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은 눈뿐이었다. 그리고 들리는 것이라곤 귀를 찢는 바람 소리뿐이었다. 파편처럼 날카로운 눈가루가 강한 바람과 함께 거대한 히말라야 산군(山群)을 줴흔들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슬그머니 등짝을 내보이며 정상을 향해 줄달음치던 에베레스트 서릉과 만년설을 뒤집어 쓴 채로 이따금씩 사납게 울부짖던 오른손 쪽의 눕체봉도 이미 그 모습을 감춘 지 오래였다. 기온은 사정없이 곤두박질쳐서 영하 40도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상을 초월한 강추위는 체감 온도를 영하 50도 이상의 위력을 느끼게 하고 있었다.
밤 2시 30분. 8,350m의 캠프 5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해 제1차 공격조가 출발했을 때 히말라야 날씨는 대체로 좋은 편이었다. 바람이 좀 불었으나 지구상의 최고봉을 오르기에는 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런데 허 부대장과 양일석 대원의 공격조가 정상 과업을 성취했으리라 여겼던 낮 때쯤부터였다. 티베트 쪽에서 몰려드는 험상궂은 구름장이 하늘 한쪽을 덥석 베어 먹는가 싶었는데, 급기야는 칼날처럼 날이 시퍼렇게 선 폭풍설이 휘몰아쳐 온 거였다. 사람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는 에베레스트의 포효였다.
에베레스트 동계 원정대원 중 유일하게 홍일점인 양석미는 줄곧 캠프 2 본부 천막의 무전기 곁에 바짝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천막이 찢어져 날아가 버릴 듯 한 바람 소리에 어깻죽지를 움찔움찔 움츠리면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갔다. 원정대장인 남희도 대장과 그 곁으로 바투 앉아 있는 세 대원의 표정 또한 말을 붙여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일그러지고 있었다.
무전기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고 있었다. 캠프 5를 출발한다는 공격조의 무전 보고 이후 15시간이 흘렀는데도 삐삐 소리만 몇 번 냈을 뿐이었다. 정상 정복의 낭보는커녕 급변한 기상의 악화로 이제 조난사고를 눈앞에 둔 셈이었다. 남 대장은 7,550m의 캠프 3대원들에게 구조 작업을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으나, 그것은 어림도 없는 일임을 석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악천후의 상황에서 누구를 구조한다는 것은 더 큰 사고를 유발할 뿐임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보나마나 사흘간의 천신만고 끝에 눈사태를 피해 암벽을 끼고 가파른 급사면에 세운 캠프 3을 지켜 내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거였다.
“히말라야 설인도 너무하는 것 같아. 우리들의 희망을 이렇게까지 짓밟아 놓다니…….”
마른 잡초처럼 구레나룻이 덥수룩이 자란 지영용 대원이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무전기로 서너 차례나 공격조를 호출해보던 영용 대원은 몹시 풀이 죽어 있었다. 혹시 무전기의 작동이 어떻게 되었지 않나 싶어 안테나를 다시 뽑아 보는 등 이것저것 손대보기도 했던 그는 두툼한 입술을 으스러져라 깨물고 있었다.
“사고를 당하지 않아야 할 텐데…….”
가장 나이가 적은 위생담당 대원이 깊숙이 숙였던 머리를 치켜들며 말하는 것을 등 뒤로 들으며 석미는 본부천막을 빠져나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난을 당할 확률이 높아진 이상 우우욱 터져 나오는 눈물을 차마 다른 대원들에게 보일 수가 없어서였다.
텐트 밖은 뼈를 얼릴 듯 추웠다. 그리고 무서운 바람은 몇 발짝도 못 걸어가서 몸뚱이를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사방은 암회색이었고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에베레스트 남서벽과 눕체봉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가 지옥의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주님,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우리 주님. 일석씨와 함께 정상정복을 위해 올라간 허 부대장님. 이 두 사람의 생명을 구해 주십시오. 제게 이 고난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주신다면 나머지 한평생을 주님 위해 살다가 가겠습니다. 오오, 주여!
석미는 얼마 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자신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가 분해되어 버린 것처럼 휘청거렸다. 침낭 위에 놓아 둔 사진들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지난겨울, 설악산 전지훈련 때 자신의 생일이 되어 일석씨와 함께 케이크를 앞에 놓고 다정스레 찍은 사진이었다. 2주일 동안 강행한 고된 훈련 속에도 생일을 기억해 준 일석씨였다. 석미는 사진들을 집어 들고 가슴에 꼬옥 품었다. 일석씨가 정상을 향해 마지막 캠프를 떠나던 꼭두새벽 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두 눈을 꼬옥 감을 때만 해도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던 그녀였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반드시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오르고야 말겠습니다.”
