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제자 중에서 가장 출중한 제자를 뽑으라면 단연 황상을 들 수 있겠다. 1802년 10월 10일, 황상은 역사적인 만남을 다산과 가졌는데, 그는 <치원소고>를 통해 그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1801년, 지금은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화를 당하시어 탐진(강진의 옛 이름)으로 귀양오셨는데,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일이 허용되지 않았다. 1802년 가을 이 제자는 천한 몸으로 두세 명의 아이들과 객사 앞 길가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스승님께서 사람을 시켜 공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을 불렀다.
황상은 아전의 아들이었다. 동생 황경과 더불어 손병조, 황지초, 이청, 김재정 등과 함께 강진 읍내 6제자가 되어 다산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다산이 황상을 아끼는 일은 유별났다. 신혼생활을 하던 황상에게 별거할 것을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고, 부친의 삼일장을 지내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내리기도 했다. 특히 시묘살이를 하지 않으면 큰 불효가 된다며 실천할 것을 강하게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황상은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 지은 시들이 다산을 감탄케 했다. 특히 <설부>란 시를 보고 깜짝 놀란 다산은 그 시의 내용을 흑산도에 유배 중이던 정약전 형에게 보내기까지 했는데, 약전 역시 감동의 글을 보내왔다. 그 때가 1806년 3월이었다.
황상의 나이가 올해로 몇인가?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타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어진 이의 이로움이 어찌 대단하다 하지 않겠는가? 그가 내게로 오려는 마음은 내 마음을 상쾌하게 하네만, 뭍사람은 섬사람과 달라 크게 긴요한 일이 아니고서는 경솔하게 바다를 건널 수가 없다네. 삶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은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일이니 반드시 얼굴을 맞대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이. 이 말을 전해 주어 뜻을 가라 앉혀주는 것이 좋겠네.
모름지기 황상이란 제자를 더욱 부지런히 가르쳐서 그로 하여금 재주를 이루게 하는 것이 좋을 듯싶으이. 인재가 드문 세상이다 보니 이 같은 제자는 기대하기가 어렵네.
이 섬에서도 서너 명의 아이들이 있는데 간혹 마음과 생각이 조금 지혜로운 녀석도 있다네. 하지만 본 것이라곤 <사략>과 <통감>을 벗어나지 않고 마음으로 바라는 바로는 병교나 풍헌이 되는 것을 넘지 않는다네. 게다가 사람들이 모두 가난해서 온 섬 가운데 편히 앉아 밥 먹는 사람이 없는 형편일세.
-월출산 아래서 이 같은 문장이 나타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네. 정약전의 칭찬에 다산은 어깨가 우쭐했으리라. 황상은 정약전의 편지를 읽고 나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늘을 날을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을까.
황상은 다산초당의 제자들과 합류해서 함께 지내지는 못했지만 뱃길로 다산초당을 이따금씩 들렸다. 그 때마다 다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다산이 강진으로 우배를 온 것은 불향 중 다행이었다. 그 뿌리를 찾아볼 때 고산 윤선도가 해남 윤씨라는 점이다. 고산 윤선도는 남인의 영수로 서인과 대립하다가 20여 년간 유배생활을 하였고, 19년간 은거생활을 한 사람이었다. 해남읍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산의 고택이자 해남 윤씨 종가인 녹우당이 있다.
다산은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증손자인데, 모친이 윤두서의 손녀였다. 따라서 다산의 얼굴이 수염이 많은 공재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다사 ㄴ자신도 ‘나의 정분(精分)은 외가로부터 받은 것이 많다’고 말할 정도이다.
다산이 유배를 올 때만 해도 다산의 외가가 되는 해남 윤씨 가문과 고산 윤선도의 사위인 이보만의 후손들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다. 특히 다산초당에서 해남 외갓집과는 44km 떨어진 공재 윤두서의 고택에는 다산에게 있어서 큰 만족을 줄만한 방대한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해남 대둔사와 그의 말사인 백련사에는 암암 혜장과 초의 의순 등의 학승들이 있었기 때문에 유배생활이 활기찰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산은 윤단(1744~1821)의 도움으로 다산이란 곳에 둥지를 틀 수 있었다.
