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사냥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더군.”
황대장에 말에 베레모 사내가 물었다.
“개고기는 으째서 안 먹었답니까?”
“토사구팽이라는 말 있잖은가. 사냥꾼이 사냥을 마치고 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말.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다가 먹지 않는다는 것이지. 사냥꾼이 개고기를 먹으면 사냥개가 죽어라 사냥을 하겠느냐구. 어쨌거나 사냥을 나갈 때 개고기를 먹으면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속설 도 그 때문인가 봐.”
“그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구만요.”
베레모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제상을 치우자 노인이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사 써.”
하고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노인은 발도 빨랐다. 30분 남짓 산길을 걸어갔는데도 오히려 발걸음은 더 빨라졌고 나는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산세를 살펴본다든지 아니면 멧돼지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무조건 노인의 뒤를 쫄쫄 따라가는 꼴이었다.
그런데 잠깐잠깐 멈춰서 산세를 훑어보던 노인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리며 주저앉았다.
“자, 다들 여길 보라구.”
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조그만 웅덩이였다.
“돼지가 진흙목욕을 하기 위해 온 몸을 비벼댄 기여. 이제 그 놈이 가까이 있다는 것이제.”
그 때 웅덩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멧돼지 똥을 발견했다며 타잔이 가만히 소리쳤다. 시커멓게 생긴 녀석의 똥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낙엽 위에 뒹굴고 있었다. 타잔이 손으로 집어 들고 두어 차례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구린내가 심하게 나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너구리 똥은 너구리 특유의 노린내가 심하게 나제마는 돼지는 구린내가 나는 법이제. 참, 그 놈 털도 보이는구먼.”
노인은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엎드리더니 눈도 어지간히 밝은지 빳빳한 털 하나를 주어 들었다. 일자로 쭉 뻗은 멧돼지 털은 7-8cm 정도의 크기였는데, 검은 색과 흰색이 함께 섞여 있었다.
멧돼지의 발자국은 계속 발견되었다. 노인은 발꾼의 실력을 십분 발휘했다. 발자국이 발견될 때마다 엄을 살피며 발터와 보폭을 알아맞히는 노인의 전문지식은 신문기사에서 읽었던 대로 경험이 풍부했다.
“여름철에는 돼지가 칡밭을 좋아해서 잠자리를 거기에 잡는 경우가 많아. 칡밭은 서늘하고 그늘지면서도 습도가 높기 때문에 가장 좋아하는디, 이런 곳에 있는 돼지를 찾아낼라면 엽견의 능력이 뛰어나야 하는 기여. 그러니께 돼지가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나올 수 있도록 영리하게 짖어내는 솜씨가 필요한디 말이여, 엽견들이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놓치기가 일쑤여서 사냥을 실패하고 마는 기여. 게다가 칡꽃 향기가 진동하기 땜새 엽견이 돼지의 냄새를 놓치기가 쉬워서 추적을 제대로 못하는 때도 있어.”
그 때 타아앙, 하고 총소리가 들려왔다. 총소리가 나는 바람에 노인은 그 쪽으로 향했는데, 얼마쯤 걸어갔을까 다른 산등성을 타고 나타난 세 사람의 엽사들과 마주쳤다. 타잔이 반가운 표정으로 앞으로 나서더니 물었다.
“우리가 시방 멧돼지 하나를 쫓고 있는디 혹 당신들도 우리가 쫓는 멧돼지를······?”
“쫓다가 포기하고 내려가는 길이오. 우리가 이틀째 쫓았지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원.”
세 엽사 중 카키색 사냥복 차림의 사내가 이미 지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투덜거렸다.
“대체 어떻게 생겼든가요?”
“산신령입디다, 산신령······. 어찌나 큰놈인지 꼭 잡고 싶었는데 그만 내려가는 길이오.”