그녀는 일석씨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무전기를 통해 남 대장에게 하던 말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본대의 캐러밴 개시 후 두 달 동안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졌던 석미였다.
생사를 걸고 히말라야를 찾은 다른 대원들을 물리치고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하는 것은 평생을 두고서도 올까말까 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일석씨가 15명의 원정대원 중 제1차 공격조 대원으로 뽑힌 것은 10일 전 캠프 2에 전 대원이 죄다 모였을 때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본부천막에 빼곡히 앉은 대원들은 누구나가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따뜻한 홍차로 목을 축이고 나자 남 대장이 좌중을 쭈욱 훑어보았다. 7,000m급 등정경험이 이미 있는 남 대장은 말할 것도 없고, 추렌히말을 오른 민병호 대원, 알프스 아이거 북벽을 발밑에 누인 백채수 대원, 히말라야의 다울라기리 6봉을 등정한 지영용 대원 등 하나같이 막강한 전력의 대원들이었다. 물론 석미도 홍일점이었지만 국내 여류 알피니스트 가운데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만만찮은 등정의 경험을 갖고 있었다. 남 대장이 입을 열었다.
“여러 대원들이 힘을 합친 덕택으로 무사히 아이스폴을 뚫고 이곳까지 왔습니다. 비록 셰르파 한 사람이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하는 불행한 일이 있었지만…….”
남 대장은 말을 잇지 못하고 천막 위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후리왕이란 셰르파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40여 명의 세르파들이 더 못가겠다고 버티는 바람에 자칫 에베레스트의 등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를 간신히 넘긴 안도감 때문일까.
남 대장은 한참 후에 말을 이었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은 정상정복입니다.”
남 대장은 이렇게 말문을 열더니 허 부대장을 1차 공격조로 지명했다. 허 부대장이 선정되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미리 카트만두에 도착해 선발대의 역할을 해낸 공로를 생각해서 등정의 기회가 주어진 거였다.
사실 지금까지 에베레스트 정복자는 거의 프리 몬순과 포스트 몬순의 날씨가 좋은 때를 골라 등정을 하였듯이 엄동기에 도전한다는 것은 그만큼 치밀한 사전답사가 절대 필요한 일이었다. 그 같은 일을 허 부대장은 혼자서 에베레스트 5,000m까지 올라가 탐색을 하는 등 어려운 일을 해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과연 누가 되느냐가 문제였다. 남 대장이 고개를 숙인 채 침묵을 지켰다. 담배 한 대를 피울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서야 남 대장은 일석씨를 지명했다.
석미는 처음 남 대장의 말이 떨어졌을 때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따라나서긴 했어도 설마 일석씨가 1차 공격조로 뽑히리라곤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내 일생을 두고 이만한 행운은 아마…… 아무튼 세계 최고봉을 내 발밑에 눕히고야 말겠어!”
텐트로 돌아왔을 때 일석씨는 어린애처럼 기분이 들떠 있었다. 석미도 막상 일석씨가 공격조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보니 에베레스트 원정대로 참여하기를 백 번이고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 일석씨가 에베레스트를 등반하겠다고 선언해 왔을 때 석미는 극구 반대했다. 연애 시절이긴 했으나 매킨리 등반을 떠난 일석씨를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리는 것에 진력이 난 경험 때문이었다. 석미는 그때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하늘만 멀거니 쳐다보며 지냈다.
그런데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두 달도 채 못 되어 에베레스트를 가겠다는 일석씨의 말은 충격이었다. 석미도 산악인이라고 자처할 만큼 산을 좋아하는 여류 알피니스트로서 히말라야가 어떤 산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만일의 경우에는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영원한 설산. 아이스폴이 붕괴되거나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하는 날이면 여지없이 끝장인 산. 어디 그뿐인가. 눈사태라도 만난다면 그대로 눈의 무덤을 만들며 히말라야에 산화될 수밖에 없다. 고소증도 무서운 적이다. 극한을 찾아가는 산악인을 무기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칫 사망의 폐수종 같은 사고를 겪기 쉽다.
석미는 한 남편의 아내요, 한 여자이고 싶은 마음이 이때처럼 간절한 적은 없었다. 골목길을 후적후적 내려가는 남편의 출근길에 손을 흔드는 모습이며 음악을 틀어 놓고 남편과 아이의 털 스웨터를 뜨개질하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따라서 일석씨의 에베레스트 등반 선언은 산사태의 굉음만큼이나 크게 느껴지면서 핑크빛 가정의 행복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일석씨는 석미의 만류에 흔들릴 상태가 아니었다. 잠을 자다가도 ‘에베레스트!’하고 외칠 정도였고, 방바닥엔 순전히 히말라야에 관계된 책자나 사진들이 나뒹굴었다. 이런 일석씨를 매양 지켜보던 석미는 번쩍 머리를 스치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도 따라가는 조건으로 허락할까 해요.”