<사암선생연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봄에 다산(茶山)으로 옮겨 거처했다. 다산은 강진현 만덕사 서편에 있는데 처사 윤단의 산정이다. 공이 다산으로 옮긴 뒤 대를 쌓고 못을 차고, 꽃나무를 열 지어 심고, 물을 글어와 폭포를 만들고, 동쪽 서쪽에 두 암자를 짓고, 서책 천여 편을 쌓아놓고 글을 지으며 스스로 즐기어 석벽에 ‘정석(丁石)이란 두 자를 새겼다.
다산은 이곳에서 정원을 꾸미고 차와 채소를 가꾸며 전원생활을 영위하면서 18제자를 길러냈다. <다신계절목>에 기록된 이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유회, 이강회, 이기록, 정학가, 정학포, 정수칠,윤종문, 윤종영, 윤종기, 윤종벽, 윤종삼, 윤종진, 윤종심, 윤종두, 윤자동, 윤아동, 이택규, 이덕운 등이다. 한 가지 사의재 제자들과 다른 점은 모두 양반가의 자제들이란 점이다. 윤단의 손자가 6명으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다산 집안과 외가의 친척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사의재 제자들과는 달리 그리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강회, 윤종심, 윤종벽 등은 이후 다산의 아들을 도와 다산의 저술 활동에 큰 역할을 했다.
다산은 해배되어 마재로 돌아가기 전까지 강진 일대에 18마지기의 논밭을 벌었다. 좋은 차 수백 근을 쌓아두고서 다른 사람의 요구를 들어주기까지 했으니 부자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다산은 윤서유의 아들 창모(昌模)를 사위로 맞았는데, 한 해 전에 대를 이어 절친하게 지내는 옹산 윤서유를 위해 ‘조석루’란 그 집안의 정자에 대한 글을 썼다.
‘조석루는 윤개보(윤서유의 자)의 서루(書樓)이다. 나는 다산에 기거한 지 이제 4년이 되는데, 꽃이 필 때마다 산보를 했다. 매번 산에서 오른쪽으로 고개 하나를 넘고 시내 하나를 건어 석문(石門)에서 바람을 쐬며, 용혈(龍穴)에서 쉬었다. 청라국에서 물 마시고, 농산(農山)에 있는 별서(別墅)에서 밤을 보내고 나서는 말을 타고 다산으로 돌아오곤 했다. 개보와 그의 사촌 아우 군보(윤시유)는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어떤 때에는 석문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용혈에서 기다리고, 어떤 때에는 청라곡에서 기다렸다. 이미 취하고 배불리 먹은 뒤에는 그와 함께 농산에 있는 농막에서 잠을 잤다.
홍임 모녀
1812년 다산의 외동딸이 시집을 갔고, 같은 해 소실로 함께 사는 그녀가 홍임을 낳았다. 다산은 혈육의 정으로 매조도(의증종혜포옹매조도)를 그렸다. 외동딸이 시집을 갈 때 매조도를 그려주었듯이 홍임을 위해 그려준 것이다. 홍임 모친은 15세에 시집을 갔다가 자식도 없이 친정으로 돌아온 청상과부였고, 음식 솜씨도 남달랐으므로 다산에게는 큰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그의 화제에서 ‘썩어가는 묵은 가지에 꽃이 피고’라든가 ‘빛깔 고운 작은 새 날아들었으니 늘그막에 이만한 즐거움이 어딨으랴’란 말 속에서 다산이 큰 행복을 느끼며 지냈으리라 상상이 간다.
묵은 가지 썩어 그루터기 되려는데
푸른 가지 뻗어 활짝 꽃을 피웠네.
어디선가 날아왔나 빛깔 고운 작은 새
한 마리만 남아 하늘가를 떠도네.
그러나 홍임 모녀는 다산이 지내는 다산의 고향 마재까지 갔다가 다산의 부인에게 쫓겨나 다시 강진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다산초당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다산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참으로 학문에 매진할 수 기회였다. 그러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홍임 모녀와의 사랑은 늘그막의 다산을 외롭지 않게 하였으리라 짐작이 간다. 글 : 송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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