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업 진출이라는 웅비
기회는 기회를 낳는다. 생각 없이 우연히 시작한 일이었는데, 훗날 인생의 큰 기회가 때가 있다. 김재철에게 금융업은 뜻밖이었다. 2003년에 동원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어 독자적인 성장세를 지속하던 한국투자금융지주는 김재철의 사업 역정에서 기념비적인 성과이다.
금융업에 진출한 이후에도 김재철은 현명한 결정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룬다.
하버드 대학 연수가 준 큰 선물
그가 하버드 대학 연수를 떠날 때는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뛰어든 선망선이 채 자리도 잡기 전이었다. 게다가 작은 사업체도 아닌데 경영자가 13주나 회사를 빈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다. 김재철은 1981년 2월 9일에 떠나 5월 31일에 돌아온다. 귀국길에 로스엔젤레스의 스타키스트 통조림 공장도 방문한다. 귀국 후 6개월 정도 지난 1981년 12월 3일, 서부태평양 어장 조업을 마치고 코스타 데 마필호도 부산에 입항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3주씩이나 회사를 비운다는 것은 회사 경영자들이면 놀라운 일이다.
“내가 서울대 AMF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때 자주 들은 이야기가 하버드 ‘케이스 스터디’라는 용어입니다. 지금이야 정보의 시대이니 굳이 그곳에 가지 않더라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그래서 언젠간 시간을 내어 꼭 하버드 케이스 스타디를 직접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결정이 훗날 사업의 결실로 이어질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도 있고, 하버드에 가면 아무래도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버드 대학의 연수가 큰 기회를 줄지는 아무도 몰랐다.
“제가 연수에서 포착한 중요한 것 하나가 증권업의 가능성입니다. 미국에서는 젊고 똑똑한 친구들이 대부분 금융업에 뛰어드는데 그 모습이 저에게는 생소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증권업 같은 금융업은 그다지 이미지가 좋지 않았거든요.”
당시에 그가 증권업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버드 AMP 과정에서 그는 ‘증권업은 기회가 주어진다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유망사업이다’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의 스타키스트에서 발견한 참치캔의 사업화 가능성이었다.
50억 유보급으로 증권업 진출
1981년 6월부터 시중은행의 민영화에 따라 삼보증권, 동양증권과 함께 국내 대표적 증권사인 한신증권이 매물로 시중에 나왔다. 이 회사는 1968년 12월에 한국신탁은행의 전체출자로 설립되어 1976년 6월부터 서울싲탁은행을 비롯한 5개 시중은행이 공동출자를 해 자본금 50억으로 운영되던 회사였다. 한신증권의 매각 공고가 나왔을 때 김재철은 충분히 준비가 된 상태가 아니었다.
예상 낙찰 가격은 70억원대로 추정되었지만 동원산업의 자본금은 20억원밖에 없었다. 자본금 20억원의 회사가 70억원 규모의 회사를 매입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자산 재평가를 하면 자본금의 몇배나 되는 내실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70억원이 넘는 북양 트롤선이나 참치 선망선 한 척을 구입하는 셈치고 매입에 들어갔다.
김재철에게는 운이 따라주었다. 입찰에 태평양화학과 미륭건설, 그리고 동원산업이 참여했다. 그런데 결과를 확인하자 동원산업은 71억 2000만원, 태평양화학은 71억 1.750만원, 미륭건설은 71억 1.250만원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한신증권을 인수한 것이었다.
김재철은 10년 정도 고전하면서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이때 거쳐간 대표적인 사람들이 김정태 전 국민은행장과 박현주 미래에셋증권 회장이다. 특히 한국 금융계의 기린아로 통하는 김정태는 36세가 되는 1986년에 김재철에 의해 상무로 스카우트되어 17년 6개월 동안 함께 일했다. 김정태는 인센티브 제도 도입, 투명경영, 무차입경영, 스톡옵션 제도 등으로 한국 금융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는데, 이 모든 실험들이 동원증권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997년 동원증권 사장을 끝으로 51세에 주택은행장으로 스카우트되어 다시 한 번 실력을 발휘했다.