석미의 느닷없는 말에 일석씨의 두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당신이 어떻게 그곳까지…….”
“단순히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베이스매니저를 도맡아 해낼까 해요.”
“매니저?”
“그래요. 그리고 적어도 제2 캠프까지는 따라가겠어요. 일석씨가 등정하는 모습도 지켜보고 배낭 한 개라도 끌어올리기 위해서요. 그것이 일석씨를 가슴 조이며 기다리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요.”
석미는 흔연스레 말하면서도 자신의 용기에 스스로 놀랬다. 다음날 아파트 마련을 위해 달마다 넣는 적금통장을 해약하여 개인이 부담해야 할 금액을 일석씨 앞에 내놓았을 때 석미는 차라리 홀가분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석미의 결단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일석씨가 다니는 스포츠용품 회사를 그만 다니게 권했는데, 그것은 기왕 에베레스트 그 거봉을 갈 바에는 다른 대원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훈련을 강도 있게 하라는 배려였다. 이러한 석미의 깊은 속 씀씀이는 정상정복을 위한 전조(前兆)였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끝장이다.
석미는 강철제 피켈보다도 더 강했던 자신의 의지가 촛농처럼 녹아내리면서 칠흑 같은 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산에서 죽을 거라구.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죽는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어? 마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화필을 쥔 채 죽음을 맞이한다면 더 행복한 죽음이 없듯이 산꾼이 산을 오르다가 죽는 것도 또한 행복한 죽음이라고 생각해.
연애 시절 어느 가을날, 운해(雲海)가 가슴까지 밀려와 황홀한 신비경을 연출하는 모습을 설악산 대청봉에서 내려다보며 일석씨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리 산꾼이라고 하지만 산을 오르다가 죽는다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죽을 정도로 산을 오른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구요!
석미는 왈칵 미운 생각이 들어 톡 쏘아붙였다. 그러나 그때 했던 말이 사실일 수도 있는 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베레스트는 끝내 일석씨의 집념과 정열을 무참히 꺾으면서 자신의 재물로 삼을지 모를 일이었다.
망연자실 앉아 있는 석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귀를 찢는 바람 소리보다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차라리 더 크게 들려오고 있었다. 지루한 밤이었다.
2
일석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으나 도무지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30킬로그램이 넘는 배낭을 짊어진 채로 벌렁 누워있는 꼴이어서 네 발을 공중으로 향한 거북처럼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일어나 보려고 힘을 끄응 쓰다가 일석은 단말마의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쪽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 왔다. 통증은 견딜 수 없을 만큼 점점 커지면서 정신을 아뜩하게 만들었다.
일석은 자꾸만 멀어져가는 정신을 추스르며 여기가 어딜까 헤아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자신의 몸뚱이가 사정없이 눈 위로 미끄러지다가 짤막한 순간 천 길 낭떠러지로 부웅 떨어져 내리던 일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은 에베레스트 정상 정복을 위해 혼신을 힘을 다하고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꼭두새벽, 무전기로 남 대장에게 출발 보고를 드린 후 캠프5를 나섰을 때 쌓인 눈은 뜻밖에도 깊었다. 허벅지까지 푹푹 빠졌다. 허 부대장과 교대로 러셀을 해가며 전진했지만 그대로 쓰러질 것만 같은 힘든 발걸음이었다. 무념무상, 아무것도 생각해서는 안 되고 생각할 수도 없는 오로지 앞길을 가로막는 눈을 헤치며 가파른 경사면이 끝날 때까지 걸어 나가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남봉을 저만큼 두고 한발 한발 걸어가고 있을 때 이미 시커멓게 변한 하늘에서 매운 눈발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날씨가 급변한다면 남봉을 지나 에베레스트 마지막 관문인 힐러리 스텝을 거쳐 정상을 오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동행하는 셰르파가 고개를 흔들며 더는 올라가지 못하겠다고 우겼다. 캠프5를 출발한 지는 벌써 13시간 반을 넘기고 있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적어도 남봉까지는 도착했어야 할 것이고 남봉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가량 소요된다 하더라도 하산하는 일이 더 큰일이었다.
