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연휴가 시작되던 즈음에 선물을 받았다. 일 년에 한두 번 찾아오셔서 잠깐 동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 가시는 분, 그 분은 나의 오랜 친구다. 이번에 주신 선물은 5센치 길이 정도 되는 작은 조롱박에 ‘봄 같은 삶’ 이라는 글씨를 써 오셨다. 추석이 내일 모레로 다가오던 결실의 계절 가을, 고독의 계절 가을,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강진이 낳은 서정시인 김영랑 시인의 "오매 단풍 들것네."가 저절로 읊어지는 계절에 나는 그 분 때문에 연휴 내내 ‘봄 같은 삶’이라는 문장처럼 따스하게 지냈다.
왜 봄 같은 삶이라고 쓰셨는가에 대해서 그 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봄의 따뜻한 기운은 지속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라고, ‘봄날은 간다’ 라는 말도 있지만, 가버린다는 의미가 좋지 않다고 하셨다. 그 분은 연세가 여든이 넘으셨고 뇌졸중을 앓고 불편한 몸을 이겨내셨다. 그러니 이 작은 조롱박에 정성스레 쓰신 봄 같은 삶의 의미는 얼마나 큰 깊이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긍정적인 사고를 하시기 때문에 아픈 곳이 없다는 친구분은 최근 허리가 안 좋아 두 가지 운동을 실천하고 계시다고 했다. 그 하나는 맨발로 맨땅을 가볍게 뛰는 것인데 처음엔 힘들었지만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고 하셨다. 두 번째는 네발로 걷는 운동이라고 했다. 사람은 두 발로 다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서 자연히 허리가 아플 수밖에 없지만, 네발짐승은 허리가 아프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네발짐승처럼 걷는 운동이 허리에 좋아 매일 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봄 같은 삶을 살기 위한 건강비결의 참고사항이다.
며칠 전 한 회의에 참석 후 밖에 나왔을 때 몇 명이서 따사로운 햇빛 아래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내가 물었다. “햇빛아래가 대화하기 더 좋으신가 봐요?” 그러자 한 분이 대답하셨다. “우리는 병아리들처럼 햇볕을 좋아해서 그래요”
이번 추석연휴에는 가을비가 더 자주 내려서 날씨도 금세 차가워졌다. 창밖으로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를 보면서 마음으로는 봄 같은 삶을 생각하는 이 연휴의 중심, 10월 5일에 2017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일본계 영국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로 발표되었다. 내 삶의 중심이 문학이니 그것을 먹지 않고 따스한 삶을 구경할 수 없는 나는 곧바로 그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과 읽으려 했던 조남주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주문했다. 모든 이들의 남아 있는 나날이 봄 같은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느낌으로 또는 82년생 김지영과 66년생 이현숙의 삶이 같은 여성으로서 어떤 공통분모가 있을까 찾고자 했다.
위대한 집사이고 싶은 주인공 스티븐슨의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내게는 너무도 답답해서 자꾸만 눈이 감겼다. 오로지 주인의 충실한 집사이고 싶은 사람 스티븐슨, 자신을 품위라는 고상한 단어로 지켜나가는 한 인간의 지고지순함이 내겐 한여름 찜통더위를 견뎌야 하는 지겨움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나선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 석양 앞에서도 자신을 찾지 않고 평생 지켜온 집사의 품위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이 처량하고 불쌍한데도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품위로 합리화하려 한다. 그러면서 그의 봄 같은 삶은 인생의 황혼녘 저녁 석양에서 서서히 시작한다. 젊은 날 무의미하게 지나버린 켄턴양의 사랑도 레지스탕에 몸담았던 훌륭한 주인도 저녁 석양의 아름다움과 함께 한 송이 꽃으로 남아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진다. 주인공이 특별하지 않은 한 인간이지만 누구에게나 고귀한 품위가 있고 가을바람에 쓸려가는 낙엽을 책갈피에 담듯 어떤 삶이든 존중받을 가치가 있음을 발견했다.
