는 게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호랑이 굴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속담이 스쳤던가. 효자는 다짜고짜 호랑이를 향해 큰절을 했다. 제 앞에서 벌벌 떨기는커녕 넙죽 큰절부터 올리는 사람이라니? 더구나 짐승인 자신을 일러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신 제 형님의 환생(還生)이란다. 결국 호랑이는 효자, 아니 오랜 만에 해후한 동생을 붙들고 꺼억, 꺼억 굵은 눈물까지 떨구었다. 다음날부터 효자네 초가집 마당엔 날마다 갖가지 귀한 약초에, 살 오른 짐승들이 놓여있었다던가. 그런 우화의 폐해란다. 어른들은 물론이요, 어린 아이들조차도 사나운 호랑이를 맹수로 여기지 않는 착각에 빠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개를 그린다’는 뜻의 ‘화호성구(畵虎成狗)’는 애초 목표를 잘 잡아야지 실패가 없다는 충고를 담은 고사다. 후한(後漢)의 명장 마원에게는 형이 남긴 두 조카가 있었다. 그들의 장래를 걱정한 마원은 기나긴 전쟁터에 육신이 시달리면서도 틈을 쪼개 장문의 편지를 쓴다.
‘나는 너희가 남의 과실 듣기를 부모의 이름 듣듯 했으면 좋겠다. 귀로 듣더라도 입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 남의 잘잘못을 따지기 좋아하고 바른 법에 대해 망령되이 시비하는 것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내가 죽더라도 내 자손이 이런 행실이 있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용백고(龍伯高)는 돈후(敦厚)하고 신중해서 가려낼 말이 없다. 겸손하고 청렴해서 위엄이 있다. 그래서 내가 그를 아끼고 무겁게 여긴다. 너희는 그를 본 받아라. 두계량(杜季良)은 호걸로 의리를 좋아한다. 남의 근심을 함께 근심하고 남의 기쁨을 같이 기뻐한다. 맑고 흐림에 잃음이 없다. 부친의 장례 때 그가 손님을 청하자 몇 고을에서 일제히 왔다. 내가 그를 애지중지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백고를 본받으면 설령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삼가고 조심하는 사람은 될 수 있다. 이른바 고니를 새기려다 안 되어도 오리와는 비슷하다((각곡류목刻鵠類鶩). 하지만 계량을 배우려다 잘못되면 천하의 경박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범이라고 그렸는데 도리어 강아지와 비슷하게 되었다(畵虎不成反爲狗子)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는 호사유피요,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이니 마원이 염려함도 조카들이 혹여 두고두고 가문에 먹칠할 이름을 남기지 않을까에 대한 우려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내가 멘토로 삼을 전범(典範)이 될 만한 누군가도 드문 세상이다. 호랑이 가죽은 그리기 쉽지만 그 뼈를 그리기는 어렵고 사람의 얼굴은 알아도 그 속내는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畵虎畵皮, 知人知面不知心). 무려 160Kg에 달하는 몸무게에 2m30cm가 넘는 거구임에도 팔 내밀어 악수를 청할 만큼 친근해 보이지만 언제라도 내 목뼈를 공격할 수심(獸心)을 지닌 게 호랑이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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