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랑 선생을 다시 보자
이숭원교수(서울여대 국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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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랑은 1930년 3월 <시문학> 1호에 13편, 1930년 5월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였다.
내마음의 어듯 한편에 끝업는 강물이 흐르내
가슴엔듯 눈엔듯 또핏줄엔듯/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잇는곳
내마음의 어듯 한편에 끝업는 강물이 흐르내
― "동백닙에 빗나는 마음"- (<시문학> 1호)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십다
새악시볼에 떠오는 붓그럼가치/詩의 가슴을 살프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십다
― "내마음 고요히 고흔봄 길우에" - (<시문학> 2호)
이 시편들은 자연의 아름답고 순결한 정경을 통하여 그렇게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닐 것을 추구하는 내용이다.
1934년 4월 <문학> 3호에 발표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의미와 형식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현대시의 고전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기다리다가 기다림의 대상이 사라졌을 때는 슬픔을 느끼고, 그러면서도 슬픔에 주저앉지 않고 또 다시 그것이 오기를 기다리겠다는 이 시의 내용은 인간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진실을 잘 나타냈다.
그러한 주제가 그것에 호응하는 예술적 형식과 완벽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이 시는 우리 서정시의 전범(典範=본보기가 될만한 모범 케이스)으로 남게 된 것이다.
1935년 11월 <영랑시집>을 간행한 후 한 동안 침묵을 지키던 영랑은 1939년에 들어서서 여러 편의 작품을 발표하는데, 그 작품들은 초기시와는 다른 특징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저항시적 특성이다.
1939년 1월 <조광> 5권 1호에 발표한 ｢거문고｣에서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해가 스무번 바뀌었는데/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해가 스무번 바뀌었다는 것은 1919년의 3·1운동 이후 20년의 세월이 지난 것을 말한 것이다.
영랑은 3·1운동 때 의거에 참여했고 그 때문에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경력이 있다. 20년 전 민족이 총궐기했던 3·1운동을 떠올리며 그 후로 우리 민족이 침묵과 슬픔의 세월을 보내고 있음을 한탄한 것이다.
이 시에서 영랑은 당시의 현실을 “바깥은 거친 들 이리떼만 몰려다니고/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다니어”라고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현실을 부정하며 20년 전의 그 외침이 다시 울려나오기를 기원한 것이다.
1939년 11월 <문장> 1권 10호에 발표한 ｢독을 차고｣는 영랑의 저항정신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다. 그는 내 마음에 독을 찬 지 오래되었다고 말하며 무엇때문에 무섭게 독을 차고 사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毒을 품고 선선히 가리라
마금날 내 깨끗한 마음 건지기 위하야"
즉 일제강점기의 현실 속에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빼앗으려는 이리 승냥이들이 날뛰고 있으므로 그들과 맞서서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독을 차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결의를 밝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자연의 순수함을 통해 마음의 순결성을 추구하던 시인의 정신이 추악한 현실에 직면하여 그것과 맞서는 저항의 자세로 전환하는 모습을 뚜렷이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1940년 5월 <조광> 6권 5호에 발표한 ｢한길에 누어｣에서는 ‘서럽고 원통한 세월 속에서 어린자식에게 똑바른 말을 해야겠다. 비겁하게 도피하지 않고 의연하게 사약을 받은 선비의 모습을 이야기한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다.
또 1940년 6월 <조광> 6권 6호에 발표한 ｢우감(偶感)｣에서는 ‘창자가 짤리는 서름 속에서 우렁찬 소리 한마디 그립지 않은가!’라고 그 시대의 암울함에 탄식하고 있다.
1940년 9월 <문장> 2권 7호에 발표한 ｢춘향｣은 영랑의 저항정신을 최종적으로 집약해 표현한 작품이다.
이 시에서 영랑은 춘향의 일편단심을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맞서 목숨을 바쳐 자신의 절개를 지킨 성삼문, 박팽년 같은 사육신의 정신과 임진왜란 때의 항일 의기 논개의 정신을 함께 나란히 놓아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바쳐 깨끗한 마음을, 정신의 의로움을 지킨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 시를 통해 영랑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문학사적 사실로 볼 때 김영랑은 처음에는 마음의 순결성을 추구하는 시로 출발했는데 일제의 강압이 심해지자 불의한 현실에 맞서서 자신의 순수함을 지키려는 저항의 정신을 시로 표현했을 알 수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는 순수시와 저항시를 양분해서 보는 경향이 있다. 순수시는 현실에서 떨어져 내면의 순수함을 추구한 것이고 저항시는 현실에 참여하여 저항적 발언을 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영랑은 순수시와 저항시의 양축을 연결하여 그것이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것임을 작품으로 실증한 문학사의 귀중한 전범을 남긴 것이다.
1941년 이후로는 한글 사용이 일체 금지됨으로써 대다수의 문인은 침묵을 지키거나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하게 된다.
시작품을 통해 저항정신을 표현한 김영랑의 일제말의 실제의 삶은 어떠했을까?
실제의 삶이 자신의 발언을 따라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쉬움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스러운 시인 김영랑은 자신의 정신을 실제의 삶에 그대로 실천했다.
그는 늘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한복을 입었으며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 일본어로 한 줄의 글도 발표하지 않았으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제말 암흑의 5년을 버텼다.
일제말 저항시인으로 알려져 있는 윤동주도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서 굴욕감을 무릅쓰고 어쩔 수 없이 1942년 1월 29일에 平沼東柱(히라누마 도오쭈우)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 그러나 영랑선생은 김윤식(金允植)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지킨 것이다.
당시 창씨개명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자료를 제시한다.
일제는 이른바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촉진하기 위해 1939년 11월 제령 제19호로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동년 8월 10일까지에 ‘씨(氏)’(성)를 결정해서 제출할 것을 명령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관헌을 동원해서 협박과 강요로 강행,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제에게는 각급 학교의 입학을 거부하고 창씨하지 않는 호주는 ‘비국민’ 즉,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의 낙인을 찍어 사찰미행을 철저히 하고 노무징용의 우선대상으로 삼거나 식량 등의 배급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갖은 사회적 제재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창씨의 강압 속에서도 애국적 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으나, 기한까지 창씨를 계출한 것은 322만 호로 80%를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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