그러나 정상을 눈앞에 두고 어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일석은 혼자서 하산하는 셰르파를 붙잡지 못한 채 허 부대장과 함께 한발 한발 안간힘을 다해 가며 전진해 나갔다. 죽는다 해도 젊은 날 그렇게 열정을 끓게 했던 에베레스트 정상을 기필코 오르고 싶었다. 얼마쯤 걸어갔을까. 앞장서서 가던 허 부대장이 그만 하산하자는 신호를 막 보내오고 있을 때였다. 바람의 여신 사가르마타의 위력인가. 눈을 뜰 수 없는 초자연적인 바람이 갑자기 몰아쳐 왔다.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무섭다는 살인풍 제트기류였다.
일석은 곤두박질치듯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이젠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다음 순간 일석은 밑도 끝도 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어슴푸레 느끼며 잠깐 의식을 잃어버렸다. 크레바스였다.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복병처럼 숨어 있는 얼음 구멍 안으로 굴러 떨어진 거였다. 얼음이 암벽의 껍데기처럼 얼어붙은 그 속으로 마치 텅 빈 호주머니 안으로 호두알이 쏘옥 들어가듯이 크레바스에 빠진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눈 더미에 파묻힌 것보다는 다행한 일인지도 몰랐다. 조난자가 눈 더미에 파묻히게 되면 스스로 눈을 헤치고 빠져나올 수도 없을 뿐더러 눈이 굳어지기 때문에 1시간도 못 가서 숨을 쉬지 못하고 죽게 마련이었다.
크레바스 안은 전혀 바람기가 없었다. 추위도 별 걱정할 것이 못되었다. 그런데도 만일 이 얼음덩이가 그대로 주저앉게 되는 날이면 얼음에 꽁꽁 얼어붙은 어항 속 금붕어의 꼬락서니가 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일석은 통증을 지긋이 참아내면서도 죽음의 너울이 발목을 힘껏 틀어쥐고 있다는 사실에 부르르 몸이 떨려 왔다. 일석은 크게 소리를 질러 보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목소리는 입안에서만 빙빙 돌 뿐이었다. 그 대신 귓속으로 석미의 음성이 희미하게 들려 왔다.
눈을 감지 말아요. 눈을 감으면 잠이 들고 말아요!
일석은 실제로 들려오는 듯 한 착각에 주위를 살펴보았다. 사위는 어떤 사물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했다. 다만 산 전체를 떠메고 어디론가 가려는 듯 한 바람 소리만이 소름끼치게 들려오고 있었다.
기운을 차리세요. 정신을 차리세요!
다시금 석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엔 그 목소리가 너무도 또렷해서 일석은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 허공을 향해 내젓기까지 했다. 보름달처럼 둥그스름한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석미는 꼼꼼하게 포장된 물건을 내밀고 있었다. 텐트 안에서였다.
“이게 뭘까?”
일석은 궁금해서 석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풀어보세요.”
포장 속에서는 뜻밖에 한 장의 사진이 나왔다.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었다. 신랑 신부 두 사람이 암벽을 타고 내려와 축하객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으며 주례 앞에 선 모습이었다.
“이 사진을 에베레스트 정상에 꼭 묻어 주세요.”
석미의 표정은 그야말로 진지했다.
“난 또 뭐라구.”
“우리 부부가 함께 정상에 올라섰다는 의미예요. 그리고 무사히 정상 정복을 마치고 내려오라는 마스코트도 되구요.”
석미는 이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석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물론 산에서였다. 전국암벽등반대회가 영암 월출산에서 있었을 때 일석은 남자 일반부의 한 선수로 출전했다. 그 무렵 일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클라이밍 미학에 심취되어 지내 온 터라 대학 입시에도 낙방한 재수생 신분이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나 초조한 생각도 암벽을 등반하고 나면 씻은 듯이 없어지는 것이어서 곧잘 학원을 빠져나와 산을 향하곤 했다.
그날 일석은 39미터 거리를 6분 내에 완등해서 우승이 눈앞에 와 있는 기쁨을 맛보고 있었다. 남자 일반부의 경기가 끝나자 곧이어 여성부 경기가 시작되었다. 한 여자선수가 암벽을 열심히 올라가더니 완등 10m를 남겨 놓고 추락하는 일이 발생했다.
“엄마앗!”
여자선수는 100미터나 쭈르르 미끄러지면서 자일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매봉 아래 잡목 숲에서 관전하던 산악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일석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여자선수를 향해 표범처럼 오르기 시작했다. 여자선수는 갓 여고를 졸업했는지 보송보송한 솜털과 함께 애티가 엿보였다. 일석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여자 선수는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있다가 씨익 웃어 보였다.
공포와 뒤범벅된 웃음이었다. 클라이머의 대담한 웃음이었을까.
