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조정에서는 왜병이 부산으로 쳐들어왔다는 변보가 4월 17일 아침 들려오자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양원 등은 빈청에 모여 임금 뵙기를 청하고 있는데, 또 다시 장계가 올라오자 정말 전쟁이 터져서 부산성이 함락되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날 이일을 경상도 순변사로 삼고 성웅길과 조경을 좌우 방어사로 삼아 이일에게는 가운뎃길을 막고, 성웅길은 왼편길, 조경은 서편을 막게 하였다. 그러나 경상도로 내려가야 할 이일이 사흘이 되어도 내려가지 못하고 있었다. 최소한 날랜 군사 300명 정도는 되어야 좌우 방어사에게 각 100명씩 나눠주고 자신도 100명을 데리고 가야할 텐데 그 300명이 조정에 없었다. 점고를 해보니 대부분 100년 전, 200년 전 사람들이었고 거기서도 아전이랍시고 빠지기를 원했고, 글 쓰는 선비라고 빠지길 원했으며 군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일은 60여 명만 데리고 떠났는데, 계속 올라오는 장계마다 대구, 인동, 경주, 안동 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뿐이었다.
“김성일이 그 자는 왜국에 가서 뭘 보고 왔길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더란 말이더냐? 그자야말로 나라를 망하게 한 불출한 자가 아니고 무엇이냐? 당장 잡아들이도록 하라.”
임금 선조는 눈에 핏발까지 세워가며 호통을 쳤다. 김성일이 일본에 갔다 왔을 때 황윤길처럼 똑 같이 보고만 했어도 조정에서는 나름대로 대책을 세우고 방비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황윤길의 말 보다는 김성일의 말을 더 신뢰했던 게 오늘 날의 큰 환난을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선조 임금의 생각이었다.
경상 우병사로 있던 김성일을 끌어다 당장 국문을 시행하려던 임금 선조는 그와 같은 동인들이 한사코 만류하는 바람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김성일을 죽이시는 것 보다는 시방 왜놈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고 있사오니 그에게 공을 세워 죄 값을 치루는 게 옳은 줄로 아옵니다.”
임금 선조는 설령 김성일을 국문장에 앉혀놓는다 해도 그를 심문하고 말고 할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왜병을 물리치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아 왜적을 물리치려고 했다. 신립에 대해 거는 조정의 기대는 컸다. 더구나 신립은 임금 선조가 총애하는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인 신성군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신임을 하였다.
임금 선조는 신립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내리며,
“이일 이하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이 칼로 베라. 그대의 어깨에 이 나라 사직의 운명이 있음을 명심하라.”
하고, 궁성을 지키는 금군(禁軍)까지 편성해 주었다. 이리하여 신립은 조선군 8천 명과 장교단 80여 명, 또 3천의 기병을 가지고 조선의 최정예 부대로써 충주에 도착한 것은 4월 26일이었다. 신립이 서울을 떠났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너나없이 승전소식을 고대하였고, 제발 이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신립은 충주에 도착하자 조령을 지키자는 부하 장수들의 말을 완강히 거절했다. 예부터 조령은 산세가 험해서 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좁디좁은 오솔길 하나만 있을 뿐이었다. 처음에는 조령의 지형을 이용해 싸울 생각을 가졌던 신립은, 하룻밤 사이에 군사들이 상당히 도망친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한 번 도망간 군사들을 잡으려다간 잡으러 간 군사들까지 도망치는 법이었다. 그래서 신립은 단호히 조령을 버리고 단월역을 중심으로 왜적과 싸우리라 생각했다.
배수진(背水陣).
신립의 생각은 배수진이었다. 뒤로 물러서면 강물이 막고 있기 때문에 조련을 충분히 받지 못한 오합지졸 같은 병사들도 죽기로 싸울 것이므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선 기병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나머지를 보병으로 돌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날만 새면 군사들은 5백 명, 혹은 1천 명씩 도망을 쳐버렸고 이제 기병 3천만 남은 처지에 어떻게 해 볼 재주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왜적은 조령을 넘어버린 터여서 더욱 배수진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비록 배수진을 친다 해도 기병으로 왜적의 보병부대를 제압하려고 했으나 뜻밖에도 적은 보병부대를 앞세우며 나타난 거였다. 결국 신립은 비 오듯 날아오는 조총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이었고, 그 조총 앞에 군사들은 쓰러져나갔다.
신립은 무작정 남한강으로 달렸다. 적에게 잡혀서 굴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서였다. 벌판에는 우리 군사들의 흐린 피가 계곡을 이루었고, 신립 또한 죽을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다.
남한강은 푸르렀다. 신립의 나이 47세. 3천여 명의 전사자를 뒤로 한 채 그는 스스로 단도를 꺼내 목을 쳤다. 조정의 기대가 컸지만 그의 군사는 전멸했고, 그는 자진하는 것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한편, 신립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 황대중은 순창군수 김억추(金億秋)로부터 격문을 받았다.
“강진(康津)은 고금도와 약산도를 끼고 있는 바닷가에 있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도 중요한 곳이오. 왜적이 침입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이 때, 정의를 위해 몸 바칠 의병을 일으키는 일은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오. 특히 강진은 성산(城山:도암 동령 병치재)에 진(陣)을 쳐서 왜적들의 침입을 막아야 하오. 성산은 왜적들이 침입에 오는 길목이니 만큼 반드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이오.”
