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박 끝에 살인
정조 6년(1782년) 12월 추운 겨울밤. 평안도 구성에 사는 최수진과 최능통이 도박판에 놀러갔다. 추수가 끝난 겨울밤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름을 즐기는 게 조선 후기의 풍습이었다. 친척사이였던 둘은 돈내기 노름을 하였다. 조금씩 돈을 잃던 최능통이 가진 돈을 모두 한 번에 걸었다가 최수진에게 전부 잃게 되었지만 돈을 주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최수진은 돈을 갚지 않는다며 최능통을 구타했고 얻어맞은 최능통은 죽고 말았다. 당시 주변의 청년들도 모여들어 싸움을 말리거나 구타에 합세했는데, 이 때문에 누가 정범인지 확실치 않게 되었다. 최수진이 최능통과 노름을 한 사실이 분명하므로 정범으로 지목되었지만 최수진의 아비 최태규는 도박장에 함께 있던 금동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당시 평안도 관찰사는 “도박에 지고 돈을 내어주기 아까워하자 술에 취한 최수진이 등잔대를 휘둘러 최능통을 때린 것이다. 비록 죽일 마음은 아니었다 하더하도 함께 도박한 이들의 증언과 일치한다”라고 보고했고, 형조는 당연히 구타 살인으로 최수진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 사건을 신중히 처리하기로 마음먹고 이듬헤 1783년 8월 재조사를 지시했다. 도박장에서 최수진이 최능통을 구타하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증언이 이어졌고, 이 때문에 최수진이 살인범이라는 사실은 명백해 보였다.
이듬해 윤3월 정조는 또 한 번의 수사를 명했다.
“형조에서는 사형을 청했고, 살인의 변고가 도박장에서 벌어진 데다 최수진은 최능통과 삼종제(三從弟) 사이인데 의도적으로 구타 살해했으니, 이런 범죄사실만 가지고도 사형에 처해 마땅하다. 하지만 원래의 문안이 너무 간략한데다 사건의 단범(干犯)들을 증인으로 삼는 등 사건 조사 과정에서 잘못된 점들이 많다, 또한 백씨는 바로 최능통의 어미인데 최수진의 아비 최태규가 와서 아들이 구타한 상황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초 옥사가 이루어졌을 때 어찌하여 백씨를 심문하지 않는 것인가? 유혈이 낭자하고 증언이 분명하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사형에 처할 수는 없다. 백씨를 다시 세밀하게 조사해 장계를 올리도록 하라.”
최태규의 간교한 술수에 속지 말라
1784년 5월 평안도 관찰사는 재조사 결과를 보고했다. 그는 범인(최수진)의 아버지 최태규가 아들을 보호하려고 금동을 범인으로 지목하는 등 허위 증언을 일삼는다며 흉악한 최태규의 계략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싸움이 한밤중에 노름판에서 벌어졌으니 다른 사람에게 범행을 떠넘기려는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또한 사건에 관련된 자들이 도리어 간증이 되었으니 옥체로 보자면 의심이 들고 미혹할만한 단서가 없지 않습니다. 백씨(최능통의 어미)는 최수진의 아비가 와서 아들 사망 소식을 전했다고 공초했으니 믿을 만하고, 최태규 역시 곧바로 가서 알렸다고 진술했으니 이 또한 분명한 사실입니다. 백씨는 최수진이 구타했다고 진했다고 하므로 두 사람을 대결심문했으나 하나로 귀결되지 않았습니다. 백씨를 초검에서 심문하지 않은 것은 실로 검관의 실수입니다. 지금 최태규를 엄히 조사하려고 하지만 아들의 죄를 아버지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압박하는 것이니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금동은 백씨의 친척이 아니고 최수진은 가까운 친척인데, 인지상정으로 볼 때 백씨가 금동을 주범이라 하지 않고 사건과 무관한 최태규가 처음에 소식을 전할 때는 최능통이 죽기 전이고 급박한 상황인지라 미처 아들을 숨기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재조사할 때 아들(최수진)이 사형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다른 사람을 주범으로 지목한 것도 전황 상 그럴 수 있습니다. 그밖에 최태규가 범죄사실을 진술한 것을 보면, 금동이 도망치면서 돈을 자신에게 주고는 최수진의 옥바라지 비용으로 쓰라고 했다는데 도대체 이치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만일 금동이 그랬다면 처음부터 이를 증거로 아들 최수진의 억울함을 호소했으면 될 터인데, 지금 재조사 과정에서 말이 궁핍해지자 여러 가지 핑계를 대어 옥사를 어지럽히려는 계책을 쓰니 너무도 흉악하고 교활합니다. 최태규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현혹되어 최수진이 주범이라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될 것이니, 최수진을 재차 조사하여 범죄 사실을 추궁해야 합니다.”
