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하훈
임금 선조는 유성룡이 갖다 바치는 흰 쌀밥을 몇 숟갈 입에 넣다가 그만 눈물이 핑그르르 맺혔다. 더구나 임금의 몸이면서도 제 때 끼니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목이 매어왔다. 임금이 제대로 수라를 하지 못하는 마당에 신하인들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으니 참으로 참혹한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겨우 밥 한 그릇을 비운 임금 선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신하들은 그저 엎드려 눈물만 흘렸다. 그 때 도승지 이항복이 어전에 엎드려 간했다.
“전하.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상황인지라 의주로 떠나시옵소서. 그래서 조선의 여러 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왜적을 물리칠 때 다시 서울로 환도하심이 마땅한 줄로 아룁니다. 만일에 조선이 모두 왜적의 수중에 떨어진다 해도 명나라로 가서 구원병을 청하심이 옳을 것이옵니다.”
이항복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성룡이 말했다.
“조정에서 명나라에게 구원병을 달라고 호소한다 하더라도 전하께서 이 나라 밖으로 나가시면 안 되옵니다. 나라가 없고는 임금이 있을 수가 없고 임금이 없는 나라 역시 있을 수가 없사옵니다.”
의주로 가느니 명나라로 가면 안 된다느니 하는 신하들의 말도 어찌보면 한낱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만큼 달아나기에 바쁜 일정이어서 임금 선조는 서둘러 평양을 향했다.
황대중은 말에 올라 앞장서서 임금 선조를 호위했다. 오로지 임금을 지키는 것만이 자신이 할 일이라는 생각에 한 시도 한 눈을 팔지 않고 사방을 경계하며 앞을 헤쳐 나갔다. 평양이 가까워지면서 평양감사 송언신(宋言愼)과 황해감사 조득인(趙得仁) 등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 임금을 호위하니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것처럼 힘이 생겼다.
“이제 발 펴고 잠을 자도 되겠군.”
서울에서 평양까지 임금 선조를 모시고 오면서 긴장을 잔뜩 했던 황대중은 오랜만에 한시름 놓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양감사 송언신의 수 천 군사도 그랬지만 그는 임금 선조를 비롯한 일행들에게 옷과 음식을 풍족히 준비했던 것이다. 새옷으로 갈아입고 배불리 먹고 나자 지친 몸을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상도순변사였던 이일이 한 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황대중은 특별히 자신을 만날 이유가 없는데 사람을 보내 다녀가라는 전갈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평양으로 오면서 잠시 쉬었을 때 황대중의 곁으로 다가온 그는,
“참으로 말이 쓸만 하구려.”
하고 말의 귀를 두어 번 쓰다듬은 적은 있었으나 그와는 별로 친분이 없는 터였다. 이일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왜적을 무찌르기 위해 임금을 명을 받들었지만 상주에서 패한 사람이었다. 이일이 대구를 목적으로 내려가기 전 이미 대구에는 몇 천인지 몇 만인지 모를 만큼 많은 군사들이 모여들었었다. 경상도순변사 이일을 기다리는 군사들이었다. 경상감사의 지시를 받고 각 고을의 현감들이 끌어 모은 백성들이었는데, 온다온다 하는 순변사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궂은비만 오락가락 하자 추위와 배고픔에 벌벌 떨고 있을 때 왜적들이 날이 새기 전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나돌자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결국 이일은 문경을 지나 상주로 가보았지만 백성은커녕 관가조차 텅텅 비어있었다.
이일은 서울에서 데리고 온 병사 2백 명과 나중 현지에서 상주판관 권길이 가까스로 모은 5백여 명 등 8백명으로 왜적과 싸워보았지만 추풍낙엽처럼 참패하고 말았다. 상주를 빠져나온 이일은 조정에 패전보를 알렸고, 다시 조정에서 내려 보낸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결사적을 싸웠지만 또다시 패전을 맛보았다. 그 때 이일은 자신을 악착같이 쫓아오는 왜적의 목을 베어 안장에 매달아 조정에 보낸 위인이기도 했다. 바로 그런 이일이 황대중을 부른 것이었다.
“장군 계시오이까?”
황대중은 전갈을 받고 이일을 찾았다. 그는 평양의 한 가정집에서 여러 사람과 묵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황공. 마침 전쟁 중에 얻기 어려운 술이 좀 있어서 불렀소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요?”
“성미도 급하긴. 어서 안으로 들어갑시다.”
어디서 구했는지 안주와 술을 푸짐하게 준비한 이일이 좌정할 것을 권했다. 전쟁통에 임금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술이 나오자 어안이 벙벙했다. 황대중은 문가 이일의 하는 수작이 의심스러워 정색을 하고 용건을 물었다.
“다름이 아니라 황공을 만나자고 한 것은 부탁이 있어서이요.”
“부탁이라뇨? 제가 들어 줄만한 위치가 못된다는 것은 장군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난번 상주에서 패전을 맛본 사람이요. 내 언젠간 왜놈들과 싸울 생각이요. 그래서 반드시 그놈들의 목을 쳐서 이 나라 원수를 갚아야겠소.”