아쉬움이 여전히 남아 있었는지 카키색 차림의 사내는 쩝쩝해 하면서 하산을 서둘렀다. 노인은 그들의 말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골짜기와 산등성을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그 녀석의 발자국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멧돼지를 산신령이라고 하다니. 호랑이 등을 탄 백발노인이 산신령이 아니라 무법천지처럼 돌아다니는 멧돼지가 산신령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나는 문득 먼 산을 바라보며 경운화사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날더러 산신령 탱화를 잘 그린다고들 하지. 왜 그런고 하니 산신령을 잘 그리기까지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거든. 내가 대흥사 진불암(眞佛庵)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갑자기 이상하게도 샅이 아파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지냈지 뭔가. 그래서 다시 탱화작업을 하지도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밤 산신령이 나타난 거야. 산신령이 먼저 묻더군. 네 몸이 불편하다는데 그 곳을 한 번 보여주려므나. 나는 부끄러운 곳이고 해서 괜찮습니다, 하고 대답을 했어. 그랬더니 산신령은 계속 보여 달라는 것이었어. 아마 일곱 번은 거절했을 거야. 하지만 산신령은 털끝만큼도 물러날 기색이 없어보여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바지를 내린 후 그곳을 보여주었지. 그랬더니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로 사정없이 그곳을 내리치는 거였어. 어찌나 아프던지 아얏, 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눈을 떴는데 세상에! 걸음도 못 걷게 하던 그곳이 씻은 듯이 나아버렸더라구. 그 길로 나는 산신각에 들어가 촛불을 켜고 기도를 드렸지.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꿈속에 나타난 산신령의 초를 낸 거야.
나도 경운화사처럼 산신령을 그린 적이 있었다.
중학교 동창생이 내게 산신령 한 점을 부탁했다. 그는 사업을 막 시작할 때였는데, 산신령을 사업장에 걸어놓으면 잘 풀린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막무가내로 조르는 것이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어서 호랑이와 함께 있는 산신령을 그려 주었다. 하얀 머리털이 허리까지 뒤덮은 맨발의 산신령과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털이 빳빳하게 선 무서운 형상의 호랑이가 있는 그림이었다. 그리고 까마득 잊고 지냈는데 3년 쯤 지났을까, 그 동창생한테 연락이 왔다. 사업이 크게 발전됐다면서 그게 다 산신령 그림 때문이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날 집으로 초대하였는데, 막상 동창생 집을 찾아갔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으리으리한 주택에 잘 꾸며진 정원, 게다가 미니 골프장까지 차려놓고 세상답게 살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돈을 벌었어. 이제 난 지키기만 해도 될 정도로 돈을 벌었는데, 다 친구가 그려준 산신령 덕택이었다구.”
동창생은 집안 구석구석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그리고 어찌나 음식을 푸짐하고 가지 수가 많게 장만했는지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였다. 동창생은 프랑스 코냑을 따라주며 말했다.
“이상한 일이었어. 100억대의 사기꾼이 해외로 도망을 갔는데 글쎄, 내 돈 10억을 하루 전에 갚아주고 떠났다니까. 행운이랄까, 어때 행운의 여신이 날 지켜주고 있질 않나?”
동창생은 거듭 고맙다며 돈뭉치를 호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다 산신령 그림 덕택이니까 받아도 돼.”
동창생은 나를 보듬고 눈물까지 펑펑 쏟아내는 것이어서 난생처음 환쟁이의 보람을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나 홀라당 옷을 벗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술도 취했지만 제 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과일을 들고 오던 동창생부인이 그 모습을 목격해 버린 것이었다. 비명 소리를 지르며 동창생부인은 도망쳤고, 나는 얼른 옷을 주워 입은 후 그 집을 나와 버렸는데, 그 뒤론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지금도 사업은 여전히 잘 되고 있는지.
“안 되겠구만. 저기 젊은 사람 둘이 저 아래에서부텀 훑어와사 쓰것어.”