82년 김지영은 나보다 많이 어리다. 내게 김지영이라는 여성은 희망보다는 슬픔으로 여운이 남았다. 김지영이 살아왔던 아름다운 청춘과 고민, 슬픔, 역경 이런 것들이 어떤 삶엔들 없을까. 김지영도 특별하지 않은 매우 평범한 여성이다. 나의 청춘의 시기가 그리 기쁘지만은 않았던 것은 내게 주어진 무거운 짐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위로 몇 명의 아들을 키우지도 못하고 잃었던 우리 부모님은 늦게 둔 두 딸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그러나 딸 둘이 학교를 채 마치기도 전에 부모님은 이미 너무 늙어버렸다. 대학을 다니는 언니와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나의 이십대는 김지영보다 힘든 무게를 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20대는 젊기에 늘 봄 같은 삶이다. 다가오는 이성이 있고, 내가 끌리는 이성이 있는 시기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따뜻하기도 하고 시리기도 하다. 학창시절에는 펜팔의 즐거움이 있었고, 몇 번 장미 한 송이씩을 건네주다 그만 둔 남자, 몇 번 연애편지를 건네주다 지쳐 사라진 남자, 나의 이십대에 늘 함께 있어준 여자 같은 남자친구, 청춘은 사랑을 꿈꿀 수 있어 봄인 걸까. 최근의 조사에서도 20대가 아파도 가장 행복하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한 시기에 나는 김지영보다 더 바빴던 것 같다. 돈도 벌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서점에서 밤늦게까지 책 보는 게 취미였으니 누군가 don.t히보들, 히보들less 라고 별명을 남겨 놨다. 그러나 정작 내가 좋아 했던 남자는 어느 날 내게 청첩창을 보내왔다. 잘나가게 보인 그 남자는 한 여자가 일찌감치 채어갔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이십대 후반 내 주위엔 친구도 보이지 않았고 혼자 살 것인지 결혼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남았다. 그러던 어느 해 추석 내 여자같은 남자친구와 함께 온 한 남자가 있었다. 듬성듬성 새치가 섞인 촌스런 머리에 거기다가 창피하게 앞니에 웬 은니를 박았을까. 그리고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의 유머와 자신 있는 모습에 끌려 나는 그에게 빨리 결혼하자고 말하고 말았다. 유난히 소박하게 보이는 남편과 그런대로 세련되게 보이는 내가 어떻게 부부가 되었는지 궁금하다던 분에게 “우린 처음부터 그랬어요” 라고 말한다. 진짜 처음부터 그랬다. 82년생 김지영이 자란 환경과 대학생활, 이성간의 교제, 직장과 결혼 육아라는 길을 거치며 여자의 삶에서 느꼈던 공포, 피로, 당황, 놀람, 혼란, 좌절 이러한 것들에 많은 공감이 갔다. 그녀가 여자로서 겪었던 어떤 몇 개의 상황들은 내가 겪었던 것과 거의 비슷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내가 전혀 생소한 농촌의 산골 흙집에서도 애 셋을 낳고 인내한 삶은 우리 어머니에게 받은 강한 정신력 덕분이다. 나는 여성으로서 선택한 한 남자와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기 위함이었지만, 우리 어머니는 내가 선택한 삶을 보고 놀라서 말을 잇지 못했어도 딸을 믿어주고 아이들도 키워주셨다. 그리고 내 농토 한 평 없이도 멋지게 농사짓는 재미를 즐기는 남편, 그는 정말이지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슨과 같은 사람이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람, 그래서 성실한 그의 삶도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을 보고 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즐기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이번 주말인 20일부터 22일까지 ‘남도음식문화큰잔치’가 열리며, 10월 27일부터 11월 12일까지 '강진만 춤추는 갈대축제' 가 열리는 강진만 생태공원에 가서 석양을 한번 바라보라. 어두워지는 저녁, 그 석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다. 황혼의 나이에 ‘봄 같은 삶’을 전해준 친구분이 선물해준 조롱박을 바라보며 감사했다. 조롱박의 씨앗을 심고 그 작은 조롱박을 골라 삶고 말리는 어려운 작업을 거쳐서 거기에 ‘봄 같은 삶’을 왼손으로 쓰신 열정을 배우고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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