이일이 술 한 잔을 깊숙이 들이키고 나서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그야 소생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황공이 타고 있는 말을 내게 주시오. 어려운 부탁이오만 너무 황공의 말이 욕심나서 하는 말이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제가 타는 말은 저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말이올시다.”
황대중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황공! 내가 누구요? 나는 이 나라 조선의 장수요. 상주에서 패전을 했다고 무시를 하는 것이요? 그 땐 조정에서도 군사를 주지 않았지만 대구에서도 내가 도착도 하기 전에 다들 뿔뿔이 도망을 간 백성들 때문에 왜적을 무찌르지 못한 것이요, 그래도 나는 쫓아오는 왜놈의 목을 따서 저자거리에 효시를 한 사람이요. 왜 그랬는지 아시요? 모든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였소, 황공! 나로 하여금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울 수 있도록 해주시오.”
“장군의 용맹스러움을 생각한다면 백번이나 드려야겠지요. 그러나 저는 제 말이 아니면 움직일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한쪽 다리를 제대로 쓰질 못하는 사람입니다.”
황대중이 자신의 다리 한쪽을 가리켰다.
“효건(孝蹇)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효자인줄은 익히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 이일을 위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에 공을 세우기 위해서이니 좀더 깊이 생각해 주시구려.”
이일은 안달이 나는지 거푸 술을 들이켰다. 황대중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 자리를 박차고 집을 나와 버렸다. 한쪽 다리를 저는 황대중으로서는 말이 곧 발인 셈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엔 이일이 직접 황대중의 숙소를 찾아와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황공! 아무래도 내가 말을 가져가야겠소.”
“저 말이 그리 욕심나시거든 차라리 나를 죽이고 가져가시오. 왜냐하면 제 다리가 불편해서 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나라를 위해 왜놈들과 싸울 생각이 있기 때문이오. 그런데 말을 빼앗으면 어떻게 왜놈들과 싸울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나를 죽이고 말을 가져가시오.”
“언젠가는 황공이 내게 말을 주고야 말 것이오.”
그는 황대중의 간곡한 말은 듣지도 않은 채 분기가 탱탱한 얼굴로 되돌아갔다.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황대중은 거처를 빠져나와 어전에서 퇴청하는 이항복과 유성룡에게 달려가 하소연을 했다.
“아니, 황공의 다리가 불편하거늘 어떻게 말을 빼앗으려 한단 말이오.”
도승지 이항복이 펄쩍 뛰자 유성룡도 덩달아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일 장군을 만나서 얘길 해야겠소이다. 이 말이 아니면 한발짝도 옮기기가 힘든 황공이 어떻게 지낸단 말이오.”
“더군다나 지난날에｢ 목청전(穆淸殿)으로 달려가 신주(神主)를 모셔오기까지 하지 않았소?
그같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소?”
“이일 장군을 만나서 설득을 하도록 합시다. 황공이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겠습니까. 말이 필요한 것은 이일 장군에게도 크겠지만 황공에게도 말이 소중한 것은 마찬가지지요”
유성룡이 앞장서서 이일이 묵고 있는 숙소를 향했다. 그러자 이항복도 유성룡의 뒤를 따르며 황대중에게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이항복과 유성룡이 이일에게 황대중의 말을 빼앗지 말도록 훈계를 하고 나서야 이일은 황대중의 말을 욕심내지 않았다.
황대중은 거처로 돌아와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말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목숨이니라. 너와 함께 살고 너와 함께 죽을 것이니라.”
말도 주인인 황대중의 말을 아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히히잉, 하고 울었다. 황대중은 이순신이 정읍현감(井邑縣監)에서 좌수사(左水使)로 영전되어 떠날 때 보성관(寶城館)에서 만났을 때의 일을 떠올렸다. 당시 황대중은 반곡 정경달과 함께 보성관으로 찾아가 이순신을 우연찮게 만나게 되었는데, 그 때 이순신은 황대중의 말과 검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참으로 보기 드문 보검이외다. 더구나 말 또한 신마(神馬)임에 틀림없소.” “좌수사 어른께서 너무 과찬이십니다.”
“아니오. 틀림없는 보검이요, 신마입니다. 내 일찍이 이 같은 보검과 신마는 본 적이 없소. 그리고 내 황공에게 한 말씀 올리겠소. 슬기롭고 지혜로운 계책을 세울 줄 아는 선비는 사물을 보고 느끼는 생각이나 의견이 같으니 나와 함께 일을 합시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이미 별초군(別抄軍)을 거느리라는 명을 받았기에 함께 할 수 없소이다. 사내는 무릇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 충정을 갖기 마련입니다만 언젠간 장군을 모실 기회가 오겠지요.”
“참으로 아쉽소이다. 그럼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 봅시다.”
황대중은 이순신과 헤어진 후 평양까지 어가를 모시고 왔지만 항상 이순신의 늘름하고 자상한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언젠간 만날 일이 있겠지. 그날이 언제일까······.”
황대중은 일단 말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날이 새도록 이순신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을 뒤척였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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