갑자기 노인이 나와 여강을 가리키며 지시를 했다. 순간, 이 무슨 낭패인가 싶어 부아가 치밀었지만 꾹 참고 노인을 쳐다보았다. 노인의 말에는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있었고, 어차피 멧돼지 사냥에 끼어든 이상 노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와 여강은 산을 내려가 또 다른 산등성을 타기 시작했다. 나뭇잎이 죄 떨어진 초겨울이라곤 하지만 길이 없는 산을 탄다는 것은 여간 고역이었다. 메마른 가시덩굴이 이마며 뺨을 스칠 때마다 쓰리고 아팠다. 이 무슨 팔자에 없는 고생이란 말인가. 더구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숨이 목에까지 헐떡거리면서 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셨다. 이럴 때 만일 산신령이란 멧돼지가 나타나면 꼼짝없이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맑고 투명한 겨울 하늘 위에 솔개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날씨가 좋으면 솔개가 높이 난다더니 솔개는 어느 틈에 원을 그리며 빙빙 날고 있었는데, 높은 하늘에서 홀로 움직이는 유일한 운동체였다.
“죽을 맛이군요.”
나는 비명 소리가 절로 흘러나오는데도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말 한 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줄 법도 하련만 묵묵히 앞을 가로막는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기도 하고 가시덩굴을 정글용 칼로 잘라내면서 걸어 나갔다. 노인이 시킨 대로 산등성 하나를 넘었지만 멧돼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사지의 맥이 죄 풀리는가 싶을 만큼 기진맥진하고 있을 때 그녀의 자지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놈의 발자국이 여기 있다!”
땅 속에 박힌 바위 때문에 나무와 풀이 자라지 않는 손바닥만한 공터에 멧돼지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막상 녀석의 발자국이 발견되자 순간 목이 움츠려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산삼이라도 발견한 심마니처럼 흥분된 목소리로 본부에 연락하자 노인과 타잔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총소리에 놀란 나머지 무섭게 도망친 게 틀림없구만. 아무래도 오늘은 포기해야만 되것어.”
노인이 멧돼지의 발자국을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하기야 이미 저녁 해가 설핏해지고 있었다. 더구나 산 속의 저녁은 빨리 찾아오는 법이어서 서둘러 하산을 서둘러야만 했는데, 마을까지 내려갈 필요가 없이 캠핑카 보리호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밥을 짓고 국을 끓였다. 특별히 대중공양을 지어보지 않았을 뿐, 밥과 국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하산한 후로 쌀과 된장만으로 어디서든 버텨온 나였다. 특히 박씨 제각에서 3년 동안 지낼 때, 그 흔해빠진 라면 한 번 먹지 않고 삼시세끼 따뜻한 밥만 고집하며 지냈던 거였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야생초를 한 주먹 뜯어다가 국에다 넣기도 하고 된장과 버물리면 끝이었다.
그런데 밥 한 그릇을 된장국에 말아서 단숨에 먹고 난 황대장이 웬일인지 노인에게 불편한 심정을 드러냈다.
“영감님. 우리가 시방 영감님만 믿고 오늘 하루해를 보낸 줄 아셔야 합니다.”
황대장은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는 듯 타잔과 베레모 사내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유야 어쨌든 오늘 하루 망친 것이고, 나중 극적으로 발자국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멧돼지를 잡게 해달라는 경고였다.
“내가 젊었을 때에는 일곱 날을 쫒아가 잡은 적이 있었제.”
“참말로 말입니까?”
노인의 말 한 마디에 황대장은 은근슬쩍 놀라고 있었다.
“산을 알아야 써. 산을 모르고는 헛수고만 할 뿐인 기여.”
“그야 너무도 당연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뭔가 얘기를 더 듣고 싶어 하는 황대장의 눈치에도 노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는 피곤한지 눈을 감더니 금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자 타잔이 황대장을 어르고 나섰다.
“형님. 일단 영감님을 믿어 보십시다. 영감님 믿고 시작을 했는데 지금 와서 으짤 것이요?”
“믿어야지. 다만······.”
황대장은 그래도 뭔가 석연찮은 표정을 지어보이고 나더니 기어코 알량한 자존심을 드러냈다.
“동생은 나 하고 사냥을 다닌 지가 몇 년인가? 그라제마는 어느 한 해 한 번이라도 실패한 적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누가 형님 실력을 몰라서 그러것소?”
