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을 뽑아 속죄해도 부족함이로다
범수 ·채택 열전(2)
진나라에서는 범수가 승상이 된 다음에도 그를 장록이라 불렀다. 그런 까닭으로 위나라에서는 범수가 이미 죽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줄만 알고 있었다.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위나라에서는 수가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범수는 수가가 왔다는 말을 듣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홀로 수가를 찾았다. 수가가 범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범숙은 아직 살아 있었군!”
“네.”
범수가 대답하자 수가가 웃으면서 말했다.
“범숙이 진나라 왕에게 유세를 하였소?”
범수가 대답했다.
“아니오. 제가 위나라 승상에게 노여움을 사 진나라에 왔는데 어찌 감히 유세를 생각할 수 있었겠습니까?”
수가가 말했다.
“지금 범숙은 무슨 일을 하고 있소?”
범수가 대답했다.
“남의 집에서 날품팔이를 하고 있습니다.”
수가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음식을 나눠먹으며 말했다.
“결국 그런 처지가 되었군.”
그러고는 명주 두루마기를 꺼내 범수에게 주었다. 수가가 물었다.
“진나라에서는 장록을 재상으로 임명했다는데, 그대는 그 사람을 알고 있소? 듣자니 왕의 총애를 받아 천하 대사를 모두 그가 결정한다는데, 내 사명의 성공 여부 또한 그에게 달려 있소. 혹 승상과 친한 자를 아는가?”
범수가 말했다.
“저의 주인이 승상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의 주선으로도 그를 만날 수 있으니 제가 주선해 드리지요.”
수가가 덧붙여 부탁했다.
“공교롭게도 말이 병들고 수레바퀴마저 부러지고 말았소. 나는 말 네 필이 끄는 큰 수레가 아니면 나서지 않소.”
범수가 말했다.
“그러면 제가 저의 주인한테서 말 네 필이 끄는 큰 마차를 빌려 오겠습니다.”
범수는 돌아가 말 네 필이 끄는 수레를 마련해 와서 수가를 태우고 진나라 승상이 있는 관저로 갔다. 수레가 관저 가까이 이르자 범수를 알아본 사람들이 슬금슬금 피했다. 수가는 이를 이상히 여겼다. 이윽고 문 앞에 이르자 범수가 수가에게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먼저 들어가 승상께 여쭌 뒤에 안내를 하겠습니다.”
수가는 문 앞에 수레를 세우고 얼마간 기다렸다. 그러나 범수가 나오지 않자 문지기에게물었다.
“범숙이 나오지 않으니 어찌 된 일이오?”
“이곳에는 그런 분이 없습니다.”
“아까 나와 함께 수레를 타고 와 안으로 들어간 사람 말이오.”
“그분은 우리의 승상이신 장록군입니다.”
수가는 크게 놀라 그제야 속은 줄을 알았다. 그는 두려운 나머지 웃옷을 벗고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가며 무릎으로 기어들어가 승상에게 용서를 빌었다. 범수가 장막을 젖히자 많은 시종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수가는 죽을죄를 졌다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저는 상공께서 출세하신 줄을 전혀 몰랐습니다. 저는 이제 두 번 다시 천하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며, 천하의 일에 관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끓는 가마에 넣어 삶아 죽여도 마땅한 죄를 지었으니 스스로 오랑캐 땅으로 물러나고 싶습니다. 살리든지 죽이든지 상공께서 마음대로 하십시오.”
범수가 말했다.
“네 죄가 얼마나 되는 둘 아느냐?”
“저의 머리털을 뽑아 잇는다 해도 제가 진 죄의 길이에는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범수가 꾸짖었다.
“너의 죄는 세 가지다. 옛날 초나라 소왕 때 신포서는 초나라를 위해 오나라 군사를 격퇴했다. 초나라 왕은 그에게 형주의 5천 호를 봉읍으로 주려고 했지만 신포서는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것은 조상의 묘가 초나라에 있어 적을 그 땅에서 몰아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의 조상의 묘가 위나라에 있는데 내 어찌 위나라에게 다른 마음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지난 날 너는 내가 제나라와 내통한다고 위제에게 고자질했다. 이것이 첫 번째 죄다. 또한 위제가 나를 변소로 밀어 넣어 욕을 보일 때 너는 말리지 않았으니, 이것이 네 두 번째 죄다. 더욱이 술에 취한 자들이 나에게 오줌을 눌 때 너는 참고 있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죄다. 그러나 네가 오늘 죽음을 면하게 된 것은 명주 두루마기를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로써 너에게 옛정이 남아 있음을 알았기에 너를 놓아주는 것이다.”