그 일이 있은 뒤로 일석은 그 여자선수의 미소를 잊어 본 적이 없었다. 학과 공부를 하다가 눈알이 침침해 올 때면 창 밖 저편에서 그녀의 미소가 다가오곤 했다. 그러다가 두 번째로 만난 것은 그 이듬해 대학에 들어가서 지리산을 찾았을 때였다. 일석은 피아골에서 재수생 시절에 잠시 놓아두었던 카메라로 열심히 붉은 단풍을 담아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미처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헤어져서 퍽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뵙게 되었군요.”
월출산 매봉에서 만난 여자였다. 그녀는 예의 그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석미였고 대학 1학년이었다. 둘은 자연스레 만났고 만나는 횟수가 더해 갈수록 산행의 횟수도 늘어만 갔다.
석미가 달려갈 때까지만 참고 기다리세요!
다시금 석미의 간절한 목소리가 귓속에서 웅웅거렸다. 일석은 짚불처럼 사위어 가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질끈 물었다. 금방이라도 크레바스 입구에서 자일을 타고 석미가 내려올 것 같았다. 마치 매봉에서 자신을 구해 주었던 일석처럼.
얼음덩이가 씨잉 소리를 냈다. 에베레스트의 한 귀퉁이가 떠내려가는 듯 한 진동이 뒤를 이었다. 일석은 실낱처럼 가느다랗게 남은 의식조차 깡그리 사라지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3
아침이었다. 간밤에 언제 그렇게 매운 추위와 함께 설풍이 몰아쳤는가 싶게 하늘은 말짱 개어 있었다. 이따금씩 능선 위에서 눈보라를 날리는 에베레스트의 웅장한 모습이 슬쩍슬쩍 바라다 보이는 맑고 투명한 날씨였다.
석미는 한숨도 눈을 붙여 보지 못한 채 부석부석한 눈을 비비며 텐트 밖으로 나왔다. 눕체봉에서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 한 눈사태가 굉장한 폭발음을 내며 일어나고 있었다. 눈 더미인지 얼음더미인지 모를 태산더미가 눈보라를 일으키며 계곡으로 무너져 내렸다. 겨울치곤 자주 있는 눈사태였다.
본부텐트에서 나온 대원들이 텐트 위의 눈을 털어 내고 있었다. 남 대장을 비롯해서 대원들의 눈알이 하나같이 충혈 되어 있었다. 석미가 입을 열었다.
“대장님,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나요?”
남 대장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행여나 했던 석미는 발목의 힘이 싸악 빠지는 기분이었다. 남 대장이 곁으로 다가왔다.
“너무 염려하지 말아요. 이렇게 날씨가 좋아진 걸 보니까 하느님도 무심치 않을 거예요. 그렇잖아도 캠프3에 있는 대원들이 수색 작업을 하기 시작했을 테지만, 제발, 제발 살아만 주었으면 싶어요.”
남 대장이 눈을 지그시 뜨고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파충벌레들이 떼 뭉쳐 꿈틀거리는 것처럼 운무를 거느린 히말라야 산맥이 끝 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웨스턴 쿰이 저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혹시 비박이라도 했다면 살아 있겠지요? 허 부대장님도 체력이 강하시지만 일석씨도 누구 못지않게 체력이 강하니까요.”
“그렇게만 된다면 오죽 좋겠어요. 자 우리 실망하기에는 너무 이르니깐 기다려 보기로 합시다.”
남 대장이 침착성을 잃지 않으려고 말을 또박또박 끊어서 해왔다.
“대장님, 저 말이에요. 캠프3으로 올라가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여기에 있으려니까 궁금해서 죽겠어요.”
“위험해요.”
“자신 있어요. 걱정 마세요.”
남 대장의 얼굴에 깊은 고뇌의 빛이 일순간 무겁게 스쳐 지나갔다.
“나도 양일석 대원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오.”
남 대장이 다시 산 아래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남 대장이 일석씨를 친동생처럼 아껴 주는 일은 산악계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남 대장이 산악계 사람들을 만나면 곧잘 일석씨를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3년 전 남 대장과 일석씨가 다른 대원들과 함께 미니 원정대를 구성하여 카라코람의 라키오트피크(7,070m)를 오르려고 했을 때, 네 사람의 대원 중 누구 한 사람을 제외하고 정상에 오르게 하느냐는 문제로 난처함에 빠진 적이 있었다. 모두가 피가 펄펄 끓는 젊은 나이여서 누구 한 사람을 제외시킨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일석은 서슴지 않고 정상 정복을 포기했다. 이제는 영원히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은 어려운 결단이었다. 남 대장은 그런 일석의 마음씨를 보고 침이 마르게 칭찬을 했다. 산악인이라고 해서 정상을 오르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인간이 되지 않고서는 제아무리 높은 산을 오른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 대장은 이 말을 곁들여 가며 일석씨를 추켜세웠고 신혼 살림집을 찾아올 정도로 항상 아껴 주는 산악 선배였다.