타잔은 노인이 행여 잠에서 깨어나면 낭패라는 듯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언쟁을 해봐야 공친 하루가 다시 돌아올 수 없는데도 황대장은 ‘이 사람이 말대꾸는 꼬박꼬박 하고 있네?’하고 핀잔을 주고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타잔과 베레모 사내까지 잠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오히려 두 눈이 똥그랗게 떠지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잠이 쉽게 오지 않는지 엎치락뒤치락하는 눈치더니 운전석으로 옮겨 얘기나 나누자고 제의를 해왔다. 나 역시 잠이 쉬이 오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운전석으로 가 오리털담요로 온 몸을 친친 감은 다음 앉았다.
“사냥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사냥감을 획득해야 직성이 풀리는가 봐.”
그녀 역시 오리털담요를 껴안듯 뒤집어쓰고 조수석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이죠. 엽총에서 불을 뿜어낼 때 야생동물이 쓰러지면 어떤 쾌감이 있겠지요. 낚시꾼들이 손맛을 본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인류 최초의 미술작품도 사냥 그림이었다지. 가장 오래된 그림으로 밝혀진 것은 남프랑스의 쇼베 동굴벽화라고 한다나. 사자, 말, 순록, 들소 등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 동굴벽화는 색채가 화려해서 경탄을 금할 수 없다더군.”
“춥지는 않는지요?”
나는 그녀의 말보다도 추위가 걱정스러워 물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또 서역(西域)의 텐산(天山)에는 인류의 탄생설화가 있는데, 이를 뒷받침하듯 암벽화가 남아있다더군. 그 암벽화는 그들이 사용했던 활과 그 활에 맞아 쓰러진 사슴 등 동물들이 많이 나타나 있다더라구.”
“동굴벽화에 대해 관심이 많으시군요.”
나는 그녀의 미술 실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원시시대 미술이 오늘 날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인데, 그와 같은 그림을 그릴 때 동물의 털로 만든 붓으로 그렸다더군. 구석기 시대의 그 화가는 스프레이 같은 채색 방법을 구사했다고 밝혀지고 있는데, 현대의 파스텔화 그릴 때처럼 같은 방법이 아닌가 여긴다더더군. 그래서 쇼베 벽화를 보고 전문가들은 ‘선사시대의 레오나르드 다빈치’ 작품이라며 경탄해마지 않는다고 하더라구.”
나는 그녀의 달변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동물벽화라······.”
나는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동물들만 그렸다면 그 뿐, 사냥 그림 정도로 끝났겠지. 문제는 특이한 인물상도 눈에 띈다는 점이지. 머리 장식이 희한하고 특이한 옷을 입은 인물상도 그려져 있다는 것인데, 광채가 나는 관도 썼더라구. 이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성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머리 위에 표현하는 광배(光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더군. 이러한 광배는 신적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학자들은 판단하고 있는데, 일종의 샤먼의 한 가지가 아닌가 판단하는 학자도 있다고 들었어.”
“제가 좋은 법문을 듣는 것 같군요.”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칭찬했다.
“법문은 무슨 법문? 언젠가 스페인의 선사시대 동굴을 본 적이 있었지. 스무 마리 이상의 동물들이 천정에 그려진 그림이었는데, 일컬어 ‘시스티나 성당’이라고 부르더군. 엉덩이가 큰 사슴, 그리고 조랑말, 암컷의 들소들, 또 다른 무리의 동물들······. 이들은 마치 조각을 한 것처럼 생생하게 전해져 오더라구. 거기에는 암소가 발정기에 달해 울부짖고 있는데, 그 아래에는 수소가 있어서 암소가 수소를 올라타는 일종의 전희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더라구. 학자들은 구석기 시대 동굴미술은 사냥과 성(性)이 사람의 마음에서 연결되는 상징들이라고 한다더군. 오라버니를 따라 사냥 구경을 하다 보니 간혹 자연 동굴들과 마주치게 되더라구. 그래서 스페인을 다녀온 것도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눈을 떠보니 바깥세상은 온통 눈 천지였다. 밤새껏 눈이 내렸는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은회색으로 변해버린 것이었다. 올 겨울 들어 첫눈치고는 많은 양이었다.