한국투자금융지주의 출범
김재철의 장남인 김남구는 게이오 대학 MBA를 거쳐 1991년 4월에 동원증권(단시 한신증권) 대리로 금융업에 입문해 경영자로서 훈련을 받는다. 입사 이후에도 그는 미국 와튼 경영대학원 및 중국 칭화대 MBA를 졸업하는데, 김재철은 그에게 1991년 동원산업 주식 55만 주를 증여한다. 주식을 아들에게 넘기면서 증여세 62억여 원의 증여세를 자진신고해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시 조선일보에서는 이례적으로 사설에서 다루기까지 했다.
김재철은 일찍이 금융업에 능력이 있다고 판단한 장남에게 승계를 준비한다. 2002년에 설립준비팀을 발족시켜 2003년 5월 30일 금융지주회사를 출범한다.
이후 2004년 12월 13일에는 동원그룹과 계열 분리를 완료함으로써 지분뿐만 아니라 경영상의 모든 의사결정에서 독립적인 행보를 한다. 여기서 또 한 번의 큰 기회를 맞는데, 그것은 2005년 한국투자증권을 인수해서 오늘날의 한국투자금융지주로 발전하게 된 일이다. 한국투지증권의 인수와 주역은 장남인 김남구 부회장이지만 여기서도 운이 따랐다. 아들이 주도했지만 아버지의 조연이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김남구 부회장은 5.412억을 쓴 대신 2등으로 많이 쓴 칼라일(글로벌 사모펀드) 그룹은 5.400억원을 썼기 때문이었다. 12억원을 더 써서 인수했던 것이다.
계열분리 이후에는 모든 의사결정은 김남구 부회장이 도맡아 하고 있다. 한국투자금융지주는 2014년을 기준으로해서 한국투자저축은행, 한국투자신탁운용, 한국투자벨류자산운용, 한국투자증권, 한국투자파트너스를 포함해 자회사 6개, 손자회사 16개, 해외 사무소 5개 등을 거느린 한국의 메이지 금융그룹으로 상장했다. 2014년 자산액은 25조, 매출액은 3조 3조 6.871억 원에 달한다.
사업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자신이 직 간접으로 의사결정을 하기 보다는 적임자에게 의사권한뿐 아니라 실소유권까지 양도했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투자금융지주가 있다. 이런 면에서 적시에 계열 분리를 단행한 김재철의 용단과 지혜가 돋보인다. 수산업에서 출발해 전혀 관련이 없는 새로운 업종에서 화고한 위상을 차지할 정도로 기업을 성공시킨 경우는 김재철이 처음이었다.
사세확장을 향한 노력
“선장은 다음 어장을 생각해야 한다. 내일 아침엔 어디로 갈 것인가.”
그는 평생 이 고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두 번째로 뛰어든 사업이 2차 산업인 제조업이었다. 김재철은 주력사업과 직 간접으로 관련 있는 분야를 중심으로 사세를 확장해 왔다. 그래서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이한 점은 제조업분야에서는 성적이 좋았지만 외식업 같은 서비스분야에서는 기대한 만큼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주력사업을 보강하는 사업 다각화의 대표적인 사례는 1981년 6월, 동원산업 내에 성남식품사업소를 열고, 이를 기초로 동원식품주식회사를 만든 일이다. 동원식품은 수산물 냉동 · 냉장업 및 도소매업에 큰 비중을 두었다가 점차 수산물 가공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다. 동원식품의 주력사업은 처음에는 북양에서 잡은 명태, 대구, 가자미를 냉동하여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사업 확장의 가능성은 없을까, 하는 것은 김재철의 평생 화두였다. 팔순을 넘긴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리하여 포장재 사업을 주력사업의 경쟁력 강화 차원과 새로운 수입원 창출 차원에서 접근한다. 그가 이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외 기업들의 사례를 보면 포장재 사업 분야의 경쟁력이 기반이 되어야 원가 경쟁력과 품질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경영상의 판단에서 출발한다.