“저도 캠프3으로 올라가서 수색 작업을 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석미가 말을 끝내기도 전 캠프의 대원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석씨와 함께 1차 공격조였던 허 부대장이 살아 돌아온다는 거였다. 처음 그 말을 듣는 순간 석미는 일석씨도 살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일석씨의 생사는 아직 확인이 되지 않은 채 허 부대장만 비박지에서 구출되어 침낭에 실려 하산하고 있다는 거였다.
석미는 허 부대장의 생존 소식에 오히려 맥이 탁 풀렸다. 분명 일석씨는 조난을 당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허 부대장 혼자만 구출될 리는 만무했기 때문이었다. 일말의 희망이 실밥처럼 투두둑 떨어지면서 벼랑 끝에 선 아찔한 기분이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일석씨의 혼을 몸속에 담아 놓지 못한 것이 갑자기 후회스러웠다.
결혼한 그해 여름 지리산 칠선골에 갔을 때였다. 결혼해서 반년이 지났으므로 석미는 솔직히 아이를 갖고 싶었다. 일석씨를 쏙 빼닮은 아이가 자꾸만 머릿속에서 떠오르곤 했다. 그러나 석미는 아무렇게나 갖긴 싫었다. 외설악으로 떠나자는 일석씨를 부득부득 우겨서 칠선골 선녀탕 곁에 텐트를 쳤다. 지리산에서 가장 긴 골짜기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발길이 덜 묻은 원시의 이부자리에서 석미는 산처럼 듬직한 아이를 얻고 싶었다. 맑다 못해 청람 빛으로 소를 이루며 둥싯둥싯 솟은 계곡을 타고 흐르는 청류의 선녀탕은 말 그대로 하늘의 선녀들이 내려와 멱을 감고 올라가는 전설이 담겨져 있을 것 같았다. 석미는 잠자리 나래와도 같은 옷을 입은 선녀가 되어 물을 끼얹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석씨는 선녀의 유혹에도 별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에베레스트를 정복하고 나서 갖자구. 그래야 진짜로 산을 움직일 만큼 큰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어? 에베레스트의 기상을 가진 아이가 말야. 핫하하.”
일석씨는 크게 웃어젖히며 뾰로통해지는 석미를 다독거렸다. 그리고 그때 일석씨가 한 말처럼 에베레스트까지 온 것이었지만 일석씨는 히말라야의 설인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었다.
석미는 자신의 텐트 안으로 들어가 배낭을 짊어진 후 캠프3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심해서 올라가야 되요.”
남 대장 앞으로 가서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 걸어 나가는 석미의 등 뒤로 남 대장의 말이 달라붙었다.
“알겠어요.”
석미는 산소통을 짊어지고 올라가는데도 얼마 못 가서 숨을 씩씩거렸다. 이미 깔려져 있으리라고 여겼던 고정 로프는 어제 강한 바람에 의해 유실되어 버리고 말았는지 보이지 않았다. 가쁜 숨이 가슴을 빠개 버릴 것 같았다.
석미는 200m도 못 가서 설사면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오르는 사람이 보였다.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여자인 처지로 혼자 그렇게 올라가도 되는 겁니까?”
지영용 대원이었다. 약간 나무라는 투로 말하고 있었으나 그의 눈빛은 한없는 따뜻함이 담겨져 있었다.
“미안해요.”
“대장님께서 석미씨의 뒤를 따라가 보라는 지시가 있어서 부지런히 올라오는 길입니다.”
석미는 지영용대원이 일석씨와 매우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한 준비 작업도 일석씨와 지영용 대원이 거의 도맡다시피 해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훈련을 차질 없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강풍과 혹한의 저지를 뚫고 빙하 지대와 암벽 및 설사면을 지나 정상까지 길고 긴 길을 가려면 장비 구입이 큰 문제였다.
지휘본부용 텐트, 식당 텐트, 식량 창고와 의무실 텐트, 캠프용 텐트 등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장비 외에도 많은 텐트가 필요했다. 취사용구며 연료, 게다가 주식과 부식, 간식의 구입도 손쉽지만은 않은 일이었으나 유독 일석씨와 지영용 대원이 치밀하고 용의주도하게 해냈던 거였다.