수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났다. 범수는 궁에 들어가 소왕에게 이야기하여 수가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수가가 범수에게 하직 인사를 하러 왔다. 범수는 큰 잔치를 베풀고 각 제후국에서 온 사신들을 모두 청했다. 당상에 함께 앉은 그는 사신들에게 진수성찬을 대접하면서도 수가만은 당하에 앉히고 콩을 섞은 여물을 주었다. 그리고 두 죄수더러 그를 양쪽에서 끼고 말에게 여물을 주듯 먹이게 했다. 범수가 말했다.
“너는 나를 대신해 위나라 왕에게 ‘당장 위제의 목을 잘라 오라. 그렇지 않으면 곧 대량을 도륙하겠노라’라고 전하라.”
수가가 돌아가 이 사실을 위제에게 말하자 위제는 겁을 먹고 조나라 평원군에게 가서 숨었다.
범수가 진나라 승상이 된 후 어느 날 왕계가 범수에게 말했다.
“일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세 가지가 있고,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군왕이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것이 예측하기 어려운 첫 번째 일이고, 상공이 갑자기 관사를 버리고 세상을 뜰지 모르는 것이 예측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일이며, 제가 언제 갑자기 구렁텅이에 빠져 죽을지 모르는 것이 예측하기 어려운 세 번째 일입니다.
한편 군왕이 돌아가신 다음에 공이 저를 추천하지 않는 것을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며, 공이 갑자기 세상을 등지면서 저를 등용하지 않는 것을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며, 제가 갑자기 죽은 후에 저에 대해 똑 같은 후회를 해도 역시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범수는 이 말을 듣고 적이 불쾌했지만 궁에 들어가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왕계의 충성이 없었더라면 신은 함곡관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대왕의 현명함이 없었더라면 신은 오늘과 같이 존귀한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신은 승상의 자리에 있고 작호는 열후의 반열에 들었는데 왕계의 벼슬은 아직도 알자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는 왕계가 신을 진나라에 데려온 본뜻은 아닐 것입니다.”
소왕은 왕계를 불러 하동 태수로 임명했다. 그러나 왕계는 부임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세수에 관한 보고를 하지 않았다. 범수는 정안평을 추천했는데 소왕은 그를 장군으로 삼았다. 이어 범수는 가산을 나누어 일찍이 자신이 곤궁에 처했을 때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했다. 그때 단 한 끼의 밥만 얻어먹은 사실이 있어도 모두 은혜를 갚았고, 눈 한번 흘긴 원한마저도 꼭 앙갚음을 했다.
진나라 소왕 42년, 범수가 진나라 승상으로 있은 지 2년째다. 이때 진나라는 동쪽으로 한나라의 소곡과 고평을 공략했다. 진나라 소왕은 위제가 평원군에게 가 있다는 말을 듣고 범수의 원수를 갚아 주려고 했다. 소왕은 짐짓 편지를 써 평원군에게 보냈다.
과인은 공자의 존귀한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소. 공자와 격의 없는 벗이 되고 싶으니 수고롭겠지만 과인에게 들러 준다면 며칠 동안 술자리를 함께하며 즐기고 싶소.
평원군은 진나라를 두려워하면서도 이 말을 듣고 진나라에 들어가 소왕을 알현했다. 소왕은 며칠 동안 평원군과 술을 마시며 말을 꺼냈다.
“옛날 주나라 문왕은 여상을 얻어 태공으로 삼았고, 제나라 환공은 관중을 얻어 숙부로 삼았으며, 지금 범군은 과인의 숙부가 되었소. 그런데 범군의 원수가 지금 공자의 집에 있소, 바라건대 사람을 시켜 그 자의 목을 잘라 왔으면 하오. 과인의 이러한 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공자를 함곡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오.”
평원군이 말했다.