날씨조차 몹시 추웠다. 게다가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자, 오늘은 반드시 그 산신령이란 놈을 잡아야 하니까 개세수를 하시기 바랍니다. 화장품은 일체 찍어 바르면 안 됩니다요.”
매우 발달된 멧돼지의 후각을 염려했는지 타잔이 일어나자마자 단속부터 했다. 아침밥을 보리호 안에서 해결한 후 이윽고 노인이 앞장을 서자 모두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일단 산 지형을 잘 아는 노인의 경험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은 눈이 많이 내렸기 때문이었다.
“자, 여길 보시오.”
자꾸만 발목이 빠지는 눈을 헤치고 산 계곡 하나를 지났을 때 이윽고 노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땅 위에는 멧돼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바로 그 놈인기여.”
노인이 무릎을 꿇고 발자국을 요리저리 살피더니 신음소리를 냈다.
“틀림없이 그 놈 발자국인가요?”
타잔이 엽총을 추스르며 물었다.
“그렇소. 내가 멧돼지 발자국을 계속 따라가 볼텐께 나머지 분들은 저기 샛터골 목을 지키시오. 상목, 중목, 하목 따로따로 …….”
노인은 하목 아래인 헛목을 맡기로 하고, 상목은 황대장과 베레모 사내가 맡기로 했다. 중목은 나와 여강이 맡기로 했으며, 하목은 타잔이 맡기로 결정했다.
“좌우당간 영감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수. 우리도 사냥이라면 한가락 하는 사람들이요만, 으짤 것이요? 영감님이 기왕지사 왕초가 되었응께 그저 산신령이나 잡게 해 주슈.”
황대장이 노인을 쳐다보며 이죽거렸다.
“난 말이요. 당신네들이 사흘 고생할 것을 하루만 고생하게 하려고 나선 것이오. 암말 말고 샛터골로 가서 목을 잘 지키시오.”
노인이 헛목을 향해 내려갔고, 나와 그녀는 중목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눈길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고 잘도 올라갔다. 산을 타는 누구에게 물어봐도 힘들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유독 그녀는 달랐다. 그러나 나는 얼마 오르지 않아서 한 차례 미끄러지면서 하마터면 바위에 머리를 찧을 뻔 했다. 차라리 눈 위에 오래토록 누워 있으면 싶을 만큼 사지의 맥이 빠져버린 느낌이었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그렇게 거세게 부는지 가만히 있으면 뼈까지 얼어버릴 것 같았다.
“전 이만 내려가겠습니다.”
저만치 떨어져 올라가고 있는 그녀에게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이지 내 꼬락서니가 무엇인가 싶었다. 정작 해야 할 일은 미뤄둔 채 몰이꾼 노릇이나 하고 있는 내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더구나 이 추운 겨울에 고생을 바가지로 하고 있다니······.
“기껏 이틀째인데 그만 내려가겠다구?”
무슨 사내가 이까짓 눈길 하나 헤쳐가지 못할꼬, 그녀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직접 사냥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따라나선 길 아닌가요?”
“이 대자연 속에 자신을 한 번 던져보는 것도 수행이 아닐까?”
그녀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치어다보며 말했다. 온 천지를 내리비추는 햇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가슴 속을 엑스레이처럼 투과할 것 같았다.
“화실을 제공해 주겠다고 권유하더니 이 고생시키려고 그랬습니까?”
“아니지. 그림을 그리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 진정 내가 그린 작품이 작품다운가? 이런 고통에 비하면 고생이 아니라는 것이지. 눈 쌓인 산을 타면서, 일상을 훌훌 털고 또 다른 세계에 나를 던져보면서 거기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그래서 그동안 사냥꾼을 따라다니면서 바보부처를 떠올리셨나요? 아니, 계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머리를 깎으셨나요?”
나는 여전히 불만 섞인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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