“어서 오릅시다. 자, 힘을 내시고…….”
석미는 새롭게 힘이 솟아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쓰러질 것만 같았던 조금 전과는 달리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있었다.
4
눈이 떠졌다. 극심한 피로를 견뎌 내지 못하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일석은 묘한 희열이 혈관을 파고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조난을 당한 사람의 수면은 곧 죽음과 직결된다는 것을 일석은 잘 알고 있었다.
크레바스 입구 쪽이 잿빛 어둠을 털어내고 희끄무레한 빛살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크레바스 밑바닥은 침침한 어둠이 칙칙하게 괴어 있었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참아 내기가 힘들 만큼 몹시 배가 고팠다. 요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일석은 배낭 속의 비상식량을 꺼내 먹기 위해 주위를 살살 더듬거렸다. 잠든 사이에 일석은 좀 더 아래쪽으로 미끄러졌고, 그 바람에 배낭이 벗겨져 어디론가 굴러가 버린 모양이었다. 엉금엉금 기면서 더듬는 손끝에 뭉클하게 잡히는 물체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뻣뻣하게 굳어 버린 시체였다.
“이크!”
혼이 다 달아나는 듯 섬뜩한 느낌이 손끝으로 전해 왔다. 얼른 뒤로 물러섰다. 만일 자신도 구출을 받지 못한다면 저런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하니 머리칼이 서릿발처럼 곤두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살아나야 한다는 삶의 욕구가 맹렬히 솟구쳤다. 그렇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나야 한다. 일석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다.
일석은 용기를 내서 시체를 더듬어 내려갔다. 혹시 이 사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물건이라도 있을까 해서였다. 머리에 낀 헤드램프가 손에 잡혔다. 그것은 다행히도 충전된 전지가 남아 있었다.
헤드램프에 비춰진 시체는 언제 조난을 당했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 말짱했다. 코가 큰 걸로 보아 외국인이 틀림없었다. 배낭을 풀어보니 정상에 오르면 펼쳐 들 국기가 나왔다. 무수한 별이 박힌 성조기였다. 시체의 주인공은 정상에 올라 이 성조기를 치켜들고 감격에 찬 순간을 맛보려고 했을 것이다.
직경 3m의 크레바스는 얼음의 무덤 그것이었다. 깊이가 40m 가량 되는 걸 짐작한 일석은 조금 전의 살아야 한다는 삶의 욕구와는 달리 체념이 슬금슬금 밀려왔다. 그리고 고려장을 당한 사람처럼 머잖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 공포심이 와락 가슴을 채웠다. 한쪽 다리가 부상인 채 크레바스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석은 어느 틈에 훌쩍이기 시작했다.
“아악!”
그 때였다. 크레바스가 무너져 내리는 듯 한 둔중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입 벌린 크레바스는 또 다른 산악인을 널름 삼켜 대고 있었다.
“여보시오! 다친 데는 없어요?”
일석은 털퍼덕하며 떨어진 조난자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일석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헤드램프에 비춰진 조난자는 다른 사람 아닌 영용 형이었다. 눈물이 펑펑 솟구칠 정도로 반가웠다.
“영용 혀엉!”
일석은 영용 형의 손을 으스러져라 붙잡으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니, 자네는…….”
“일석이에요. 일석이.”
“자네가 살아 있었구만 그래. 그런데 여기서 자넬 만나다니…….”
“어쩌다가 영용 형도 이 지경을 당하게 되었어요? 대장님을 비롯해서 여러 대원들에게 미안해 죽겠어요.”
일석은 아예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바보같이 울긴. 여기서 살아날 궁리나 해야지. 자네를 찾아 헤매다가 나도 조난을 당하고 말았지만, 옳게 찾긴 찾았군 그래.”
“그러고 보니 나 때문에 영용 형까지 죽을 뻔했군요.”
“아닐세. 오히려 나 때문에 자네가 목숨을 잃을 뻔한 거지. 내가 에베레스트에 가자고 한 거나 다름없으니까.”
“엽서 한 장의 사연 가지고 말씀하시는군요.”
일석은 희미하게 웃으며 에베레스트에 오기 전 영용 형에게서 날아온 엽서를 떠올렸다. 그 무렵 일석은 갑자기 산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석미와 신혼의 달콤함을 즐기고 있었다. 회사와 집을 시계추처럼 오가는 것이 일과의 전부였다.
그럴 때 영용 형에게서 소식이 왔다. 영용 형은 중학교 선배이기도 했고, 클라이밍을 함께 즐겨 온 악우(岳友)이기도 한 사이였다. 산악회관에서 산악연맹 고문으로 있는 장종명씨의 시집 발간 겸 에베레스트 원정 계획이 발표되니 참석해 달라는 엽서의 내용이었다. 일석은 마치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회관을 찾아갔다. 장종명 고문의 목소리가 우렁우렁 장내를 울리고 있었다.