다산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려고 무고하거나 허위진술로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자들에 대해서는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때문에 이 사건에 대한 평안도 관찰사의 보고서를 읽은 뒤 그 내용이 너무 정확하여 검안의 표본과도 같다고 칭송했다. 용서할만한 자라야 감형할 수 있지, 용서할 수 없는 자들은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는 게 다산의 근본적인 생각이었다.
용서하기 어렵다
1874년 5월. 정조 역시 평안도 관찰사와 형조의 보고를 연이어 받고 최수진을 용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싸우던 중 사람을 죽이는 변고가 한밤중에 일어났으니 주범과 관련인을 분간하기 어렵게 되었다. 아버지 최태규가 인정상 아들을 구하려고 사실을 덮고 숨긴 것은 이상할 게 아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무슨 마음으로 피살자의 어미에게 곧장 사실을 전해 주었다가 나중에는 또 무슨 까닭으로 죄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겼는가? 평안도의 계사에서 이른바 ‘급하고 정신없는 와중에 아들을 위해 사실을 숨기지 못한 일은 이상할 게 없고, 사건이 정해진 뒤에 주범을 남에게 미룬 것도 정황 상 당연하다’라고 한 것은 참으로 정확하게 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최태규는 아비 된 자로 아드리 죽을 위기에 처한 것을 직접 보았으니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그런데 살인사건이 마무리되지 않고 오랫동안 이어지자 시친(屍親 죽은 자의 친 인척)이 뇌물을 받았다고 무고하는 등 간사한 계교를 부린 것이다. 또한 백씨의 입장에서 보자면 금동과 최수진 가운데 누가 진범이든 아들을 죽인 자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을 것이다. 더구나 금동은 이웃에 사는 아이이고 최수진은 가까운 친척이다. 마땅히 죽어야 할 이웃에 사는 아이를 내버려두고 죄 없는 친척을 범인으로 지목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상 그럴 수가 없는 일이다. 이번에 재조사를 명한 이유는 사형에 처할 상황에서 살려 줄 길을 찾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살인사건의 실정을 이리저리 고려해 보아도 참으로 용서할만한 단서가 없는 듯하다.”
정조 역시 최수진의 아비 최태규가 간교를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최수진이 진범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형에 처하기 전에 살려줄 방도를 다시 한 번 살피는 게 정조가 생각한 어진 정치였다.
1785년 정조의 최종 판결
이후 한 번 더 합종조사가 실시되었고 1년여가 그렇게 지나갔다. 사건이 발생된 지 무려 3년이 지난 뒤 정조는 마지막 판결을 내렸다. 정조는 오랫동안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증언과 증거들이 믿기 어려우므로 일단 의심스러우면 가볍게 처벌한다는 ‘죄의유경(罪疑惟輕)의 원칙을 적용하기로 했다. 최수진을 사형 대신 유배형에 처한 것이다.결국 정조는 최수진이 홀로 범행한 것이라기보다 도박장에 드나드는 불량 소년배들이 최수진과 최능통의 싸움에 끼어들어 간섭하다가 벌어진 사고사로 파악하고 정황을 참작해 최수진을 사형에 처한 대신 유배로 감형됐다. 최수진은 평안도로부터 멀리 경상남도 초계군(지금의 합천군)으로 유배되었다.
다산의 불만
어찌된 일인지 다산은 <흠흠신서>에서 평안도 관찰사의 보고서와 정조의 1784년 하교만을 수록한 채 유배형을 결정한 정조의 마지막 판결을 누락시켰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784년 정조의 마지막 판결은 ‘영서할 수 없다’라는 것이었지만 마지막 하교는 유배로 감형한 처분이었다. 추론해 보건대, 다산이 정조의 최종 판결에 불만을 품었으나 직접 비판하는 대신 1784년에 내린 엄형의 하교만을 수록해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다산의 생각은 남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우려고 한 최태규의 거짓증언과 간계를 절대 믿을 수 없다고 한 마지막 평론에 잘 녹아 있다.
“최태규가 진술하기를 금동이가 도망치면서 최태규 자신에게 뇌물을 주고 아들 최수진의 옥바라지를 잘 하라고 했다거나, 금동이가 최능통 유족에게도 뇌물을 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그의 진술은 전혀 믿을 수가 없다.”
최태규의 거짓증언과 다른 사람에게 죄를 전가하려는 흉악한 간계를 분명히 알면서도 사건이 의심스럽다고 감행한다면 결국 최태규의 의도대로 된 것이 아닌가. 이런 판결이 과연 법의 정의를 제대로 구현했다고 할 수 있을까? 다산은 절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최태규를 절대 믿을 수 없는 만큼 말이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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