“사람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벗을 사귀는 것은 천해질 때의 일을 생각해서이며, 부유하면서도 벗을 사귀는 것은 가련해질 때를 생각해서입니다. 위제는 저의 벗입니다. 제 집에 있다 하더라도 벗인 이상 그를 내놓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은 저의 집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자 소왕은 조나라 효성왕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지금 왕의 아우는 진나라에 와 있소. 범군의 원수인 위제는 평원군의 집에 있다고 들었소. 왕은 빨리 그 자의 목을 베어 사람을 시켜 보냈으면 좋겠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군사를 플어 조나라를 칠 것이며 왕의 아우도 함곡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을 것이오.“
조나라 왕은 군졸을 풀어 평원군의 집을 에워쌌다. 위제는 어둠을 틈타 도주하여 승상인 우경의 집에 가 구원을 청했다. 우경은 왕을 설득해도 소용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승상의 인감을 풀어놓은 뒤 위제와 함께 달아났다. 그들에게는 몸을 의비할만한 제후가 없었으므로 우선 위나라 대량으로 가서 신릉군의 도움을 받아 초나라로 달아나려고 했다. 신릉군은 이 소식을 듣고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그들을 만나는 것을 주저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경이란 자가 어떤 인물이오?”
후영이 말했다.
“남이 나의 됨됨이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내가 남의 됨됨이를 아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우경이란 자는 짚신을 신고 삿갓을 쓰고 조나라 왕을 세 번이나 알현했습니다. 처음 알현했을 때 백벽 한 쌍과 황금 백 일을 하사받았고, 두 번째 알현했을 때에는 상경을 제수받았으며, 세 번째에는 승상의 인감을 받고 만호후에 봉해졌습니다. 천하의 선비들은 다투어 그와 가까이 지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위제가 곤란한 처지에 빠져 우경을 찾아오자 우경은 존귀한 작록도 중히 여기지 않고 승상의 인감도 풀어놓고 만호부의 자리도 버리고는 선비를 구하기 위해 위제와 함께 잠행하여 공자를 찾아왔습니다. 공자께서는 그가 어떤 인물이냐고 물으셨습니다. 남이 나의 됨됨이를 알기 어려운 것처럼 나도 남의 됨됨이를 알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신릉군은 적이 무안해서 수레를 달려 교외로 마중 나갔다. 그러나 위제는 신릉군이 자신과 만나는 것을 꺼린다는 말을 듣고 자결했다.
조나라 왕은 위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 목을 찾아 진나라로 보냈다. 진나라 소왕은 드디어 평원군을 조나라에 돌려보냈다.
소왕 43년, 진나라는 한나라의 분과 형 땅을 공략하고 황하 근처의 광무에 성을 쌓았다. 5년 후 소왕은 범수의 계책에 따라 첩자를 풀어 조나라를 기만했고, 이에 조나라는 염파 대신 마복군 조사의 아들인 조팔을 장군으로 삼아 내보냈다. 진나라는 조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마침내 한단을 포위했다.
얼마 후 범수는 무안군 백기와 사이가 벌어졌다. 그는 왕에게 진언하여 백기를 죽이고 정안평을 장군으로 추천하여 조나라를 치게 했다. 그러나 정안평은 조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자 2만의 군사와 함께 조나라에 항복했다. 이에 범수는 짚을 깔고 앉아 왕의 처분을 기다렸다. 진나라 법에 의하면 추천해서 임명한 자가 죄를 저지르면 그를 추천한 자도 똑 같은 죄로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범수는 삼족을 멸하는 죄에 해당되었지만 진나라 소왕은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려고 나라 안에 명을 내렸다.
“감히 정안평의 사건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그와 같은 죄로 다스리리라.”
그러고는 범수에게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음식을 하사하여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 하동 태수 왕계가 제후와 내통했다가 법애 따라 주살되었다. 그로 인해 범수는 더욱 불안한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는 소왕이 조정에 나와 탄식하자 범수가 말했다.
“신은 ‘군왕이 근심에 싸이면 신하는 욕을 보게 되고, 군왕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대왕께서는 조정에 나와 근심에 차 있으니 신하된 자로써 죄를 청합니다.”
소왕이 말했다.
“과인은 ‘초나라는 철검은 예리하지만 광대들은 졸렬하다’고 들었소. 철검이 예리하면 병사들도 용감할 것이고, 광대들이 졸렬하면 생각도 깊을 것이오. 사려 깊은 병사들을 이끈다면 그들이 진나라를 칠까 두렵소. 지금 백기 장군은 이미 죽었고 정안평의 무리는 나라를 배신했소. 나라 안에는 훌륭한 장군이 없고 나라 밖으로는 적국이 많소. 과인은 이것이 걱정이오.”
이로써 소왕은 범수를 격려하려고 했으나 범수는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무렵 채택이란 자가 이 소문을 듣고 진나라로 들어왔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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