“시방 우리는 그렇게도 갈망해 오던 히말라야에 왔습니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 정복을 위해 한발 한발 오르고 있습니다. 베이스캠프를 설치했고, 아이스폴을 단시일에 건너 제1캠프, 제2캠프, 제3캠프, 제4캠프를 설치해 가며 사우스콜을 오르고, 곧이어 사가르마타까지 올랐습니다. 이제 정상을 내딛는 감격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그동안 벼르고 벼른 에베레스트의 원정 계획을 착수한 날이기 때문입니다.”
장고문은 사뭇 떨리는 목소리가 되어 갔다. 빈 의자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좌중이 찬물을 끼얹은 듯 팽팽한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회원 누구나 할 것 없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며칠 후 원정대원으로 선정된 일석은 홍은동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일석의 등반을 무엇보다 싫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어머니는 손수 회초리를 들고 일석의 아랫도리며 등짝을 후려 팰 정도였다.
“너도 네 아버지처럼 될 거여? 네 아버지는 저 세상으로 가는 날까지 돌에 미쳐 날마다 산이고 개울이고 다니더구나. 살림하고는 아예 담 쌓고 말이다. 그런데 너는 등산인가 뭔가 하는 것에 미칠랑갑구나. 아이고, 내 팔자야.”
어머니의 말대로 아버지는 철저한 수석인이었다. 주말이면 으레 낡아빠진 배낭을 짊어지고 집을 나서곤 했다. 일석에게도 한 일(一)에 돌 석(石), 즉 한 개의 돌멩이라는 뜻으로 일석(一石)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항상 불만이었고 집안에 흩어져 있는 돌만 보아도 정나미가 떨어진다고 늘 말하곤 했다. 석미와 결혼을 하려고 했을 때에도 어머니의 반대는 보통이 아니었다. 여자가 배낭이나 짊어지고 이산 저산 돌아다니는 것이 여자일 수가 있겠느냐며 완강히 반대를 했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에베레스트에 가겠다는 일석의 얼굴을 한차례 쳐다보고는 묵묵부답 말이 없었다. 일석은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식은땀이 흘렀다. 한참 후에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아버지한테도 지고 살아왔는데 자식인들 고집을 꺾을 수가 있겠냐. 부디 조심해서 다녀오너라.”
일석은 어머니의 허락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큰절을 올렸다. 어머니가 저리도 좋아하는 산은 다녀서 뭣하나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일석은 예전 같지 않은 어머니의 태도에 용기가 치솟아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부터는 오로지 에베레스트 등반을 위한 준비 작업에만 전력투구했고 설악산, 무등산, 한라산 등지를 다니며 트레이닝을 해왔던 일석이었다.
헤드램프가 기운을 다해 절로 꺼져 버렸다. 해가 솟아올랐는지 크레바스 안은 그리 어둡지 않았다.
“영용 형! 내가 죽는 것은 순전히 내 운이 그 정도였으니까 그렇다손 쳐도 영용 형까지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어떡하죠?”
“우리가 함께 살아나야지. 용기를 내자구. 참, 일석이한테 피켈이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미끄러지다가 크레바스에 빠질 때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다니깐.”
“저도 추락했을 때 어디론가 가버렸어요. 잠깐 기다려 보세요.”
일석은 조금 전에 보았던 시체 곁으로 다가가 보았다. 흐릿한 윤곽으로 시체가 보였으므로 피켈과 자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영용 형! 여기 보세요. 우리는 살아날 수도 있어요.”
영용 형이 고개를 돌려 일석을 바라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시체가 있잖아!”
“우리도 이 시체처럼 죽지 않으려면 기필코 크레바스를 빠져나가야 되요.”
일석은 피켈과 자일을 영용 형에게 건네주었다. 영용 형이 아이젠의 발톱을 송곳처럼 빙벽에 박으면서 피켈을 휘둘렀다. 그때 크레바스 위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일석씨이이……. 일석씨이이…….”
분명 석미의 목소리였다. 석미의 목소리가 메아리 되어 들려오고 있었다. 영용 형이 구레나룻 사이로 흰 이를 모조리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일석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목청이 아프도록 소리를 질렀다.
“여어이! 여어이!”
잠시 후에 기다란 자일이 출렁거리며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호랑이에게 쫓긴 어린 남매에게 하늘나라에서 구원의 밧줄이 내려오는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스포츠서울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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