며칠 뒤 순창에서 김억추 군수를 만난 황대중은 그의 말대로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신립의 승패 여부를 먼저 기다리자는 것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신립이 3천의 우군병사들과 함께 전멸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황대중은 경성으로 올라가 도승지 이항복을 만났다.
“신립 장군은 이 나라의 명장이요, 조정에서 기대를 했던 인물이오. 그런데 군관이 보낸 장계를 보니까 전사한 것이 아니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진을 하였다는 것은 지금의 전쟁이 심상치 않다는 증거요. 더구나 왜적들이 며칠 사이로 도성을 침입할 것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피난을 가야할 것 같소. 그러니 황공도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을 함께 가도록 합시다.”
황대중은 도승지 이항복의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어쩌다가 이 나라가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임금이 없는 궁궐은 궁궐이 아니라 여염집만도 못하게 될 것이고, 여염집만도 못하게 여긴 백성들은 방화나 약탈을 할 게 뻔 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도승지 영감. 저도 임금의 피난길을 도와야지요.”
“고맙소.”
이항복이 황대중의 손을 두 손으로 덥석 잡으며 흔들었다.
“황공. 나라가 있어야 백성이 살 수 있소. 나라가 망하면 이 나라 조선 백성들은 왜놈들의 칼 밑에서 신음하며 살아야 하오. 당장 내일 새벽 대궐로 들어가 임금을 모시고 피난길을 떠날 것이오.”
“염려 마십시오. 제가 어가를 호위하리다.”
4월 30일 새벽 2시. 황대중은 이항복을 따라 궁궐로 갔다. 선조 임금은 꼬박 날을 세우며 피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구군복에 전립을 쓴 임금을 말을 타고 앞장을 섰고, 뒤이어 가마를 탄 왕비 박씨 등이 따랐다. 그리고 세자 광해군과 신성군, 정원군 등과 함께 종친들이 뒤를 이어 인화문(人和門)을 나서는데 그믐밤의 어둠은 눈앞을 가로 막기에 충분했다.
이 때 황대중은 미리 준비한 양초를 이항복에게 건넸다. 틀림없이 밤길을 도와 피난을 가려면 양초가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미리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교군들이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을 때 이항복이 촛불을 밝히자 100여 명의 일행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까지 슬슬 뿌리기 시작했지만 이항복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앞길을 밝혔다.
그러나 무악재를 지날 때였다.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는데 돌연 대궐 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도승지 영감. 저기 저 대궐을 한 번 보십시오. 불에 타고 있질 않습니까?”
“2백년 동안 조선의 상징이었던 궁궐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타버리는구려.”
이항복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불은 경복궁을 태우고 조금 전 임금이 빠져나온 창덕궁을 태웠으며 보물이 많다고 소문난 임해군의 집도 태우고 있었다. 조금씩 흩뿌리던 빗줄기는 이윽고 시나브로 굵어져 가는데 궁궐이 있는 장안은 불바다로 변해 차마 바라볼 수가 없을 만큼 처참했다. 궁녀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울음을 터뜨리자 어느 틈에 이항복의 볼에도, 황대중의 볼에도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비는 갈수록 거세어졌다. 임금 선조의 옷도 물걸레처럼 젖었고, 신하들도 물에 빠진 사람의 몰골이었다. 가마꾼들이 거센 빗줄기 속에서 제대로 걷질 못하자 후궁들이 말과 나귀로 바꿔타면서 제대로 오르질 못해 미끄러지고 나뒹굴며 통곡을 했다.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했지만 왜적들의 조총이 더 무서웠다.
참으로 임금 선조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행렬이 비참한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궁궐로 되돌아갈 수는 더욱 없는 일. 무거운 발길을 옮겨 한 발 한 발 내딛지만 저절로 신세타령이 흘러나왔다.
황대중 역시 배가 고팠지만 어가를 보호한다는 막중한 책임을 한 시도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임금의 옥체를 손상시키려 한다면 허리에 찬 칼이 용서치 않을 것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임금의 행렬은 홍제원을 지나 벽제관에 다다랐지만 여전히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날이 저물 무렵 임진강에 도착했으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강을 건너야만 했다. 하지만 캄캄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이항복이 율곡이 지었다는 화석정 정자에 올라갔다.
“이 정자를 태워 불을 밝힐 것이다.”
이항복은 횃불로 화석정에 불을 당겼다. 비가 옥수처럼 쏟아지는데도 관솔로 지은 화석정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해 임진강을 벌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이항복은 그제서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뱃사공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배를 타려는데 교자멀리를 한 민빈이 죽어도 배를 못타겠다고 떼를 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파주에 내버려둔 채 강을 건넜다. 천만다행히도 화석정의 불길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어둠 속에서 강을 건넌다는 것은 공포감 때문에도 건너지 못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강을 건너고 나니 허기가 찾아왔다. 배가 고팠으나 당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유성룡이 쌀을 몇 되 겨우 얻어와 임금의 수라를 지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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