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며 흑산도에 있는 중형 약전에게 수시로 서신을 보냈는데, 서신을 통해 자신의 학문적 가치를 묻거나 검증을 받으려고 했다. 중형과의 교류는 다산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평생 존경을 한 중형으로부터 다산은 자신의 학문세계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미용(美庸)을 동생으로 둔 것이 어언 44년이 되었다. 미용이 젊었을 때 성균관에서 유학(遊學)을 할 적에는 과문(科文)으로 세상에 알려져 나는 번득이는 재능을 지닌 선비라고 생각하였다. 장성하여 관각(錧閣)에 출입할 적에는 문학으로 명주(明主)를 섬김에 나는 문장경술지사라고 생각하였다.
출사해 정사를 볼 적에는 크고 작은 안팎의 일이 모두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므로 나는 재상감으로 여기었었다. 만년에 바닷가에 귀양 와 ⌜周易四解⌟를 지었는데, 내가 처음에는 놀라고 중간에는 기뻐하였으며 끝내는 무릎이 굽혀지는 것도 알지 못할 정도였으니, 미용을 어느 부류에나 비유해야 할지 모르겠도다.
다산은 40년 가까운 세월동안 주역 탐구에 주력해 왔다. 주역이라면 자신을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큰소리를 쳤고, 젊어서부터 대흥사에서 1천명 제자를 가르쳤던 혜장도 다산의 주역 경지에 대해 무릎을 꿇고 말았다. 다산 역시 자신이 지은 ⌜周易四解箋(주역사해전)⌟에 대해 역작이었음을 주저하지 않았다. 중형 약전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보면 더욱 그 같은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周易四解箋⌟은 내가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들이니 결단코 사람의 힘으로 통하고 지려(志慮)로 도달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다. 이 책에 잠심(潛心)하여 그 오묘한 내용을 모두 통달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바로 자손붕우(子孫朋友)와 같을 것이니 천년에 한번 만난다 하더라도 애지중지하며 곱절로 애정을 쏟을 것이다. 주역이란 책은 주인(周人)들의 체법(體法)이 실려 있는 것이니 유자(儒者)라면 그 은밀한 말과 오묘한 뜻이 발휘(發揮)되어진 곳에 밝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옛 성인들은 모든 미언(微言)`묘의(妙義)에 대해 그 단서만 살짝 드러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자득(自得)케 하였습니다. 만약 하나도 숨김없이 환히 드러나 알 수 있는 경우라면 너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역전(易箋)’이 너무 상세하고 너무 분명한데 이 점은 깊이 후회하는 바입니다.
다산은 여기에서 ‘내가 하늘의 도움으로 얻은 문자’라는 표현과 ‘사람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무 상세하게 기술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감에 찬 글이 아닐 수 없다.
다산은 갑자년 양기(陽氣)가 돌아오는 날에 강진 유배지에서 주역을 읽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해 여름 차록(箚錄)작업을 시작하여 겨울에 이르러 끝마쳤으니 이것이 갑자본(1804년)이다. 을축년(乙丑年) 학가(學稼)가 와서 함께 보은산방에 머물렀는데, 전본(前本)에는 상(象)이 취해지자 않아 모두 개정하였다. 봄이 되어 그 일을 끝마치니 이것이 병인본(丙寅本)이다.
병인본은 잘못된 점이 많아 다시 학가에게 개고(改稿)케 했는데, 채 마치지 못하고 북쪽으로 올라감에 이학래(李學來)로 하여금 작업을 끝맺게 하였다.
이러한 다산의 글을 보면서 몇 번에 걸쳐 개고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중형 약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산은 “귀양살이 괴로움을 잊기에 충분했다”며 “만약 내게 10년을 더 살아 끝까지 주역을 공부하게 한다면 아마도 더 고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다산은 주역에 대해 끊임없이 알고 싶었으나 선뜻 손에 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다가 강진에 유배 온 지 7년째 되던 해 주역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체계를 완성한 후 없어질까 두려워했던 것은 그 과정이 무척 힘들었다는 고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주역의 해석체계를 완성한 다산과 혜장은 각별한 인연이 있는 사이였다. 혜장도 역학에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이었다.
“선양후음(先陽後陰)이므로 합일(合一)하면 대성(大成)할 괘(卦)가 아닌가요?”
혜장의 말에 다산이 맞받아쳤다.
“천지만물 자연현상이 끊임없이 변형(變形)하는데 그대는 육변(六變)과 약서법(略筮法 점치는 일)으로 길흉을 논하다니….”
다산의 말에 혜장은 그만 무릎을 꿇고 극진히 스승으로 모시기 시작했다. 다산은 역을 단순한 음양의 원리를 따지는 술수학에 머물러 있지 않고 상제 사상, 즉 유일신으로 그의 중용강의에서도 나타나 있다.
혜장은 온갖 정성을 다하며 동문 밖 주막집에서 고성사의 보은산방으로 옮겨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백련사에서 자생하는 차를 보냈고 마시는 법을 일러주었다. 다산과 혜장, 혜장과 다산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으니 오백생지인연(五百生之因緣)이 아니고 무엇이랴.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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