1991년 6월, 통조림 캔용 공관을 생산하는 삼양공업이 설립되었으며, 1990년대를 전후해 동원정밀이 세워졌다. 동원정밀은 1986년 3월 시판되기 시작한 김을 담기 위한 플라스틱 용기 제조사였다. 이들 사업은 상품을 담는 용기이기는 하지만 전통적인 의미의 포장재 사업이라 할 수는 없다. 실제적ㅇ딘 사업은 1996년 경기 광주시에 있는 작은 인쇄소 하나를 인수하면서 시작되었다. 김, 어묵 등의 포장지, 즉 작은 파우치를 만드는 인쇄소였다.
동원그룹에는 3대 성장축이 있었다. 원양어업과 식품가공업, 그리고 종합포장제 사업이다. 동원시스템즈는 국내 포장재 업계에서 사실상 1위임을 자부하고 있다.
김재철은 영원한 ‘갑’이었던 스타키스트를 린수하기에 이른다. 사모아 스타키스트 공장에 처음으로 납품했던 선장이 김재철이었다. 한양어선 선장 시절부터 스타키스트에 참치를 납품한 지가 50년이 지났고, 반세기가 흐른 지금 스타키스트와 동원이 아예 한 배를 탄 거였다.
젊은 날부터 스타키스트는 그에게 영원한 갑(甲)이었다. 참치를 팔기 위해 잡아 오는 사람은 늘 많았고 참치를 구입해서 통조림 캔으로 만드는 회사는 사모아에 스타키스트와 밴 캠프 사 두 곳이었다. 스타키스트가 갖고 있는 가격 결정권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는데, 거기에서 가격 인하 요구가 잦을 때는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동원그룹은 스타키스트를 인수함으로써 당장 두 가지 효과를 얻는다. 하나는 동원산업의 구매와 제조의 강점을 내수시장을 넘어서 글로벌 시장에서 확대 적용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모범적 지주회사 전환 사례 - 동원엔터프라이즈, 한국투자금융지주
김재철이 최초의 지주회사로 인정받게 된 의미는 무엇일까? 지주회사는 주식을 소유함으로써 다른 회사 사업활동의 주요 사항에 관여하고,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를 말한다. 지주회사는 자회사에서 받는 배당금을 주 수입원으로 하여 투자전략 및 포트폴리오 관리 등 자회사의 경영이나 관리 이외에 독립된 사업을 영위하지 않는 순수지주회사와 독립된 사업을 영위하는 사업지주회사로 나눌 수 있다. 지주회사는 출자에만 집중하고 자회사는 고유 사업에만 전념할 수 있으므로 지배구조를 투명하고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2001년 4월 16일자로 순수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가 출범한다. 이 지주회사는 식품관련 계열사 주식을 현물 출자해 자본금 470억 원, 총 자산 695억 원으로 시작되었다.
동원그룹은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인 동원엔터프라이즈를 중심으로 18개 주요 계열사로 구성되어 있는 생활산업그룹이다. 18개 계열사드은 동원건설사업 및 통신장비업을 영위하는 동원T&I, 포장재 회사인 동원시스템즈를 제외하고 모두 수산 및 식품 관련 사업이며 주력회사는 동원산업과 2000년애 동원산업에서 분리된 동원F&B이다.
동원엔터프라이즈에 더해 동원그룹에서 출발해 독자적으로 큰 축을 형성하고 있는 한국투자금융지주가 있다. 이 회사는 동원산업이 1982년에 인수한 동원증권과 2005년 2월에 인수한 한국투자신탁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2004년 12월에 계열분리가 이루어졌다. 현재 한국투자금융지주는 한국투자증권과 한국투자금융지주를 주력회사로 모두 15개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두 지주회사들 사이에는 단 한 주의 주식도 교차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법적으로나 경영적인 면에서 완전히 독립해 수행되고 있다.
창업자 이후에 경영 일선에서 혼란스러운 상황이 자주 일어나곤 한다. 김재철은 이런 점에서 깔끔하게 지분구조 및 경영구조로 독립시킴으로써 후계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의 기업들을 성장시켜나갈 수 있는 틀을 완비했다.
“사업을 하면서 어려운 경험을 하도 많이 해서 딸들을 키우면서 항상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 하도록 해서 되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어요. 남자애들은 그렇다 쳐도 딸들까지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딸들이 사업을 하겠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딸들에게는 그런 고생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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