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초고령화 시대(46회)
신전면 노해마을 정성례 할머니(86)
“동서 동서, 자네 징하게 독하네.
술이나 한 잔 딸고 곡이나 한 번 하소”
참으로 정정하기 이를 데 없는 할머니였다. 분바르고 오색옷 차려입으면 황혼의 결혼식에 참여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건강하고 화색도 좋은 정성례 할머니였다. 누구나 나이 들면 뼈와 가죽 밖에 남아있기 일쑤인데도 정 할머니는 몸피 또한 중년과 진배없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았다.
“열 일곱 살에 시집갔어라우. 한 마을 총각헌테···”
큰 딸로 태어난 정 할머니는 어찌나 중매쟁이가 문턱이 닿을 만큼 다니는 바람에 일치감치 시집을 갔다고 털어놓았다. 그 시절, 일본으로 징용가지 않으려는 총각들 때문이었다고 부언 설명을 했지만, 그러나 정 할머니를 유심히 지켜본 이웃집 시어머니 역시 행여 다른 총각에게 빼앗길까 봐 갑자기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함께 늙어가는 할머니가 있었기에 그랬지만 베 짤 때 사용하는 각종 기구들을 들고 와서 교체도 해주는 등 유난히 발길이 잦아들더니 딸을 달라고 사뭇 보챘다. 그래서 열흘 앞두고 날을 받아버렸고 정 할머니는 이웃집으로 시집을 갔다.
“친정이 이웃집이어도 발걸음 한 번 안하고 집안 일만 했지라우. 네 동서랑 세 시누이랑 참말로 좋게 살았지라우. 큰 형님은 꼭 시어머니 같았지만이라우.”
그 때 남편은 멋쟁이였다. 남들처럼 일을 하긴 해도 한량이어서 비(碑) 세우거나 잔치가 벌어진 곳이면 곧잘 불려 다녔고, 나중에는 이웃마을까지 다녔다. 그만큼 북 치고 장구 치며 노래 부르는 솜씨가 뛰어났다. 때로는 함께 일하는 여자들을 집에서 재우기까지 했다.
“시부모 모시고 삼시로 물 단속 하나는 잘한다고 치사 듣고 살았제라우”
정 할머니는 동네 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던 시절, 가마솥까지 물을 채워놓아야만 직성이 풀릴 만큼 물 단속을 잘했다. 허드렛물도 많이 들어갔지만 소 키우면서 여물 썬 쇠죽을 끓일 때에도 물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에 아짐은 물동이를 이고 사요잉” 일가친척들도 정 할머니의 물동이질에는 혀를 내둘렀다.
분가를 했을 때 논 스무마지기를 받았다. 그 때 집은 오두막에 가까울 정도였지만 살면서 집도 크게 장만하고 논도 늘렸다. 그렇다고 놉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을 만큼 살았다. 그래서 고생을 하고 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정할머니다. 게다가 아들 다섯에 딸 셋을 낳아서 키웠다. 다들 잘 생기고 예뻐서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자녀들이었다.
복 받은 노인이라고 말들 하지만 속은 솔직히 숯검댕이여
그런데 큰딸이 초등학교 6학년 되던 해 발등이 붓기 시작하더니 시나브로 위로 올라왔다. 급기야는 온 사지를 못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걷지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장애자들이 모여 사는 광주 모 교회에서 지내게 되었고, 지금까지 결혼도 않은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 하지만 교인들이 무척 큰딸을 좋아해서 여러 교회를 방문하게 하는 등 활기찬 생활을 하고 있다고 귀띔한다. 정 할머니에게 시련은 또 찾아왔다. 군대간 셋째아들이 갑자기 태권도를 하다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일이었다. 군부대를 찾아갔더니 시체실 앞에 과일 등을 놓은 제상이 차려져 있었다. 정 할머니는 제상의 제물을 쓸어버리며 내 아들을 내놓으라고 울부짖었다. 그 때마다 군인들이 다시 차려놓았지만 다시 쓸어버리곤 했다. 세 차례나 그렇게 하고나서 정 할머니는 “저런 군인들이 무슨 죄가 있것냐? 느그덜이 사다놓아라”했다. 보름동안 군부대간부와 옥신각신 하고나서야 셋째아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있었다. 근무하다가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살아생전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 용돈도 많이 드리며 효도하겠다고 했던 셋째였다.
막상 남편이 예순 넷의 나이로 죽었을 때에는 앞세운 자식 때문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큰형님이 말했다 “동서 동서! 자네 징하게 독합네잉. 술이나 한 잔 딸아놓고 곡이나 한 번 하소”하길래 막상 슬픔이 솟구쳐 곡을 했다. 치상이 끝난 다음 신전면에 나가던 길이었다.“예말이요, 예말이요!”하고 누가 부르길래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제수씨! 이리 잔 오시씨요. 술 한 잔 합시다. 그란디 제수씨가 잔 부어놓고 곡을 할 때 나도 많이 울었습디다.” 했다.
8남매를 낳아 키우며 복 많은 노인이라고 하지만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 할머니는, 그러나 큰아들네 집에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지난 해 섣달 생일에는 서울에서 감사원 감사로 지내는 아들 집에서 50여명 자손들이 모여 화려하게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마을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복 있는 노인이다!”라고 말하자 정 할머니는 “자식들이 잘 풀려서 잘사는 것이 복이제”
(이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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